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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17년

10월 겨울

달솔 백기 苩奇 에게 명령해서

군사 8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11월

서울(백제 수도, 사비)에 지진이 났습니다


무왕 19년

신라 장군 변품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해서

성을 회복했는데

해론이 여기에서 전사했습니다


해론과 가잠성 전투 이야기는

전 이야기에서 한 바가 있고


가잠성 전투는 총 3차례의

공방전이 있었는데


1차 전투 (무왕 12년)

백제의 신라 가잠성 공격,신라 가잠성 성주

찬덕의 죽음과 백제군의 가잠성 점령


2차 전투 (무왕 19년)

찬덕의 아들 해론의 가잠성 공격,

신라군의 가잠성 탈환(되찾음), 해론의 죽음


3차 전투 (무왕 29년)

백제의 가잠성 공격,신라의 방어


이렇게 총 3차례의 공방전으로 나뉘게 됬고

1차,2차 공방전이 삼국사기 신라장수 해론의 이야기

'삼국사기 해론 열전'에 자세히 기록되 있고

치열했던 공방전의 기록을 보여주며

저번 이야기때 썼습니다



가잠성은 현재 위치가 불명하고

경기도 안성시 죽산명 죽주산성설,

충청북도 괴산군 군자산성 설이 있는데


무왕대 기록에 가잠성 공방전이

3번이나 등장하는 거로 보아서

신라에게는 동쪽 방어선의

주요 지역이거나

주요 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그런

요충지 要衝地 (지세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

였던거 같습니다


무왕 22년

10월 겨울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과하마 果下馬 (사람을 태우고

과실나무를 지날 수 있다는 뜻으로 키가 작은 말로

한국 전통,토종말들은 이렇게 작은 과하마였다고도 합니다

즉 조랑말이라고 할 수있고

큰 대형말들은 보통 북방민족들이 키웠다고 합니다)

를 바쳤다고 합니다


<무왕>중국을 통일한 천하의 수나라가

113만 대군으로도 고구려 공격에 실패하고

무너졌다지,,

그러나 현재 새로 들어선 당나라 역시

수의 체제와 영토들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보통 나라는 아닐 것이다

새로 들어선 당과의 우호 관계를 맺도록 하라 !


무왕 24년 가을

무왕은 군사를 보내서

신라의 늑노현을 침공했습니다


늑노현은 현재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으로 비정하고 있고

만약 가잠성이 충청북도 괴산군 군자산성이라면

3차 가잠성 전투의 전초전이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백제 무왕은 끊임없이

이번에는 한강유역이 아닌 한강과

신라 수도인 경상도 경주사이의 길을 끊어버리거나

하며 신라를 공격했던거 같고

결국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대에도

그런 백제의 정책은 이어져서

신라를 위기로 빠트리게 됩니다


전체적인 국력등은 이미

신라가 압도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나

무왕은 역시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 답게

또 기록에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삼국유사)'거나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했다(삼국사기)'는거 같이

영리 혹은 영악한 모습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거 같고


이미 신라 정예군이 배치된 한강유역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한강유역과 신라 본토인 경상도 일대 사잇길,

즉 비유를 하면 허리를 끊어버리려는 방책을 낸거 같고

그렇게 가잠성 전투같이 격렬했던 전투가 벌여진거 같습니다


무왕 25년

정월(1월)

당나라에 대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당고조가 그(무왕)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서 무왕을 대방군공백제왕으로 책봉했습니다


중국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왕들을

낙랑군공,대방군공 이런식으로 책봉했는데

이는 중국 한나라가 한국 조선(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영역에 세운 식민기관인

한사군인 낙랑군(+대방군),임둔군,진번군,현도군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고

한사군 중 강한 군이었던 낙랑군은

이후 진번군 자리에 낙랑군 일부를 나누어서

대방군을 설치했다 하고

이후 한사군은 고구려에 축출,

고구려와 백제에 흡수됬는데

이 세력들이 멸망한 이후에도

중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지배의식을 높이려

이런 이름의 봉작들을 고구려,백제,신라 한국 왕들에게

책봉했던거 같습니다


7월 가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10월 겨울

무왕은 신라의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6개 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습니다


