문자왕 7년
정월(1월) 봄
문자왕은 아들 흥안(고구려 22대왕 안장왕)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문자왕 이야기에서는
흥안태자와 한씨미녀의 사랑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있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김부식 삼국사기 지리지>
골의내현(骨衣內縣) 왕봉현(王逢縣)
[개백(皆伯)이라고도 하는데, 한인(漢人)
미녀가 안장왕(安臧王 =흥안태자)을
맞이한 지방이므로 왕봉(王逢)이라 이름함]
달을성현(達乙省縣)[한인(漢人) 미녀가
고산(高山) 위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安臧王)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고봉(高烽) (오늘날 고양시, 일산)이라 이름하였음]
저는 고양시 일산 사람이어서 이번 이야기는
익숙하게 봤습니다,,
어저께도 동네산인 고봉산을 오르며
고봉산에 있는 흥안태자와 한씨미녀 사랑이야기
안내판을 보고왔고
김부식 삼국사기 지리지와
신채호 조선상고사에도 기록되어있는
고양시, 일산의 전설
흥안태자와 한씨미녀의 사랑이야기를
지나칠수가 없고 또 사랑이야기는
가치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되기에
여기에 자세히 쓰겠습니다,,
천년도 전에 고구려 흥안태자와 한씨미녀가
만났던 고봉산은 물맑고 공기가 좋습니다,,
<고구려 흥안태자와 한씨미녀의 사랑이야기>
단재 신채호님이 쓰신 조선상고사에는
흥안태자와 한씨미녀의 사랑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있습니다
조선상고사에 나온 제목은
<안장왕 安藏王 (흥안태자)의
*연애 전쟁과 백제의 패퇴>
라고 기록되있습니다,,
(*연애 戀愛 남녀(男女) 사이에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함)
고구려 22대왕 안장왕(흥안태자)은 문자왕이 태자였고
그가 태자로 있을때
한번은 상인 차림을 하고 개백 [지금의 고양] 에서 노는데
그곳 장자 長者 (큰 어른이나 큰 부자라는 뜻입니다)
한씨 韓氏 의 딸 주 (즉 이름이 한주 입니다)
가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안장(흥안태자)이 백제의 감시원에 눈에 띄어
한씨의 집으로 도망해 숨었다가
주를 보고 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마침내
몰래 정을 통하고 부부의 약속을 맺고는
가만히 주에게,,
<흥안태자>한주 !
나는 고구려 대왕의 태자이니
귀국하면 많은 군사를 몰아
이곳(오늘날 고양시 )을 차지하고
그대를 맞아 가리라 !
하고는 달아나서 돌아왔습니다
문자왕이 죽고 흥안태자는 왕위를 이어 안장왕이 됬고
자주 장사를 보내서 백제를 쳤으나 늘 패하고
안장왕이 직접 나서서 정벌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안장왕>한주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애가 타는구나,,
그러다 그곳 태수(관리)가 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주의 부모에게 청하여 결혼하려고 했고
주는 하는수 없이,,
<한주>나는 이미 정을 준 남자가 있는데
멀리가서 돌아오지를 못하였으니
그 남자의 생사나 안 뒤에 결혼 여부를 말하겠다
라고 말했고 태수가 크게 노해서,,
<태수>그 남자가 누구냐 ?
어찌하여 바로 말하지 못하느냐 ?
고구려의 첩자라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냐 ?
적국의 첩자와 정을 통하였으니
너는 죽어도 죄가 남겠다 !
