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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37년

3월 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3월

무왕이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사비하 泗沘河 북쪽 포구 浦口 (배가 드나드는

강의 어귀) 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서있고

그 사이에 진기한 화초가 있어서

마치 그림 같았습니다


무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하여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자

수행한 자들도 여러번 춤을 추었습니다


<무왕>옛날 마(감자,고구마와 비슷한 식물)를 팔던 서동시절이

생각나는군

서동요는 내가 지은노래인거 알고있제 ?


<백제 신하들>야(예) 어라하 ~

오랫만에 한번 노래한곡 해주시랑께요 ~


<무왕>허허 몹시 즐겁도다

이걸로 내가 결혼했당께 ! ㅋ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 ♩♪♬


善化公主主隠,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


<백제 신하들>정말 영험이 있는 노래이옵니다 !

흥겨워서 춤이 덩실덩실 절로 나오는군요 ! ♩♪♬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대왕포 大王浦 라고 불렀습니다


무왕 그의 인물됨은

보통의 인물은 아니었다고 생각되고

가히 모처럼만에 혼란의 백제를

안정기로 이끌었던 큰 인물,대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잦은 전쟁과 무왕대부터 백제는

외교적 신뢰를 잃었기에

무왕 바로 다음왕 의자왕때 백제가 멸망했지만요,,


5월 여름

무왕이 장군 우소에게 명령해서

갑병 甲士 (갑사 甲士 [갑병] 갑옷을 갖춘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백제 장군 우소가 옥문곡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안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했습니다

그때 신라장군 알천이 군사를 거느리고

몰래 기습하여 왔습니다


우소가 큰 돌 위에 올라서서

활을 쏘면서 대항하여 싸우다가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그들에게 사로잡혔습니다


6월

가뭄이 들었습니다


8월 가을

무왕이 망해루에서 군신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무왕 38년

2월 봄

서울(서울 = 수도, 백제 서울은 사비)에서

지진이 났습니다


3월

다시 지진이 났습니다


12월 겨울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철갑조부 鐵甲雕斧 (쇠로 된 갑옷과

무늬를 조각한 도끼) 를 헌납했습니다


당태종이 이를 위로하고

금포 錦袍 (비단으로 만든 도포, 비단 두루마기)와

채백 彩帛 (채백 = 채단 彩段 채단 = 온갖 비단을

통틀어 이르는 말)

3천 단(1단은 약 6m 같고 즉 18000m, 18km 같습니다,,)

을 내려주었습니다 


<당태종>대체적으로 고구려와 백제는 말을

잘 안듣긴 하지만 현재는 고구려 견제에 집중해야되고

백제 왕 여장(= 부여장, 무왕의 이름)이 인물이긴 하지


무왕 39년

3월 봄

무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습니다


<라봉봉>그렇게 무왕대의 잔치,놀이 기록은

무왕대의 백제가 마지막 전성기를 지나고 있음과

무왕대의 태평성대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으나


문제는 이런 모습들은 무왕의 맏아들,태자

부여의자 즉 이후 의자왕이 보았을 것이고

의자왕때에도 되풀이 되는데

문제는 의자왕은 무왕같이

평민시절을 보내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물이 아니고

무왕의 맏아들로서 궁중생활을 한 태자로서

왕이 된 인물이었고

무왕같은 비범한 카리스마,권위 같은거는 적었던 인물같고,,

또 무왕대와 달리 시대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는데에도

무왕이 잔치하고 궁녀들과 노는 모습들을 보고

('의자왕과 삼천궁녀'로 유명하나 실제 삼천 궁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많은 궁녀라는 문학적 수사라 합니다,,)

그것을 되풀이하며 음란과 향락에 빠진거 같습니다,,


물론 무왕이라고 좋은거만도 아니고

무왕은 뭔가 한국 박정희 대통령이 생각나는데

박정희 대통령도 집권 기간동안

여러 스캔들 논란이 있었고

물론 백제 무왕과 박정희 대통령은 능력 자체는

이미 당대에 인정받으면서 이런 논란이 있었다면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같은 카리스마,능력은 부족했고

궁녀와 노는 등 모습 같은 안좋은쪽 위주로 가다가

망국의 왕이 됬다고 할 수 있고

물론 무왕이 능력이 있었다 해도

잘한 거는 아니라서

또 무왕은 선화공주와 결혼해서 '서동요'라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남긴 무왕이기에

더 아닌거 같기도 하고


(혹은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 사망 이후 망가졌다는 이야기같이

무왕도 선화공주 사망으로 망가져서

궁녀들과 놀았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저도 스캔들이나

가십거리가 그렇게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군사정권 시절의 부조리했던 이야기들로

역사책에서 나오고 본 이야기들입니다,,] , 또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익산시 팔봉동 신왕리에서

나온 발굴품들을 2016년에 대한민국 학자들이 재조사해보니

출토된 유골이 20~40대 사이의 여성이고

부장품 중에 신라제 토기가 있어서

매장자가 신라에서 백제로 넘어온 왕족급 여성,

즉 선화공주가 아니냐는 추정이 나왔고

여성 유골이 20~40대인거를 보면

무왕 재위기간이 42년이기에 만약 유골 인물이

선화공주라면 선화공주는 무왕보다 먼저 사망했을 것입니다,,)


만약 무왕이 이런 유희나 궁녀들과

노는 것 보다 국사(국정, 나랏일)에 더 집중했더라면

진짜 백제는 무왕대부터

국력을 튼튼히 쌓고

재기해서

신라를 멸망시키고

백제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됬을지도

또 모르는 일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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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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