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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29년

2월 봄

군사를 보내서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를 3차 가잠성 전투라 하는데


1차 가잠성 전투는 무왕 12년 백제의 승리,백제의 신라 가잠성 점령

2차 가잠성 전투는 무왕 19년 신라의 승리,신라의 가잠성 탈환

3차 가잠성 전투는 무왕 29년 신라의 방어 성공


이렇게 이어졌고

무왕대에만 가잠성 전투가 3번 일어났을 정도로

백제와 신라가 격렬하게 맞서던 곳으로

가잠성은 신라의 주요 길목,요충지였던거 같습니다


3차 가잠성 전투의 작년인 무왕 28년에는

당나라 당태종이 백제,신라에게 그만싸우라 했고

이에 백제 무왕이 알겠다고 했으나


'비록 겉으로는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이전처럼 서로(백제와 신라는)

원수지간이었다'


라는 기록과 같이

바로 다음해 가잠성을 공격했고

이로인해 신라는 또다시 당나라에 전라도 사투리로는

'일름보' 가 되서 당나라에 이 사실을 알렸을 것이고

당나라는 당장에는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고구려에 집중해야 되서 백제,신라에 대해

별다른 생각할 여유는 없었던거 같으나

이로 인해 백제도 고구려같이

(당나라)말안듣는 골치아픈 그런 인식이 생겼을거 같고

이로 인해 무왕은 국제적 신뢰도를 잃게 된거 같습니다


무왕 30년

9월 가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무왕 31년

2월 봄

사비의 궁전을 중수 重修 (낡은 것을 고쳐 지음,재건)했습니다

무왕이 웅진성으로 갔습니다

(수도 사비는 공사중이어서

옛 수도 웅진으로 간거 같습니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서

사비(백제 수도)의 궁전을 중수하는 일을 중지했습니다


7월 가을

무왕이 웅진에서 돌아왔습니다


무왕 32년

9월 가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무왕 33년

정월(1월) 봄

맏아들 의자 義慈 (이후 무왕 다음왕이자 백제 마지막왕인

백제 31대왕 의자왕)를 태자로 책봉했습니다


<무왕>부여의자 扶餘義慈 너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현재 해동증자 海東曾子 (바다 동쪽[중국 동쪽, 한국]의 증자, 증자는

중국 사상가 공자의 제자로 학문과

도덕이 뛰어났고 효자였음)

라고 불리고 있으며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어

나의 뒤를 이을 수 있겠다


내가 하늘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신라를 멸하지 못한다면

의자 너가 반드시 신라를 멸망시켜

옛 선조들의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 !


<부여의자>대백제국 大百濟國 태자 부여의자는

삼가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


2월

마천성 馬川城 을 고쳐 쌓았습니다


7월 가을

군사를 동원해서 신라를 공격했으나

불리했습니다


(같은달)왕이 생초 벌판에서 사냥했습니다


12월 겨울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무왕 34년

8월 가을

무왕은 장수를 보내서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해서

13일 만에 함락시켰습니다


<무왕>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고 들었다,

신라에서는 여자가 왕이 되었다는데

더이상 신라도 옛날만 못하게 됬구나 하하하


대백제의 병사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신라 멸망에 최선을 다하라 !


<백제 군사들>(오매,, 진짜 신라가 망하는거 아니여 ?)

만세 ! 만세 !


굳이 '13일 만에'라는 기록이 있는거로 보아서는,,

신라도 백제 무왕의 공격을

싸움에 있어서는 물러섬이 없다는

임전무퇴 臨戰無退 의 정신으로

13일동안 처절하게 막아냈을 거 같고


무왕도 집요하게 백제의 군사들을 동원해

신라성들을 공격해내서

철옹성같이 단단하던 신라의 성들과

방어선들은 점차 뚫리기 시작한거 같고

그의 아들 부여의자, 의자왕대에 이르러서는

대규모로 신라의 성들이 백제에 점령되는 상황까지

가게 된거 같고 당대 신라인들도 점점 백제의 맹렬한 기세에

위기감을 크게 느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무왕은 재위년도가 600년 이라서

재위기간,년표 보기가 쉬운데,,

632년, 무왕 33년(재위 첫해 포함 1 더하면 됩니다,,)은 신라에서는

골품제라는 제도 때문에 서로 다른 신분과는 자녀를 낳지 않고

맨 윗계급인 왕위 계승 계급인 성골 계급은

성골 신분 유지를 위해 성골끼리만 결혼해서

결국 근친혼으로 이어졌고(여러 설들도 있으나 일반적인 설)