하고는 한주를 옥에 가두어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하고 일변(한편) 온갖 달콤한 말로 한주를 꾀었습니다
이에 주가 옥중에서 노래를 지어서,,
<한주>(이몸이) 죽어죽어 일백번 다시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노래부르니
듣는 이가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신채호>단심가(한주의 노래와 내용이 같음)는
정포은(포은 정몽주)가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은
위의 기록으로 보면 대개 옛 사람이 지은 것,
곧 한주가 지은 것을 정포은이 불러서
이조 태종(이씨조선, 조선 3대왕 태종 이방원) 의
노래 (하여가) 에 대답한 것이며
포은 (정몽주) 의 자작이 아닐것이라 생각된다
태수는 그 노래를 듣고 더욱 주의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안장왕이 주가 갇혀있음을 몰래 탐지하여 알고
짝없이 초조하나 구할길이 없어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안장왕>만약 개백현 (오늘날 고양시)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과 만호후 (일만 호[가족]이 백성이 사는 영지로
세력이 큰 제후를 말합니다)의 상을 줄 것이다
라고 했으나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안장왕에게는 친누이 동생(친여동생)이 있어서
이름을 안학이라고 했는데 또한 절세의 미인이었고
안학은 늘 고구려 장군 을밀에게 시집가고자 했고
을밀도 또한 안학에게 장가들고자 했으나
안장왕이 을밀의 문벌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이 한미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을밀은 병을 일컬어
벼슬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안장왕이 한 말을 듣고는
안장왕에게 나아가 뵙고,,
<을밀>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 뿐입니다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왕께서 만약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케 하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이에 안장왕은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마침내 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해서
문벌을 초월해 드디어 을밀의 청을 허락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했습니다
<안장왕>을밀 자네의 말을 들으니
막혀있던 속이 시원해지는거 같소
천금과 만호후,부귀영화가 아닌
사랑을 바란다는게 나와 같구려
내 하늘에 맹세하고
만약 그대가 한주를 구해오면
내 그대의 소원대로
안학과 혼인을 허락하겠소 !
을밀은 고구려 수군 5천명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떠나면서
안장왕에게 아뢰기를,,
<을밀>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려낼 것이니
대왕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쫒아오시면
수십일 안에 한주를 만나실 것입니다
하고 비밀히 결사대 20명을 뽑아
평복에 무기를 감추어 가지고 앞서서
개백현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태수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오히려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바래서)
사람을 보내서 꾀었습니다
<태수의 말을 전하는 사람>
태수께서는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려줄 것이니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태수의 수청을 들라 !
이에 한주가 대답했습니다
<한주>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것이오
내가 사는 날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것입니다
태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해서
빨리 처형하기를 명했고
이때 을밀의 장사들이 무객 舞客 (무도장의 손님)
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서
칼을 빼어 많은 손님들을 살사하고
고구려의 군사 10만이 입성했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 졌습니다
<을밀의 장사들>고구려 10만군사 출두야 !
이에 을밀이 군사를 몰아 성을 넘어 들어가서
감옥을 부수어 한주를 구해내고
부고 府庫 (문서,재물 곳간)를
봉하여(문, 봉투, 그릇 따위를
열지 못하게 꼭 붙이거나 싸서 막다)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렸고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했습니다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애없이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 개백현(고양시)에 이르러
한주를 만나고
약속대로 여동생 안학을 을밀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신채호>이상은 해상잡록 海上雜錄 에 보인 것인데
삼국사기 본기에는
비록 안장왕이 개백현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없으나
그 지리지의 개백현 주에는 왕봉현은 일명 개백현이니
한씨 미녀 漢氏美女 가 안장왕을 만나곳이다 라고 하였고
달을성현 주에는 한씨미녀가 높은산에서 봉화를 들어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뒤에 이름 고봉이라 하였다
고 했으니 한씨 漢氏 는 곧 해상잡록의 한씨 韓氏 일 것이고
한씨미녀는 곧 한주일 것이며
달을성현은 지금의 고양이니
곧 을밀이 개백현을 점령하고
대왕(안장왕)으로 하여금 한주를 만나게 한 곳일 것이다
<라봉봉>고봉산에 가면
등산로와 정상 장사바위에 한씨미녀 표지판이 있고
고봉의 유래가 한씨미녀가 을밀에게 구출되고
안장왕을 만나려 고봉산에서 봉화를 들어 맞이해서라고 합니다
옛날에 일산신도시 오기전에
고봉산 근처에서 살던때가 떠오르네요
약수터쪽에는 우렁이와 달팽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안태자,안장왕과 한씨미녀
사랑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다행입니다
고봉산 표지판에 있는
고양시 설화에는 삼국사기,조선상고사 기록과 다르게
한씨미녀를 한구슬 漢球 (球 공 구)이라 했다고 합니다
고봉산 표지판에서는 흥안태자는
한씨미녀와 이무기를 달래주는 축제에서
만났고 그와 관련한 지역 유래(이무기 제사를 지내던 용구재는
지금의 일산서구 대화동이라 합니다)가 나오며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과 비슷한 이 한구슬 설화는
1500여년 동안 고양사람들에게 구전되어 온 설화로서
춘향전의 모태가 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고 합니다
또 조선상고사를 쓴 신채호님의 말대로
정몽주의 단심가도 나오고
춘향전의 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를
이몽룡이 구해준다는 이야기나
한구슬,흥안태자와 한씨미녀의 사랑이야기는
이런 노래,설화들의 모태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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