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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를 지은 무왕>


-삼국유사 무왕, 미륵사를 짓다-


그렇게 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 후

인심을 얻어서 왕위에 올라서 백제 30대왕

무왕이 됬고

서동요 다음 이야기로는,,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산,

사자사도 용화산쪽)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습니다


부인이 무왕에게 말하기를


<무왕의 부인>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무왕은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무왕>그런데 어떻게 못에다가

절을 지을 수 있지 ?


무왕은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지명법사는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서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미륵 삼회를 법상으로 해서

전 殿 (전각,불전) 과

탑 塔 (탑) 과

낭무 廊廡 (정전 正殿 [중앙 사찰] 아래에

동서로 붙여 지은 건물) 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


<일연>'국사 國史' 에서는 왕흥사 王興寺 라고 했다


라고 했습니다


진평왕(신라 26대왕, 무왕의 장인)이

여러 공인 工人 (기술자) 들을 보내서

이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삼국유사 기록으로

여기서 지금은 일연스님이 활동하신 고려시대)


<일연>'삼국사 三國史'에는

이를(삼국사기에서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 나오기에

'무왕을' 이라 해석하면 될거 같습니다)

법왕의 아들이라 했는데

여기에서는 (일연스님이 참고하신 민간설화나

책 같습니다) 과부의 아들이라 했으니


(무왕은 과부의 아들[민간],법왕의 아들[삼국사기]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었던듯 합니다)


자세히 알 수 없다


<라봉봉>백제 기록은 워낙 두루뭉술하거나

자료부족,말의 앞뒤,기록마다 다른경우가 많기에

삼국사기를 쓰신 김부식님이나

삼국유사를 쓰신 일연스님도

모두 골머리를 앓으신거 같고


개인적으로 백제라는 나라를 이해하려면

사실,근거보다는

마음의 눈이나,,

백제인들의 화려하고 고고한 예술미를

그냥 즐기는 식으로 이해해야 될거 같기도 하고

실제로 오늘날에도

백제의 주요지역이자

백제 말기에는 사실상 수도격이었던

전라도 지역에서는

예체능에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이 많이 나오고


(물론 꼭그렇다는거는 아니고

그냥 그런 세간의 인식이 있는거 같고

실제로도 그런거 같으나

사실은 지역보다는 개인의 성향이나

노력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백제기록이 앞뒤가 다르거나

말들이 두루뭉술,다른거도 한두번이

아니라서 이쯤이면

어쩌다가 백제인들의 성향을 파악하게 된거 같고,,

그냥 백제인다운 기록이다라 생각하고

즐기면 될거 같습니다,,

대략 삼국의 느낌은

고구려인들이 강인하고 용맹하고

신라인들이 지적이고 철학적라면

백제인들은 말로 설명하기 복잡하고

기록들이 워낙 뒤엉켜있음에도

백제 유물들을 보면

하나하나가 감탄이 나오기에

예술성이 강하다라고 생각하면 될거 같습니다


근데 결국 세심하게 살펴보면

뒤엉키고 앞뒤가 다른 백제기록들도

풀수 있으며 앞뒤를 추측할 수 있는거 같고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위 기록인 삼국유사에서


-삼국유사 무왕, 미륵사를 짓다-


가 복잡한게 뭐냐면

바로전 이야기가 서동요였고

무왕이 미륵사를 지을때

무왕의 장인인 선화공주의 아버지 진평왕이

공인,기술자를 보내서 도왔다고 하는데


즉 여기서 무왕의 부인이

당연히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라고 해석될 요인이 있는데

실제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 발굴 유물에서는

미륵사의 창건자가 무왕의 비인 사택왕후라고 나옵니다


백제 성씨는 복성,두글자로 사택씨 가문의 왕후였는데

사택씨는 익산지역의 호족이였다하고

일단 선화공주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고

이에 삼국유사 기록의 신빙성이 흔들릴 뻔 했으나

미륵사의 구조가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미륵사 발굴 유물인 '금제 사리봉안기'에서는

이렇게 기록되 있습니다,,


,,,(중략)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佐平(좌평) 沙(宅)積德(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善因(선인)을 심어

今生(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 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棟梁(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淨財(정재)(사원,자선을 위해 기부하는 재물)를