그러다 진평왕대에 이르러 남성 성골의 대가 끊기게 됬고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진평왕의 딸 김덕만,

여성 성골인 선덕여왕이 즉위

하게 됬습니다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성 왕인

여왕이라 할 수 있기에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신라사회의 개방성으로

해석될 수 도 있겠으나

실제로는 신라왕실의 골품제,신분제로 인한 폐쇄성 때문에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서

결국 딸 김덕만,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고

선덕여왕도 그냥 성별을 떠나서 평균정도는 한 왕이었으나

문제는 백제에는 무왕이라는 인물이 있어서

무왕대부터 신라를 멸망시키려 끊임없에 신라에

대공세를 펼치고 있었고

이후 선덕여왕은 절명의 위기에서도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하며 무리한 숭불정책을 계속하는 등

현실도피적 모습을 보였고


이때부터 신라인들은 백제 무왕의 공격에

성들이 점차 무너져 감과 신라 내부의 혼란,내우외환 등에

위기의식을 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별 차별,우월주의자도 아니기에

선덕여왕을 특별히 높거나 낮게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냥 인물됨은 사람 자체로는

평범한 인물이었고

문제는 신라에 칼을 갈던 백제 왕이 당대에

비범한 인물이었던 무왕이었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곧 위기가 엄습하게 된 것이고

선덕여왕때는 여러 불안한 일들이 많았기에

선덕여왕 당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특히나 더 비판받았던거 같고

문제는 현대적 시각으로 여성이라는거를 배제하고 봐도

좋게 보기에는 어려운거 같고


그렇게 신라 성들이 계속 무너짐과 동시에

무왕 당대 백제사회에서는 자신감이,

당대 신라사회에서는 불안감이 엄습해왔고

문제는 신라는 아무리 정치가 혼란스러워도

이미 선대왕대부터 쌓아온 국력,기초체력이 컸기에

신라 왕들이 국고를 탕진해가며 하락세를 보였음에도

결국 금방 여러 인물(김유신,김춘추)들이 나오게 됬고


백제는 무왕이라는 비범한 인물이 나왔고

적극적으로 신라에 대공세가 성공했음에도

오랫동안 선대로부터 쌓여온 국력이 적었기 때문에,,

만약 백제에서 무왕같은 비범한 왕들이 계속 나오고

신라에서 평범한 왕들이 계속 나왔다면

또 상황은 달라졌을 수 도 있겠으나

그렇게 역사가 흘러가지는 않았고,,


결국 무왕대의 백제는 마지막 전성기라

할 수 있었고 당대의 백제인들은

오랜 신라에 대한 패배로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다시 되찾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가 크게 생각하지 않다가

삼국사기를 읽어보며 비범하다고 느꼈던 왕이

여태까지 두명 있었는데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 大武神王 과

백제 30대왕 무왕 武王 으로

이름에 호반,군사 무 武 자가 붙으면 대게

군사와 관련있는 왕이었던거 같고

대무신왕과 무왕은 인물됨도 비범했고

무엇보다 당대왕으로서 카리스마,귄위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거 같고

이런 권위주의적 인물은 나라를 외환으로 부터 구하거나

기반 산업을 구축하기도 하고

무왕 역시 '서동요' 로 너무 유명해서 선화공주와의 사랑이야기로만

기억했던거 같은데 당대 백제의 왕으로서

'신라멸망'의 기치를 내걸고 전력을 다해 신라를 공격하고

백제인들을 결집시킨거 같습니다,,

물론 옛날 왕들이 그랬듯이 내부의 불만을

전쟁,밖으로 돌리기 위한 것도 있다고 생각되나


고구려 대무신왕과 백제 무왕은 기록을 읽어봐도

카리스마,귄위가 느껴지고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백제에서도 훗날 전라도 중심으로 뭉치게 된게

전라북도 익산시 출생의 무왕의 영향이 컸던거 같고

고구려 마지막 불꽃이 연개소문이라면

백제 마지막 불꽃은 물론 의자왕도 재위기간동안

신라를 공격했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신라군에 맞선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도 있었으나

그나마 나라가 안정적으로 운영됬던 거까지 하면

백제의 마지막 불꽃은 무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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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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