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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대의 대야성 전투, 신라장수 죽죽과 용석의 *절개>


(*절개 節槪 신념, 신의 따위를 굽히지 아니하고

굳게 지키는 꿋꿋한 태도)


그렇게 의자왕대에는

의자왕 2년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고,,


삼국의 운명을 바꾼 이 대야성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의 개인이야기인 '열전' ,죽죽 竹竹 (대나무 대나무,,)이라는

인물의 이야기인

'죽죽 열전'에 나와있습니다


그러면 대야성 전투의 이야기인

죽죽 열전 이야기입니다,,


죽죽 竹竹


죽죽 竹竹 은

대야주 大耶州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학열 學熱 은 찬간 撰干 (같은말 선간 選干 , 신라시대 지방관직)

이 되었습니다


죽죽은 선덕왕때 사지 舍知 (신라 관직의 하나로 17관등의 13번째)

가 되어서

대야성 도독 김품석 金品釋 (김품석, 이후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사위, 김춘추의 딸 김고타소와 결혼)

의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습니다


선덕왕 11년 임인(642년)

8월 가을에

백제 장군 윤충 允忠 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도독 품석이 막객 幕客 (막료, 자문,참모관) 인

사지 舍知 (신라 관직 위계의 하나, 17관등의 13번째)

검일 黔日 의 아내가 예뻐

이를 빼앗었으므로

검일이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검일이 백제군에 내응해서

그 창고(대야성 창고)를 불태웠으므로

성중 사람들이 두려워해서

굳게 막지 못할 것 같아했습니다


품석의 보좌관 아찬 서천 西川


<김부식>또는 사찬 沙湌 지지나 祗之那 라고도 한다


이 성에 올라가 (백제 장군)윤충에게 소리치기를


<서천>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원컨대 성을 들어 항복하겠습니다 !


하니


윤충이 말하기를


<윤충>만약 그렇게 하고도

공과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밝은 태양이 있으니

태양을 두고 맹세합시다 (물론 이는 거짓이었고

얼마 후 신라 김춘추도 고구려에서

도망칠때 태양에 맹세한다고 하고 도망쳐나왔는데

백제 윤충 장군에게 배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약속,동맹,맹세는 힘의 균형이나 인물됨 등에

쉽게 깨지기도 했으므로

설사 하더라도 함부로 믿어서도 안됩니다)


서천이 품석(대야성 성주 김품석) 및

여러 장수에게 권해서 대야성을 나가려 하니

죽죽이 말리며 말했습니다


<죽죽>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기 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품석이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열어

병졸을 먼저 내보내니

백제의 복병이 나타나 모두 죽였습니다


품석이 장차 나가려 하다가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죽죽이 남은 병졸을 모아

성문을 닫고 몸소 대항하니


사지 舍知 (신라 관직 위계의 하나, 17관등의 13번째)

용석 龍石 이 죽죽에게 말하기를


<용석>지금 군대의 형세가 이러한데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항복하여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하니

죽죽이 답하기를,,


<죽죽>그대의 말이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 竹竹 (대나무 대나무)

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절조를 지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말게 한 것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


라 했습니다,,


드디어 힘써 싸워서

성이 함락되자

(죽죽은) 용석과 함께 죽었습니다


(선덕여)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였고

죽죽에게는 급찬 級湌 (신라 17관등 중 9번째 등급),

용석에게는 대나마 大奈麻 (신라 17관등 중 10번째 등급)의

관등을 내려주고

처자에게 상을 내리고

서울(수도, 즉 신라 수도는 서라벌,경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라봉봉>백제 장군 윤충 장군은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태양에 맹세까지 해놓고

막상 신라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 나가자

신라 병사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는 단순히 백제가 죽죽의 말처럼

뒤통수를 잘 치고(원문은 자주 번복을 잘 하고) 믿을 수

없는 나라여서라기보다

윤충 장군 입장에서도 백제가 신라에 비해

국력이 압도적으로 높았던게 아니었던 상황이었기에

항복하겠다는 신라군을 그것도 김품석은

신라 유력자였던 김춘추의 사위였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을 것이고

게다가 대야성은 보통의 작은 성이나 마을도 아니고

신라 서쪽 변경의 최대 요충지였는데

항복을 하는게 더 이상하다 여겨질 수 있어

신라 병사들을 바로 죽이려 한거 같고,,

('백제인[이후 전라도인]들은 뒤통수를 잘친다'

라는 프레임은 백제와 원수지간이었던

신라인들이 만들어 낸거 같고

사실 신라도 더하면 더했지 외교관계에서

내가하면 외교고 너가하면 뒤통수 이런 거와

다를게 없는거 같습니다,,)


결국 부하의 반란으로 식량고갈(창고 불태움),

약속과 다른 백제군의 공격에

궁지에 몰린 대야성 성주 김품석은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살한거 같고,,

결국 신라 하급관리인 죽죽이 남은 병사들과

성문을 닫고 백제 장군 윤충의 부대와 싸우다가

역시 식량,군사등의 부족등에 성이 함락되며 죽게 된거 같고,,


이때 <삼국사기 선덕왕(선덕여왕)>에는

대야성 전투 바로 직전 기록에


'백제가 고구려와 손을 잡고

당항성(한강유역 밑 경기도 화성시쪽,중국과 해로,

바닷길로 교역할때의

중요 길목)을 빼앗아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선덕여왕이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당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렇게 기록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고구려의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

