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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30대왕 무왕 기록에는,,


무왕이름은 장이고

법왕의 아들이라는 이야기(삼국사기 에서는)와

무왕 출생설 등의 이야기까지는 저번에 했고,,


다음 이야기로는,,


(무왕은)풍채가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했고

법왕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다음해)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무왕)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무왕 3년

8월 가을

무왕이 군사를 출동시켜서 신라의 아막산성(=아모산성,아모성,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을

포위했습니다


<김부식>모산성이라고도 한다


신라왕 진평(진평왕)이

정예 기병 수천명을 보내서 항전하자

우리(백제) 군사가 불리해서 돌아왔습니다


<라봉봉>서동요의 주인공인 무왕은

왕이 되기전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했는데

무왕에겐 진평왕이 장인이었고

물론 이전에도 신라 진흥왕이 장인인

백제 성왕의 목을 벴으나

무왕은 사실상 처갓집인 신라 왕실과

진평왕의 도움으로도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데

즉위 초부터 바로 진평왕,신라를 공격해버립니다,,


이는 장인인 백제 성왕의 목을 벤 신라 진흥왕같이

신라인들에 대한 복수로

처갓집은 처갓집,국가는 국가 이런식으로

철저하게 구분하려했던 무왕 같기도 합니다,,


신라가 소타,외석,천산,옹잠 등 네 성을 쌓고

우리(백제) 변경에 침범했습니다


무왕이 노해서

좌평 해수에게 명령해서

보병과 기병 4만명을 거느리고

그 네 성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신라 장군 건품, 무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싸웠습니다


(백제 좌평)해수가 불리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 서쪽의 소택지로 퇴각해서

복병을 숨겨 놓고 기다렸습니다


(신라장군)무은이 승세를 타고

갑병 甲卒 (갑졸 甲卒 = 갑병, 갑옷을 입은 병사)

1천명을 거느리고

소택지까지 추격해서 왔을 때

(백제)복병이 달려들어서 갑자기 공격했습니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군사들은 놀라고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무은의 아들 귀산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귀산>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말라'

라고 하였는데


(임전무퇴 臨戰無退 신라 화랑의 세속오계중 하나로

싸움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음을 뜻하는 말)


어찌 감히 도망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느냐 !


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사망했습니다


나머지 (신라)군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백제) 군사가 패배하고

해수는 겨우 위기를 모면해서

단신으로 돌아왔습니다


<라봉봉>무왕 3년대 이 기록에서


무왕이 좌평 해수에게

보병과 기병 4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네 성을 공격하게 했다는 기록에서


4만이라는 병력은

기록에 남아있는 백제 병력동원 규모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며


백제 멸망시 신라 김유신장군이 이끌던 신라 병력이

총 5만인데

무왕이 백제군 4만을 동원했다는 기록은

신라인들에게서는 국가 멸망급의 위기였다고도

할 수 있으며

백제 무왕이 백제의 기본 정책을

'북진해서 신라에게 뺏긴 한강유역 탈환'에서

'동진해서 신라를 멸망시킴' 으로 바꾸며

적극적인 신라 대공세를 보여주는

기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라 국력과 기초체력은 창창했기에

무왕의 뜻대로 될리는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신라가 삼국중 인기가 적고

고구려 만주땅을 잃게되서 밉상이미지긴 하지만

삼국 최종승자는 신라였고

이긴 자는 이긴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삼국에서 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넓었지만

고구려는 산지가 많았고 거친 북방의 영토였다면

백제는 영토는 넓지 않았어도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 모두가

비옥한 곡창지대,평야지대와 해산물 자원등이 있기에

풍요로운 지역이었고 인구가 가장 많았으며

또 바다건너 왜 倭 (일본) 역시 백제인들의

중요한 활동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활발히 진출했던 백제의 해상영역까지 하면

백제 영토는 삼국에서 결코 좁지는 않았습니다)


신라의 인구는 불분명하나

보통 삼국시대 인구수로는 백제>고구려>신라 순으로

보는거 같고


(물론 고구려도 광대한 영토답게 인구가

많았으나 아무래도 당대 백제의 분국,멀티라 할 수 있는

'왜'(일본)이라는 변수까지 감안하면

인구 자체는 백제가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뺏긴 이후에도 삼국에서 압도적으로 많았을거라