희사하여 伽藍(가람)(절의 큰 건물)을 세우시고,

己亥年(기해년) 정월 29일에 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중략)


즉 미륵사 유물인 '금제 사리봉안기'의 기록에서는

삼국유사같이

무왕의 부인이 개입해서

미륵사를 지은거는 맞는데


문제는 그 부인,왕후(사택왕후)가

신라 진평왕의 딸이자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택씨라는 백제 8성의 귀족, 대성팔족의

일원으로 신라 선화공주의 성인 김씨와는

관계가 없고


가뜩이나 서동요 주인공이

무왕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에 무왕의 서동설화,서동요가 거짓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하나


또 문제는 얼마 후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전라북도 익산시의 쌍릉 대왕묘 출토 유물을

재조사해보니

20~40대 사이 여성의 치아 유골과

신라제 토기가 발견되며

신라 왕실 여인(선화공주)가 백제로

시집온 거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하며


또 당대는 왕정국가로

왕들이 일부일처,한 여인과 혼인하지 않고

일부다처, 여러 부인을 두기도 했는데

이에 무왕이 사택왕후와 선화공주 모두와

결혼했을 가능성도 있고


원래 미륵사는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지었으나

정계암투로 사택왕후의 공적으로 둔갑했다거나

아니면 이후 신라 삼국통일 후

선화공주의 공으로 기록됬다거나 등등

여러 미스터리가 있으나

아무래도 그럼에도 서동요 설화 주인공은

무왕이 시대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맞는거 같습니다


워낙 복잡한 백제기록이라

나름 풀이를 해본거 같은데

쓰고보니 일목요연한 느낌이나

문제는 확실하다고 할지는 저도 모르겠으나

그나마 저가 내린 결론은


무왕이 선화공주와 결혼 후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신라 진평왕,

처갓집에 도움을 받아서

백제 왕위에 올랐고

별개로 다른 아내인 사택왕후의 요청으로

미륵사를 짓게됬고


여기에 여러 민간에서의 소문들이나

무왕의 서동시절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것 등이

섞여들어가서

오늘날에도 여러 해석이 나오는 현실이

된 거 같습니다


백제기록은 너무 복잡하고

기록마다 이야기가 달라서

복잡의 연속입니다


게다가 충청남도 부여군의 왕흥사와

전라북도 익산시의 미륵사는

서로 미륵사,왕흥사라고도 불리는거 같고

이는 미륵이 워낙 대중적인 이름이고

또 왕흥사는 왕이 흥한다는 뜻으로

백제 국왕이 개입해서 지은 절이기에

이 두 절들이 또 둘다 백제에서

국가적으로 지어진 절이기에

서로 혼동되는거 같기도합니다


복잡과 혼란,혼돈으로 가득한 백제기록에서

그나마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말없이 백제인들의 이야기를

백제인들의 방식으로 기록한

당대 백제인들이 짓거나 만든 백제 유물들이고


오늘날에도 무왕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미륵사지에 나온 유물이나

미륵사지 석탑 등은

경탄을 자아내게 하며

백제인들의 고고한 예술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계속 똑같은말 반복하거나

백제 예술을 찬양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신라와 정반대인게

신라 기록은 논리적이거나 지적이거나

철학적인 면이 강한데

신라 유물,예술들은 정말 똥같고,,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물론 아닌거도 당연히 있고

역시 백제 정치 기록도 잘된거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로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무왕의 서동요 이야기,

미륵사를 지은 이야기는 끝났고

다시 삼국사기로 돌아가서 무왕이야기를 할 것이나

왜 사람들이 특히 백제역사를 어려워 하는지

알 거 같습니다,,


백제인들은 대게 내실보다는

해양문화로 확장을 자주했던거 같고

특히 일본에는 백제 영향이 깊게 있는데

그렇기에 백제 기록도 느낌이

내실이 부족했던 백제정치 같이

깊다는 느낌보다는 넓고 얕은 느낌이고

백제사가 어렵고 꼬이거나

엉켜있다는 느낌이 드나

대신 얕아서 푸는거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은 느낌도 있습니다,,

문제는 워낙 넓어서 풀려면

한국기록 이외에도 유물과

중국,일본기록을

같이 찾아야되서 또한 까다로워져서

(+복잡한 백제왕실 족보,,)

그 때문에 어렵다면 또 어려운게 맞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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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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