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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31대왕,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 義慈王

재위기간 19년 641~660년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습니다


(의자왕의 본 이름은 의자 즉 부여의자인데

마지막 왕이기에 시호가 없이

그냥 이름이 시호가 됬습니다

비슷한 예로는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시호 역시

없이 이름인 보장, 고보장에서 나왔고

고려 말기 왕인 우왕,창왕도 같은 사례입니다)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가 되었습니다


(의자왕, 부여의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 海東曾子 라고 불렸습니다


(해동 海東 은 바다동쪽으로

중국에서 한국을 가리킬때 사용한 말,,

즉 한국을 의미 [중화사상]

증자 曾子 는 중국 사상가 공자님의 제자,

효자로 유명한 인물)


무왕이 붕어,사망하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당나라 태종 사부 랑중 정문표를 보내서

의자왕을 주국대방국왕백제왕으로 책봉했습니다


(책명위주국대방군왕백제왕

冊命爲柱國帶方郡王百濟王)


(중국에서는 이렇게 한국 왕들에게

옛 중국 한나라에서 한국 조선[고조선]땅에

설치한 식민기관인 한사군[낙랑군,대방군 등]

을 한국인들이 자력으로 축출,쫒아냈기에

더이상 한국을 직접지배를 하지 못하게 됬으나

이후에도 이렇게 한국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왕들에게

옛 한사군 이름인 낙랑이나 대방등의 작호를 내려서

심리적 지배를 하려 했습니다

현재도 중국은 가까운 나라고 착한 중국인도 있지만

역시 인구도 많고 옛날부터 조심해야 할 나라입니다

한국은 예로부터 중국에 의존하다 당했고

일본을 무시하다가 당한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8월 가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감사의 글을 올리고

겸하여 방물 方物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의자왕 2년

정월(1월) 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2월

의자왕이 주, 군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해서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 주었습니다


<백제 백성 1>건길지(왕)께서는

과연 해동증자 海東曾子 라고 할만하신 분이야 !


<백제 백성 2>초심을 잃지 않으셔야 할텐데,,


7월 가을

의자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 獼猴 (미후 獼猴 는 검색해보니 원숭이라는 뜻인데

성 이름이 원숭이 일까요 ? 혹은 하미후 下獼猴 라고도 합니다

별개로 한국에서는 13000여년 전까지는 원숭이가 자생했다하고

일본에서는 원숭이가 살아남았는데

일본은 원숭이의 천적인 야생호랑이가 없고

한국에 비해 따뜻한데(+많은 온천)

한국은 그러지 않았고

대신 삼국유사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의 목을 베자 '원숭이들이 떼 지어 울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고 하고 대신 삼국인들도

외국과의 잦은 교역등으로 외국 동물들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고 합니다[백제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원숭이와 코끼리와 악어])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下獼猴等四十餘城


8월

장군 윤충을 보내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습니다


(신라)성주 품석(김품석,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결혼, 김춘추의 사위)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서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김품석)의 목을 베어

서울(서울 = 수도, 백제의 서울은 사비)로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대야성)을 지키게 했습니다


의자왕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석을 주었습니다


<의자왕>아아 !

아버지 무왕대의 노력들이

이제서야 결실을 맺었구나 !

대야성은 신라 서쪽 변경의 최대 요충지인데

이로서 서라벌(신라 수도 경주)는 코앞에 가까워졌다

모두 경배를 들라 !


<백제 귀족들>,,, (음,, 확실히 선대왕인

무왕대에 있었던 개혁들이 하나 둘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군,,

현 어라하[왕]께서도 이를 잘 이어가셔야 할텐데,,)


<의자왕>아따 분위기가 왜이런가 모르겠네

술잔을 들랑께 ?


<백제 귀족들>예 어라하 !


<의자왕>윤충 장군 아주 잘해주었소 !

여봐라 윤충 장군의 공로를 표창해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주어라 !


<윤충>어라하(왕)의 덕으로

소인 대승 大勝 (크게 이김)을 하고 개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석은

신라의 유력한 명문가인 김춘추의 사위라고 하고

김춘추의 딸 김고타소 역시 이곳에서 따라 죽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대백제국에 원한의 칼을 갈고있을 터,

신라는 결코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옵니다


<의자왕>윤충 장군이 이렇게 든든히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소 ?

오늘은 장군을 위한 날이니 잔을 드시오 !


<윤충>야(예) 어라하 !


,,, 한편 신라에서는,,


<신라 장군들>춘추공 !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되고

춘추공의 사위 김품석과 따님

고타소 아가씨 (랑 娘 여자,아가씨)께서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김춘추>아아 !


<신라 장군들>춘추공 !


삼국사기 선덕여왕 기록에는


'김춘추는 이 소식(대야성 함락,딸 고타소의 죽음)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


라고 하고


그(김춘추)는 얼마 후에,,


<김춘추>아아 !

