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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8년

3월 봄

(백제 장군)의직 義直 이

신라 서부 변경의 요차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습니다


4월 여름

옥문곡으로 진군하니

신라 장군 유신(김유신)이 이들과

두 번 전투해서 크게 이겼습니다


의자왕 9년

8월 가을

의자왕이 좌장 은상을 보내서

정예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했습니다


신라 장수 유신(김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이

이를 맞아 공격하였으나

불리해지자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서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재차 싸웠는데

우리(백제) 군사가 패배했습니다


11월 겨울

우레(천둥)가 쳤고 물이 얼지 않았습니다


의자왕 11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사신이 돌아올 때

당고종이 조서를 보내서

의자왕에게 타일러서 말했습니다


<당고종>해동의 세 나라(고구려,백제,신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近代 (근대 近代 는 중세와 현대시대 사이라는

뜻으로 쓰이나 여기서는 가까운[가까울 근 近] 시대입니다)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三韓 (고구려,백제,신라) 백성들은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 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었다


신라 사신 김법민 金法敏 (김춘추[이후 태종 무열왕]의 첫째아들,

이후 문무왕)이 말하기를(김법민이 당나라에

사신 파견될 당시는 신라 진덕여왕 4년 650년)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신라)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주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 갑니다


(신라도 백제와 고구려 공격을 더했으면

더했지 계속 피해자라는 식으로 한거 같습니다

물론 당대에 신라는 고립되가며

정말 위기를 맞고있기도 했고

이 역시 외교라면 외교겠지만요,,)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간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렇게 치면 신라에서는

백제 500여년 영역이었던

한강유역은 도로 토해내지 않고

신라에서 잃어버린 땅들만 찾겠다는 것인데

사실 당나라 입장에서는 이런 정확한 인과관계보다는

말을 매우 안듣는 고구려와

믿기 어려운 백제에 비해

신라에서 여러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고

신라는 고구려 남쪽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었기에

신라와 손잡았던거 같습니다)


옛날 제환공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방을 구제하지 않으랴


(백제 의자)왕은 빼앗은 신라의 서을

모두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규 紛糾 (이해나 주장이 뒤얽혀서

말썽이 많고 시끄러움, 비슷한 말 분쟁)가 해결될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번방(고구려,백제,신라)은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경에서 피흘리고

국토 전역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실을 내어 옷감을 짜는

모든 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모두 폐한 채,

남녀가 슬퍼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랴 ?


(의자)왕이 만약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신라 사신 김법민, 이후 문무왕)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거역한다면

즉시 거란과 모든 번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케 할 것이니,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성찰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


<백제 신하들>어라하(왕) !

신라놈들이 중간에서 술수를 꾸몄습니다 !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


<의자왕>끄응,, 골치아프게 됬군,,


의자왕 12년

정월(1월) 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라봉봉>위에서 도중에 썼듯이

신라는 분명 백제의 거의 500년동안의 중심지,수도였던

한강유역을 점령했음에도 또 신라 진흥왕때에는

고구려 영토였던 함경도까지 진출하기도 했음에도

당나라에 보낸 편지에서는 피해 입은 이야기만 하며

피해자라는 식으로만 편지를 보냈고

당나라 입장에서도 외국 일이라

세세한 거 까지는 몰랐다 쳐도

(특히 옛날에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덜해서

정보의 전달이 오늘날 같지는 못했습니다)


과연 신라가 당하기만 했는거로 인식했을지는 의문이고

(백제나 고구려에서도 충분히 항변할 수 있을 이야기입니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가 저자세로 나오며

당나라의 말을 잘듣고,, 이해관계가 공통되자

신라에 노골적으로 편들어주기를 했던 거로 보입니다


의자왕의 아버지,선대왕인 무왕대부터

이어온 신라멸망 정책은 이때부터

신라의 외교와 당황제의 견제로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국정일이 원만하게 안 풀리자

사치와 궁녀들과의 향락에 빠지게 된거 같습니다,,


초반의 해동증자라 불리며

신라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키며

총명했던 의자왕이 갈수록 사치와 향락에 빠진것은

결국 원래 본모습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거 같고

이역시 무왕이 물려준 기반들이 점점

오랜 전쟁으로 고갈됬기에 아버지의 영향보다는

다시 의자왕 본 성격,본 모습화 된 것도 있겠지만

이렇게 계속 국정에서 뜻하던 일이 안되자

어려운 국정보다는 쉬운 사치와 향락에 빠져든거 같고


이렇게 즉위 초에 명군의 자질을 보이다가

폭군화 된 사례들이 의자왕 말고도 있었는데

왕의 자리임에도 인간이기에

뜻하지 않게 되는 일들도 있고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라는 말같이 큰 권력에는 많은 책임과 노력이 필요했고

이에 뜻하지 않게되는 현실정치에 실증을 느끼며

폭군화 된 왕들이 의자왕 말고도 여럿 있었습니다,,

혹은 '밑바닥이 다 드러나다' , '단물 다빠졌다' 라는 말같이

더이상 보여줄게 없거나 할 수 있는 것들이 고갈되면

역시 권력의 자리도 여러 스트레스를 받는 법일 겁니다,,


의자왕도 신라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키다가

신라의 영웅인 김유신 장군의 등장과

신라의 필사적인 대당(당나라) 외교 등으로

신라 공격이나 국정에 제동이 걸리자

점점 어려운 현실정치보다는 사치와

궁녀들과의 향락에 빠지게 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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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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