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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왕 7년

7월 가을

문자왕은 금강사(사찰)를 창건했습니다


8월

문자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문자왕 8년

백제 백성들이 기근으로 인해서

2천명이 고구려로 투항해왔습니다


문자왕 9년

8월 가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문자왕 10년

정월(1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12월 겨울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문자왕 11년

8월 가을

메뚜기 떼가 나타났습니다


19월 겨울

지진이 났고

민가에 지진으로 인하여 가옥이 쓰러졌고

사망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양나라 고조가 즉위했습니다

양나라는 중국 남조 국가로

소량이라고도 합니다


4월 여름

양나라 고조가 문자왕을 승진시켜

거기 대장군으로 삼았습니다,,


11월 겨울

백제가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12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문자왕 12년

11월 겨울

백제가 달솔 우영으로 하여금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수곡성을 침공하게 했습니다


문자왕 13년

4월 여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위나라 세종이 우리(고구려) 사신 예실불을

동당으로 불러들여 만나니

실불은 나아가 말했습니다


<예실불>저희 나라(고구려) 는 정성을

대국에 잇대고

여러 대에 걸쳐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바치는데

어김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흰 마노 珂 (흰 옥돌) 은 *섭라 涉羅 에서

나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에게 쫓기는 바 되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습니다


두가지 물건이 왕의 창고에 올라오지 못하는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섭라 涉羅 는 탐라,오늘날 제주도로

추정하고 있고 백제는 해상강국이었기에

다른 지역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만약 탐라,제주도라면 흰 옥돌은 동남아나 외국과의

교역에서 얻어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 위나라 세종이 말했습니다


<위나라 세종>고구려는 세세토록(대대로

상국의 도움을 입어

해외에서 제멋대로 다스려

구이 九夷 (중국에서 이르던 동쪽의 아홉 오랑캐)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했는데


작은 술그릇이 비는것은 큰 술병의 수치이니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 (고구려의 보물이 적어졌으니

이는 우리의 수치인데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 )


이전에 조공이 어그러진 것은

책임이 고구려 왕에게 있는 것이다

경은 짐의 뜻을 경의 임금(문자왕)에게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힘써 다해서

해로운 무리들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두 읍으로 하여금 옛 터를 되찾아서

토산물을 빠짐없이 일정히 조공하게 하라


<라봉봉>당시 위나라 세종의 말을 보면

위나라에서 중국 동쪽의

질서는고구려가 잡고있다는것을

인정하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당시 고구려에서

위나라 왕에게 보낸 조공품이

어긋난게 있었던거 같고

이에 가볍게 질책하는 위나라 세종의 모습 같습니다,,


아니면 조공품이 부담스러워진 고구려측에서

일부로 조공품을 줄이거나 부담스럽다는것을

호소,변명한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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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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