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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저번 이야기에서

무왕은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해서 가잠성 성주 찬덕을 죽이고

그 성을 함락시켰다고 했는데


백제에 신라에 대한 모처럼만에

승리를 가져다주고

신라에서는 백제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켰던

이 가잠성 전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의 개인 이야기인 열전,

해론 열전, 해론의 개인 이야기에

자세히 써져있습니다


해론은 가잠성 성주 찬덕의 아들로서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인


임전무퇴 臨戰無退,

싸움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음


이라는 뜻의 신라의 임전무퇴 정신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보통 신라의 임전무퇴 정신은

역시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때

백제 멸망 직전에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위해

물러서지 않고 백제 마지막 충신

계백 장군의 5000 백제 결사대에

싸우다 죽은 신라 화랑 반굴과 관창이 유명하지만


이미 백제 무왕대에도

귀산과 추항이나

해론 등 많고


이 임전무퇴 정신은

이후 고려의 세계 초강대국 몽골에 맞선

대몽항쟁과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必生則死 ,

죽고자 하면 살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것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정신으로 이어지고


여러 의병,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군부독재에 맞섰던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정신으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는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으로


당대 신라는 지증왕 ~ 법흥왕대는

큰 전쟁이 없었고 오랜 평화기동안

내실을 굳건히 다져왔었는데

이후부터 신라는 정복군주인 진흥왕대부터

쌓아왔던 힘을 뿜어내며 영토를 급격히 늘리게되고

삼국은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고

신라는 이후부터 수십년동안

백제,고구려와 양면전쟁을 치르며

극도로 상무적인 기풍이 생겨나며

신라에는 이런 임전무퇴 정신을 가진 인물,화랑들이

계속 나오게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대표적인 인물로

신라 삼한일통의 주역 김유신 장군과

태종무열왕 김춘추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김유신 장군과 달리

전쟁보다는 외교쪽이었으나

역시 왕족의 신분임에도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당대 외국을 직접 넘나들며

활발하게 외교를 펼치며 신라를 구원해냈습니다)


이 두인물과 당대 중국 거대 통일왕조의 등장으로

급격히 돌아가는 삼국의 정세속에서

한국 삼국인들은 하나의 한국을 꿈꾸게 된거 같고

그러며 신라의 주도로 삼국시대는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삼국 특히

당대 신흥강국이었던 신라는 백제,고구려라는

전통적 강국들과 양면 대결을 소화해내며

나라 안에서는 온 나라 청년들이 전쟁에 동원되다 싶이

했다고 할 정도로 극도로 상무적인 기풍이 생겨났던 시대였고


당대 신라의 정예병력은

본지역이었던 경상도 일대보다는

백제와 고구려의 아래 위로 양면공격을 받을 수 있었던

한강유역대에 결집해 있었다고 하고


이때 백제 무왕은 기존 선대 백제왕들의

거점지이자 거의 500년간 전통적인 백제의

수도였단 한강유역 일대를 수복하는 것에서

방향을 바꿔서 신라 본토인 경상도 유역을

공격하는 거로 신라에 대공세를 시작하게 시작했고

요즘말로 '빈집털이'나 '옆구리,뒤통수 치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무왕의 계책은 성공했고