대장부 大丈夫 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


너희 백제 원수들과

같은 하늘아래 살 수가 없다

내 반드시 부여씨(백제 왕족 성씨)

너희의 구족을 멸하리라 !


그렇게 김춘추는 곧 선덕여왕에게 나아가서

직접 고구려에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해서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고

이로인해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만나서 회담을 하나

결렬되고 이후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아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계기가 되게 되었고

이에 대야성 함락과 김춘추의 딸 고타소의 죽음은

삼국통일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야성은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경상북도 경주와 매우 가깝기에

신라에서는 국가적인 큰 위기였고

더불어 대야성 성주 김품석과 같이

대야성 전투에서 죽은

김품석의 부인 김고타소가

당대 신라의 권력자이자

훗날 신라국왕이 되고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김춘추, 태종무열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김춘추의 분노는

배로 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야성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다음 이야기에 하겠습니다


<라봉봉>의외로 무왕대에는 백제의 영토가

크게 늘어나지는 못했고

그의 아들 의자왕때에 백제 영토가 급격히 팽창하는데

능력치 면에서는 무왕이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보다

더 높았다고 생각되는거 같고

그럼에도 의자왕이 영토를 급격히 늘린 배경에는

역시 무왕이 재위기간 동안 백제의 내실을

잘 다져놓았기에 그의 아들 의자왕대에

영토가 급격히 팽창했고 대부분 영토를

급격히 늘린 정복군주들(고구려 광개토대왕,백제 근초고왕,

신라 진흥왕) 역시 개인의 유능함 이외에도

그들의 아버지나 조상들을 보면

내실을 잘 다져놓은 인물들이 많기에

단순히 개인의 유능함만으로 봐서도 안된다는

생각을 한거 같고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유능한 독재자라는 평이 있는

한국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의외로 박정희 정부때에는 경제성장률이 낮았는데

다음 세대인 전두환 정부때 급격히 경제가 성장해서

'3저호황, 물가안정, 서민생활,문화 발달' 이라고

전두환 정부의 업적 등으로 이야기 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박정희 정부때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 공업 육성' 등 굵직한 기초산업등이 육성되며

대규모의 자금이 사용되던 시기였고

다음 세대인 전두환 정부때

그 열매가 열린 것이라 생각되고

물론 전두환 정부도 기존 박정희 정부의 선례등을

따르려 했던거로 보이나

하여튼 역사에서 갑자기 팽창하며

성장하는 사례들을 보면

당대의 인물들만을 본다기보다는

당대의 인물의 부모나 조상,선대 인물들을

보는 거도 중요한거 같고


백제 의자왕의 재위초반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40여 성등을 함락시키고

곧 신라 서부 최대 요충지였던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된 것은

의자왕이 단순히 '해동증자'라는 수식어같이

유능하기만 했다기 보다

아버지 무왕이 물려준 기반등에

신라 선덕여왕의 불안정한 정치로

대야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던거 같고

실제 대야성 전투에는 신라 대야성 내부에도

내분이 있었으나 내분 이외에도

그런 국력차도 있었기에

신라가 위기를 맞은거로 보이고

대야성 전투 이야기는 바로 다음 이야기때 하겠습니다,,


번외로 이로 인해 백제는

멸망 당시가 오히려 중흥기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멸망 전 무왕이 백제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는 했으나

이미 오랫동안 태평성대였던 신라와의 격차를 더 좁히기 전에

사망한 거로 보이고

김춘추가 대야성 함락, 딸 고타소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


라고 말한거 같이

그런 발언을 할 정도로

신라는 기초체력은 좋았던 나라였고

(만약 백제가 정말 중흥기였고

신라가 백제에 큰 위협,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지언정

정말 피부로 느낄만큼 국가적 위기였다면

이런 말 할 인물도 없이

후삼국 시대때 신라 말기처럼

신라인들도 조용히 가만히 있었을 것입니다,,

이당시 신라인들은 김춘추의 말 처럼

북쪽의 고구려,서쪽의 백제를 모두 막아내야 했던 시기라

상무정신이 극도로 팽배했고 신라 장수들도

몸을 바쳐가며 자살돌격을 하던 시기였고

패기가 넘쳐났던 시기였습니다,,

좋다고 보기만도 어렵겠지만 그만큼 국력이 강했고

신라인들의 국가적 자신감이 팽배했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의자왕이 무왕같이 혹은 그 이상의 정치를 했다면

삼국시대가 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이후 궁녀들과 음란과 향락에 빠졌다고 하고,,

바른말 하는 사람들을 죽이다 결국 백제가 멸망하게 됬고

당대 백제가 중흥기였다고 보기에는

신라가 아무리 혼란스러웠던 선덕여왕대라 하나

기초체력이 너무 튼튼했기에 무리가 있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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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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