<라봉봉>그렇게 무왕은 재위기간 내내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했고

이렇게 신라의 성들을 함락시키며

신흥강국 신라에 여러 큰 패배를 당하며 위축되었던

백제인들에게는 자신감을 되찾게했고

신라인들의 위기의식을 높여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중국 통일제국 수나라 멸망 이후

새로 등장한 중국 통일제국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확립했고 당나라는 이후 신라와 손잡게 되기는 하나

건국초기의 당나라는 외부로 눈을 돌리기보다는

내정등에 신경을 쓸 때였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고구려,백제,신라 한국 삼국과 큰 마찰은

피하려 한거 같고 당고조의 아들 당태종대 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전면전을 실행하게 됩니다,,


지금은 백제 이야기를 하는 중이고

고구려 이야기는 이전에 쓴 적이 있지만

수나라 113만 대군을 물리치고

거대 통일제국 수나라 멸망의 정말 큰 주요 요인이었던

고구려는 당대 백제인들의 시각에서도

정말 대단하게 여겨졌을거 같고


근본적으로도 백제 왕실 역시

고구려와 뿌리가 같았다는 것과

또 고구려라는 나라가 북방에서 버티고 있어서

육로로는 중국이 공격할 수 없다는 사실 등을

알고 있었고


고구려가 '민족의 방파제'였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라는 생각이듭니다

개인적으로 고구려를 너무 좋아하고

백제 역시 알면 알수록

보통의 나라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며

고구려,백제가 역시 멋과 아름다움은 최고라 생각하나

질서정연하고 조용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고

신라 역시 전통적이고 오늘날 한국의 원형이 되기는 했으나,,

신라사는 되게 보수,유교적이기도 하고

고구려,백제사에 비해 재미가 떨어지는거는 사실 같습니다,,


다시 무왕 이야기로 돌아가서,,

당대 무왕 역시 북방의 고구려는

수,당나라 등 중국 통일왕조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남쪽인 백제와 신라에는 신경을 쓰기 어려웠던게

당대 현실이었고


이에 적극적으로 중국과 고구려에 양면외교를 펼치며

신라에 대한 대공세를 시작하고 있었으나

무왕이 수나라나 당나라에 대해 관과한 점은

중국이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올 수 있었다는 점 같고

중국 당나라는 오늘날 미국에 비견될 정도로

매우 실리적인 기풍의 북방민족,선비족이 세운 나라였고

역시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던 수나라보다

더 철저하게 한국공격 준비를 했고

여러 공성장비와 바닷길로 수군을 보냈고


당나라는 무왕대인 아직까지는 그래도 외부보다는

막 건국이 됬기에 내부 정리를 하고 있었던 거로 보이며

고구려,백제,신라와 고루고루 친선관계를 유지했던거로 보입니다


이에 신라에서도 그동안 급격히 일어나고 영토를 확장하다가

모처럼만의 백제의 반격을 받으며

여러 위기의식들이 높아진거 같습니다


특히 신라는 당연히 당대 고구려 역시 신라를

좋게 보기 어려웠을 거고

백제는 관산성 전투로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에게 목이 잘린 이후

신라에대한 분노감이 상당했을 거고

동남쪽에서는 사실상 백제라 할 수 있는

왜가 있었는데 아무리

왜가 삼국에 비해 기술,문화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더라도

인구력등은 기본적으로 높았고

수도 경주와 가깝기도 하고

해안가 약탈 등 무시할 수 없는 신라 건국 초부터의

전통적인 신라 견제세력이었고

점차 신라 내부에서도 급격히 확장은 해놨는데

이후 백제가 적극적으로 반격해오고 성들을 함락시키니

고립감과 위기감이 증폭되던 시기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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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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