신라인들은 한강지역의 정예군을 그렇다고

뺄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그렇다고 결사적으로 백제군을 막아내지 않으면

당장 신라 본거지이자 수도인

경주가 위협받는 상황이기에


정예군이 아닌 예비군,후방군 들로

백제 정예군들에 결사적으로 싸웠고

역시 오랫동안 내실을 다져온

당대 신흥 강대국 답게

신라인들은 결국 최종적으로는 방어에 성공했으나


(축구에서도 강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의

예비 선수들인

2군,3군 선수들이 왠만한 나라들 1군들보다 강하다 하고

그만큼 기초체력의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왕대부터의 신라 대공세는

신라인들에게 큰 경각심과 위기심을

생기게 했고

백제인들에게는 항상 신라에게 크게 패배만 하다가

모처럼만의 승리로 또 전통적 강국이었음과

옛 영광들을 상기시키며 

백제인들에게 자신감을 생기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삼국통일 후

백제에 대한 증오감이 커진

신라인들이 백제인들을 철저하게 짓밟으며

많은 유산들을 약탈,파괴한거 같고


결국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도

완전한 한민족 韓民族 의 통합이었다기 보다

이후에 통일신라 '김헌창의 난' 때

옛 백제지역 영역 대부분이

김헌창이 세운 장안국에 붙어버렸다는 것과

통일신라 말기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자

견훤의 후백제 건국 등으로 이어지게 된거 같습니다


그렇게 다시 삼국시대 무왕대의

가잠성 전투 이야기로 돌아가서,,


백제 무왕대의

가잠성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인

해론이라는 인물의 이야기,

'삼국사기 해론 열전'입니다


(아까 글을 읽다가 생각해봤는데

일본은 백제의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가잠성 전투는

2차 세계대전때의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이 생각나는거 같고

역시 역량적으로 일본은

미국을 결코 이길 수가 없었으나

미국 사회를 경악하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으로


당대 신라사회에서도 평소 만만했던 백제가

갑자기 기존의 백제의 국가적 수복영역이었던

한강유역이 아닌 옆을 공격해오니

신라 사회를 경악하게 했던 사건이라 할 수 있고

신라인들이 백제 멸망을 결심하는데

큰 영향을 준 사건이라 할 수 있는거 같고


진주만 공습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고

좋은거는 아니지만,,

의외로 당대 일본의 영토가

요서와 왜에 진출하고 동남아시아와

교류했던 백제인들의 영역과 비슷했고

평행이론 같은게 있습니다,,


일본은 백제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백제인들의 정서와 현대 일본인들의

정서도 비슷한거 같고 

백제인들의 부정적인 거 역시 닮아있다고

할 수 있는거 같습니다,,)


<백제 무왕대의 가잠성 전투, 신라장수 찬덕과 해론>


해론은

모량 牟梁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찬덕(가잠성 성주)은

용감한 뜻과 뛰어난 절개를 가져서

당시에 이름이 높았습니다


건복 27년 (신라 26대왕 진평왕의 연호) 을축년

(진평왕 32년, 610년)


진평대왕(삼국사기 해론 열전에 진평왕 王 이 아닌

진평대왕 大王 이라 기록되 있습니다)이

그를 가잠성 현령으로 선발했습니다


다음해 신미년(611년) 겨울 10월에

백제(백제 30대왕 무왕 대)에서

대군을 출동시켜서


가잠성을 공격해서

100여 일이 지나자


신라 진평왕은 장수에게 명해서

상주,하주,신주 新州 의 군사로써 이를 구하게 했습니다


드디어 (신라 구원군이) 도착해서 백제인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가니


신라 가잠성 성주 찬덕이

분개하고 한탄해서

병졸에게 말했습니다


<찬덕>세 주의 군대와 장수가

적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않고


성이 위태로운데도 구하지 않으니


이는 의리가 없는 행동이다


의리없이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의리있게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는,,


이에 격앙되서

용감히 싸우기도 하고 지키기도 했는데

양식과 물이 다하자

시신 (주검 시 屍 로 사람의 시체,,)을 먹고

오줌을 마시기까지 하며

힘껏 싸워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찬덕>내 평생 임금과 국가를 부모로서

충성을 다해 섬기기로 다짐했고

전쟁에 임해서는 물러나는 법이 없다고 배웠다


어찌 저 사악한 백제의 잔병들에게

우리 선조들이 땀흘려 이루어 주신

영토를 내줄 수 있겠는가 ?


,,,


<백제 무왕>가잠성 성주 찬덕이

용맹하지만 결국 우리의 지속적인 포위망을

뚫기는 어려울 것이다

백제군은 단결하여 번개같이 날쌔게 공격해

전력을 다하라 !


봄 정월(1월)이 되자

(신라 가잠성)사람들이 이미 지쳐서

성이 장차 무너지게 되서

사태를 다시 회복할 수가 없게 됬습니다


이에 (찬덕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외쳤습니다


<찬덕>우리 임금(신라 진평왕)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는데


이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백제)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되어

백제인들을 다 물어 죽여

(끽진백제인 喫盡百濟人 끽 喫 은 먹을 끽자입니다,,

[진은 다할,완수할 진 盡,,])


이 성을 되찾게 하겠다 !


