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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백제 무왕대의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아막성 전투에서

백제군 4만명이 참살당하는

대패가 있었고,,


무왕 6년

2월 봄

무왕은 각산성을 쌓았습니다


8월 가을

신라가 (백제의)동쪽 변경을 침범했습니다


무왕 7년

3월 봄

서울(서울= 수도, 당대 백제수도는 사비)에

흙비가 내리고

낮에 어두웠습니다


4월 여름

크게 가물어서 기근이 들었습니다


무왕 8년

3월 봄

한솔 연문진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하게 했습니다


또 좌평 왕효린을 수나라에 보내서

공물을 바치며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했습니다


수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살피라고 했습니다


5월 여름

고구려가 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다시 석두성을 습격해서

남녀 3천명을 사로잡아서 돌아갔습니다


<라봉봉>당대 무왕은

옆나라 신라에게 4만 백제군이

참살당하는 대패를 당했음에도

또다시 수나라에 공물을 바쳐서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했고

무왕의 올바른 판단이라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고구려에서도 괘씸해서

백제를 공격한거 같은데

여기서 의문인 것은

당대 한강유역은 신라가 점거하고 있엇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육로로는 막혀있었는데

고구려가 수군을 보내서 백제에 상륙해서 약탈하고

사람을 사로잡아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왕 9년

3월 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수나라 문림랑 배청이

왜국 倭國 에 사신으로 가면서

우리나라(백제) 남쪽 길을 통과했습니다


<백제 신하들>이번에 수나라 사신이

왜에 사신으로 가며

우리 남쪽 길을 통과하였다고 합니다


<무왕>음,, 왜가 요즘 점점 커지고

우리를 거치지 않고 수나라와 직접 교류하려 하는군,,


<백제 신하들>괘씸한 일입니다 어라하(왕) !


<무왕>짐은 심히 불편하도다

요즘 왜에서는 사신도 보내오지 않고

어찌 부모의 나라에 대한 예를 갖추지 않는가 !


<백제 신하들>어라하 !

현재 왜는 우마야도(성덕태자,쇼토쿠 태자의 이름)가

적극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왜를 개혁 하려하고 있고

더이상 우리 백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과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습니다


<무왕>왜인들이 분수를 모르고

참으로 버르장 머리가 없구나 !

다음번에도 왜가 우리를 거치지 않고

수나라와 직접 편지를 주고받거든

도중에 강탈해버려라 !


<백제 신하들>예 어라하 !


일본 기록인 '일본서기' 기록에서는

608년(무왕 9년 ??) 6월

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가 수양제가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소지하고 귀국하는 도중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강탈 強奪 은 억지로 빼앗는다는 뜻으로

말그대로 왜가 수나라와 직접 교류하자

분노한 백제 무왕이 이를 도중에

강탈했다고 보시면 될거 같습니다,,


실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부터

615년 사이인 약 12년동안은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기록이 없었다고 하고

이게 고구려와 왜 혹은 신라와 왜의 관계면 몰라도

백제는 사실상 왜의 모국 母國 혹은

부국 父國 즉 사실상 부모의 나라라고 할 수 있었고

12년동안 외교관계가 없었다는거는

다른나라도아니고 백제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심각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왜는 백제인들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이

기반사업부터 문화,예술까지 키웠고

고대 일본사와 오늘날 현대 일본에서도 그만큼

백제인들의 영향이 크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백제 말기로 갈수록

백제가 신라에게 계속 압도적으로 패배하게 되고

고구려에게 미움받고

중국도 점점 백제보다는 신라를 믿어가기 시작하는데

수많은 백제인들이 건너가고

자식과 다름없었던 왜마저 이렇게 수나라와 외교를

하니 무왕의 배신감은 매우 컸을거 같습니다


당대 왜는 성덕태자(쇼토쿠태자)라는 개혁가가 나타나서

왜에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왜를 적극적으로 개혁하고 있었고

또 백제도 옛날같이 강대하지 않자

쇼토쿠 태자는 더이상 백제를 거치지않고

수나라와 직접 교류를 시도한거 같습니다


이에 분노한 무왕이

왜의 사신의 국서를 강탈한 거로 보이고


물론 하루아침에 백제의 수많은 영향력이

왜에서 사라지지 않듯

결국 이후에 왜는 백제 멸망시

전력을 다해서 지원군을 보내오고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백제인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않거나

스스로 백제인들의 후예라 생각하기도 하나


하여튼 당대에는

백제 국력의 약해짐 +

왜의 성장 + 중국 통일제국의 등장 +

신라의 강성함 등 상황에서

백제와 왜의 관계가 상당히 좋지 않았던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물론 백제가 왜가 사이가 안좋아도

이게 혈연,친가족끼리 사이가 안좋은 거라면

신라와 왜가 사이가 안좋으면

그냥 이웃끼리 사이가 안좋은 거라고 비유할 수 있고

결국 '가재는 게 편이다'라는 말이 있는거 같이

당대 백제가 왜와 사이가 안좋았다고

진짜 사이가 안좋았다고 봐도 안됩니다,,


근데 정말 무왕때 주변국과의 관계는

최악의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고

백제의 외교적 고립,

요즘말로 백제 패싱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무왕은 이후부터는 수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우측의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에 성공하기에

백제의 대반격,무왕이 주도권을 잡았다고도 평가하기도

하나 현실적으로 보면 당대의 이야기로는

신라 정예병들은 신라의 북부지역이자

북쪽의 고구려,남쪽의 백제가 있었던 한강유역에

정예병들을 주로 배치했고

이에 본지역에 방비가 허술했기에

무왕은 이에 신라의 허점을 노려서

북진,한강수복에서 동진,신라 본토공격으로

방향을 바꿔서 신라를 위기로 몰고갔다고도 하고

초반에는 무왕의 의도대로 그게 효과를 봤지만

이미 신라는 기초체력이 튼튼했고

백제 중앙 정예군 vs 신라 후방 예비군의 싸움임에도

물론 신라가 밀리기도 했지만

호락호락하게 넘어갔다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무왕의 이런 외교책을 중재외교에 성공하고

무왕은 영리하게 신라 대공세로 방향을 바꾸며

모처럼만에 신라에게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서

백제가 안정감과 자신감을 찾게 하고

백제를 중흥시켰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미 백제는 성왕대부터 신라에게

일방적,압도적으로 당하고 있었고

무왕 3년에도 4만 백제군이

신라군에게 모두 참살당했기에

신라군은 백제 상대보다는

고구려를 막으려고 정예병을 한강유역에

배치하는 것에 집중한게 아닐까 싶고

이에 무왕의 기습공격이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금새 다시 신라에게 방어되게 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근데 무왕역시 인물됨이나 성격등이

한 인물 했던거 같고 보통의 왕이라고 봐서는 안되겠으나

아무래도 신라 국력이 워낙 막강했기에

당대 백제상황이 좋았다 보기는 어려운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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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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