일부로 백제가 흘린 역정보일 거라는 추측도 있다 하고

즉 백제가 한강유역을 고구려와 공격한다고

말해놓고 신라 정예군들이 한강유역으로 집중되자

곧 경남 합천군쪽의 대야성을 기습공격 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 병법서 '삼십육계'에 나오는

'성동격서 聲東擊西'라는 병법으로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습격한다' 라는 의미로

요즘말로는 페이크,트릭,블러핑이라 할 수 있고

게임에서는 '뻥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제 윤충장군이 대야성 공격에 나선거를 보면

윤충장군이 기획한 것일 수도 있고

백제에는 마지막 왕인 의자왕대까지 윤충,성충,계백 등

여러 병법에 밝은 인물들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윤충 장군은 대야성 점령이라는

큰 공을 세웠는데도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더이상

나오지 안하서 어떻게 죽었는 지는 알 수 없다하나


조선상고사에서는 윤충장군이 당나라를 공격해서

월주를 점령했는데 간신의 모함으로

백제에 돌아와서 다시 월주를 뺏기고 울화로 죽었다 하고

백제 수도였던 사비,오늘날 부여지방 전설에서는

(백제 멸망 이후)672년 가림성에서

백제 왕자들과 신라군에 저항하다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윤충 장군은 김춘추의 딸을 죽였다고 할 수 있는데

신라에서 그를 내버려 두기도 그렇고

신라가 미처 제거하기 전에 자연사했을 가능성도

높다 하고


저 생각에는 백제 윤충 장군은

먼저 유능한 인물로 보이는데

의자왕 초반대에 나오는 인물이기에

무왕대의 장군이었던 거로 보이고

그러다 의자왕 재위 초반에 활약을 하다가

조선 상고사에서는 윤충장군의 성씨가

부여씨이고 의자왕에게 충언을 하다가

옥에 갇혀 사망한 백제 충신 성충의 아우라

나온다고 하는데

이후 의자왕이 성충을 내쫒을 때

동생 윤충 역시 같이 내쫒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다시 죽죽 이야기를 하면,,

죽죽은 역시 이름같이 굽히지 않는 절개의

임전무퇴 臨戰無退 정신으로 싸움에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거로 보이고 신라인들의 자살돌격 등은

황산벌의 화랑 반굴과 관창으로 유명하나

이렇게 귀산과 추항, 찬덕과 해론, 죽죽과 용석 등

여러 인물들이 있었고

이때는 신라가 한창 강성할 때였고

신라 장수들이 고구려,백제 양쪽을 상대하며

상당히 상무적 기풍들이 강했을 때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렇게 신라인들의 패기가 넘쳐나던 시절이었고,,


물론 이런 용맹한 돌격,방어 등도 나중에 신라가 멸망할 때에는

이미 민심등은 신라에 떠나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신라인들은 임전무퇴의 정신보다는

인덕이 있었던 왕건의 고려에 허망하게

천년왕조를 내주기는 했으나

이런 용맹한 절개,임전무퇴 정신은 이후에도

고려시대 대외항전,대몽항전과

조선시대 의병,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한국 한국전쟁 국군의 활약,

경제발전,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신라인들의 불굴의 정신은

신라로 하여금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하고

세계사적 유례가 드문 천년왕조의 영광을 누리게 했고

간접적으로는 민족사의 흐름속에서

거세게 밀어닥친 외래문화의 물결 속에서도

한민족 韓民族 특유의 순수선량하고도 의연한 민족성을

이어오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대야성은 경상남도 합천군인데

신라 수도 서라벌이 경상북도 경주시이기에

정말 바로 신라 수도 코앞까지 점령된거라 할 수 있고

게다가 대야성은 옛 가야지역의 대표적 지역이자

신라로서는 옛 가야지역의 대부분을 뺏긴 것이고

대야성은 백제가 대구와 경주쪽으로 진출 할 수 있는

요지중의 요지였기에 이곳이 점령된다는 것은

경주 코앞까지 백제군이 들이 닥치는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백제 말기인 의자왕때에는

백제의 오랜 수도였던 한강유역은

신라가, 신라인들이 함락시켰던 가야지방일대는

백제가 가져가는 상황이 됬고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의 영토가 다시 엇비슷해졌으며

신라 한강에서 백제 사비(충청남도 부여군)로,

백제 대야성에서 신라 서라벌(경상북도 경주시)로

백제,신라 모두 서로의 수도가

위협받는 상황이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인해 삼국통일 전쟁의 시발점이

이 대야성 전투로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하고


동시에

'지도층이란 기득권들은

자기 앞에 공포를 맛보고서야 행동에 움직이는 것으로

온갖 포장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대표적이 예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야성 전투로 김춘추의 딸인 김고타소가 죽었고

이로인해 김춘추(태종 무열왕)와

김춘추의 아들이며 고타소의 오빠인

김법민(문무왕)은 20년동안 분노하게 됬고

그 전까지는 백제가 그냥 위협세력으로 인식되다가

멸망시켜야 될 나라로 인식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기에

위 말이 나온거 같고

비슷한 예로는 세계 1차대전의 시작이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해서

시작된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죽죽과 함께싸운 용석도 처음에는

항복해서 후일을 도모하자 했으나

결국 죽죽의 거절에 같이 싸우다 전사하게 됬고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끝까지 싸우다 죽은

죽죽과 용석의 절개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관산성 전투,가잠성 전투로 치열했던

백제,신라 두 양국의 전투는

그렇게 대야성 전투로 더이상 양국이

같은 땅에 양립했음을 없음을 인식하고

삼국통일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투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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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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