그리고는 찬덕은

팔뚝을 걷어 부치고

눈을 부릅 뜨고

달려서 느티나무에 부딛혀 죽었습니다


이에 가잠성이 함락되고

신라 군사가 모두 항복했습니다


<백제 무왕>됬다 !

내 예전 관산성 전투때 성왕의 원수를 갚았다 !


<백제군>만세 !

대 백제국 만세 !


이로서 백제는 오랫동안 신라에게

당하기만 하다가

백제 무왕대에 이르러

이 가잠성 전투에서

모처럼만에 큰 승리를 하고

이후부터 적극적인 신라 공세로

외교 방향을 바꾸게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론은 나이가 20여 세 때

아버지(찬덕)의 공으로 대나마(신라 벼슬 이름,

신라 17관등증 10번째 벼슬로 6두품 아래인

5두품입니다)가 됬습니다


건복 40년 (진평왕 40년, 618년[위에서는

건복 27년이 진평왕 32년이라 기록되있습니다,,])

무인에


진평왕이 해론을 금산 金山 당주 幢主 에 임명해서

한산주 도독 변품 邊品 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을 습격해서

빼앗게 하니


백제에서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내어서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기록에

백제 무왕 19년에도 이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 장수들>어라하(왕) !

신라놈들이 칼을 갈고 가잠성을 습격해왔습니다

신라군 대장이 바로 옛 가잠성 성주 찬덕의

아들이라 하옵니다 !


<백제 무왕>대군을 보내어 필사적으로 막아내거라 !


해론 등이 이를 맞아서


칼날이 서로 맞닿자

(병기상교 兵旣相交)


신라 장군 해론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해론>전일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시었는데


내 지금 이곳에서 백제인과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


하고는

드디어 짧은 칼을 가지고

적(백제군)에 다달아서


몇명을 죽이고 죽었습니다


(신라군은 무왕 19년 기록에서

해론의 이 가잠성 공격때

가잠성을 회복하고 해론이

여기서 전사[전쟁에서 사망]했다고 하고


이에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서

분발해서 싸워서

가잠성을 다시 회복하게 된거 같습니다,,


실제 자살돌격을 한다 한들

국력이나 조직체계등이 미약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으나

[2차 세계 대전때

미국을 상대로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반자이 돌격,,]


당대 신라군은 이미 여러 군대의 선진화나

기술력등에서

백제보다 선진화 되어있었던거 같고

그런 상황에서 신라군이 주저하고 그럴때

[이미 이기는 상황에서 머뭇거릴때]


신라 장수들의 자살돌격은 사기가 올라가는

영향을 끼쳤던거 같습니다,,

그만큼 당대 신라는 지휘관들이 앞장서서

싸웠다고도 할 수 있고


이런 용맹한 모습들에 후대에

졸장,요즘말로 똥별이라 불리는 무능한 지휘관들이

자살돌격이나 결사항전의 배수진들을

자주 사용하나 돌격이나 배수진들이 성공한 사례들은

보통 이미 유리한 고지에 있거나 다른 경우의 수까지

고려한 상황에서야 성공하는 전술이었고


단순히 사기만 끌어올린다고 승리한것은 아니었고

귀산이나 해론,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 화랑들의 자살돌격은

'자살돌격으로 인해 승리했다'가 아니라

이미 사회,기술의 격차 등 이긴 상황에서

그만큼 신라 지휘부들이

용맹하게 싸웠음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자살돌격이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렸고

이로인해 승리했다라고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진평왕이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그 가족(해론의 가족)을 돕기를 매우 후하게 했습니다


당시 (신라)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장가 長歌 (긴 노래,시가)를 지어서 조문했습니다


<라봉봉>임전무퇴 정신이 용맹한 모습과 비장함등에

아무래도 화랑의 세속오계중 현재 가장 인기가 많고

유명한거 같으나


임전무퇴 정신은 이미 유리한 상황에 있을때

예를들어 겸손은 중요하지만 압도적으로 유능한 상황에서

겸손은 오히려 오만이라 할 수 있기에


(즉 나서야할때는 나서야 한다거나

논어에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

진정한 아는것이다라는 말이 있는거 같이)


밀어야 할때 미는 정신으로 해석될수 있다고 생각되고

문제는 이렇게 유리한 상황에서의 임전무퇴 정신이 아닌

기반의 부족이나 여러 불리한 상황등에서

무능하다고 이야기되는 지휘관들이

이런 임전무퇴 정신의 비장함등에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상황들이 많았고


대표적인 사례가 궁지에 몰려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결사항전하게되는 '배수진' 전략의

남용인데


초한지의 중요한 인물인 한신이 성공시키고

또 이런 임전무퇴 정신으로

신라 김유신 장군이 백제 멸망때

화랑들을 자살돌격시켜서 백제 장군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를 뚫은 사례,

조선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의 대첩등으로 유명하나

문제는 이때는 모두 전체적으로 보면


이미 표면적으로는 불리해 보여도

실제로는 유리한 고지에서 사용한 전략이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을을 타파하기 위한 계책은

아니었고(이순신 장군도 불리하긴 했어도

당대 조선은 일본에 비해 화포가 압도적으로 발달했습니다)


힘이 약할때는 임전무퇴 정신으로 미는거보다는

아무래도 숨어서 싸우는 게릴라 전술등이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있고

(물론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국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국군은

일제와 한국전쟁때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결사적으로 항전 했습니다)


하여튼 아무나 하는 전술이 아닌데

워낙 비장하고 웅대한 이미지가 있어서인지

이런 임전무퇴 정신이나 배수진들은


동서양 할거없이

여러 남용되다가 부하들이

속어로 개죽음 당하듯이 하며 죽어간 사례가 많았고,,


다시 해론의 이야기와 가잠성 전투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게 백제 무왕은 신라군들은 한강유역 공격에

크게 대비했을 것인데

한강 지역에 비해 허점이었던 가잠성을

백제 대군으로 포위해서

가잠성의 먹을것,마실것이 없을 정도로

지치게 하며 공격해서 함락시킨 것으로 보이고


그렇게 가잠성을 함락시키며

백제인들은 그동안 계속된

신라인들에 대한 큰 패배로

신라군은 무적의 군대다

싶이한 이미지나 두려움을

이 가잠성 함락으로 줄이게 된거 같고


결국 마지막 왕 의자왕때 까지

신라에 대한 대공세를 유지하는 기조로

백제의 외교 정책이 변하게 된거 같습니다


현재는 백제 이야기를 쓰는 중이기에

백제 중심으로 쓴다고 할 수 있으나

하여튼 당대에 신라인들은 국력도 강했고

지휘관들도 앞장서서 용맹하게 싸웠고

군 사후 복지등에도 신경을 썼던거 같습니다


가잠성 성주 찬덕과 그의 아들 해론 모두

결사적으로 백제군에 맞서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대로

전사,전쟁터에서 사망하게 됬고


시체와 오줌을 먹으며 버티다가도 안되자,,

백제군에 죽을바에 귀신에 되서

백제인들을 씹어먹어주겠다며,,

느티나무에 박아서 죽었다는 찬덕이나

역시 그의 용맹했던 아들 해론 등의 기록은

가잠성 전투가 당대의 매우 격렬했던 공방전이었음을 알 수 있고

북방에서는 한국 고구려와 중국 수나라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전쟁을 하고 있을 당대에 (수나라 113만,,)

역시 남쪽의 한국 백제와 한국 신라가 격렬하게

한쪽도 물러서지 않고 대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이런 한국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모두 대전쟁에 휘말리게 되며

점점 중국 통일 제국등의 등장 등의

위기 의식 속에서

삼국통일,삼한일통의 생각들이 한국 고구려,백제,신라 사회에

퍼져나가게 됬던거 같습니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이라는

말들이 많은거도 있지만 굳이 고구려 주도가 아니더라도

삼국이 온전한 통일을 했다면

오늘날 한국은 세계 초강대국이 됬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아쉬움이

많이 있는거 같고

하여튼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장점등은 뚜렷이 있었는데

점차 그렇게 신라 주도로 삼국사회는 움직여 가고 있었고

삼국시대 기록이 끝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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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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