생각됩니다)


김유신 장군이 백제 멸망때 동원한

5만 신라군도 사실상 신라국에서는

왕족,귀족,사병,노비들 할꺼없이 동네,다른마을 주민

15세 이상 남성들을 모두 탈탈 털어서 징집한거로 총력전급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비해서

무왕대 백제군 보병과 기병 4만은

그냥 백제에서 굳이 탈탈 털거도 없이

총력전도 아닌 여유 병력중 동원 가능한 병력을

뽑아낸 거라고 한다 하며


옛날 군대,징집체계는 오늘날과 다른게

옛날 군대는 주로 국가에서 징병,모병등으로

군대를 징집했다기보다는

상비군들이 대게 귀족들의 개인 군대,

즉 '사병'이었고


군대를 많이 동원하려면

그만큼 귀족들이 많은 군대를 내어야했는데

대신 백제군은 지휘층,지도부의 결집이

안되고 안됬음에도 무리없이 4만이라는

대군을 만들어 낼 만큼의

인구력이 높았던 백제였지만

역시 단결력이 매우 부족했고

백제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왕권이 지나치게 미약하고

귀족권이 강했던게 혼란에 상황에서는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에비해 백제 멸망당시

신라군은 적은 인구에도

왕,귀족,백성들이 하나로 단결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고


당시 전쟁은 동원력이 관건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인구가 많고 풍요로웠음에도 백제는

이런 집중동원력이 부족해서

신라군에게 이후 밀리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고


다시 무왕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만큼 백제는 한강유역을 뺏긴 이후에도

나름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압박하고 있었고

물론 백제인들 입장,국력에서도 4만은

작은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신라에 비해 별 무리없이

4만 군사를 동원할 정도로

백제 역시 만만한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대의 국가의 내실이나

기초체력 등은 그럼에도 삼국에서 신라가 가장

탄탄했다고 생각되고


중국 소설 '삼국지'나 중국 고대시대 역사에서는

옛날 고대사회에 10만대군 100만대군 이런게

자주 나오나 의외로 중국에서도 100만대군은

자주 나오지 않았고

이에 중국사는 군대 수를 과장,부풀려서

0자를 하나 빼야한다는 이야기도 있고(100만대군=10만대군)

10여만군사정도만 해도 중국에서도

중국 대륙을 위협하거나

실제로 지배하기도 한

대군이었다고 할 수 있고

당대 중국에 비해서 인구가 적었던

당대 한국에서 4만,5만은

중국 입장에서 봐도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었고


대신 이는 평시의 얘기고

중국 역시 인구집중,동원이 제대로되면

고구려 공격시 수나라 113만 대군같이

(이는 과장이 없다고 합니다)

거대한 대군을 만들어 내기도 했으나

역시 이는 유례가 적은 케이스고


백제 무왕의 4만,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은

당대 사회에 결코 적은 군사가 아니었고

마을의 15세 이상 남자들이 대부분 동원됬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었던거 같습니다


한국 고대 전쟁사 이야기에서도

당대 백제 무왕의 4만 군사 동원을

그만큼 백제가 인구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야기 하는거 같고


그만큼 고대사회에서 인구=군사력,국력에

비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첨단무기,기술의 발달로

오늘날은 인구수가 군사력에 비례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현대전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전쟁,6.25 전쟁때 중공군의 인해전술 같이

그럼에도 인구수는 오늘날에도 군사에서도

중요하다고 이야기 됩니다


백제 무왕보다 더 이전의 왕인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싸웠던

관산성 전투에서는

신라군이 백제국왕 성왕과

백제좌평 4명과

(좌평은 백제 국무총리나

장관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제장병 2만 9천 6백명을 참살했다고

삼국사기 진흥왕 기록에 나오는데


무왕대에도 '아막성(아막성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담당하는 주요위치이자 인근 4개성을

거느린 모성 母城) 전투'라고도 불리는

위 기록의 전투에서 성왕대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4만대군이 신라군에게 참살됬고

삼국사기 무왕 기록에서는 백제 좌평 해수가

4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서 단신으로 돌아왔다고 나오나


삼국사기 개인이야기라 할 수있는 열전중

귀산의 이야기인 귀산 열전에서는


'(신라의)여러 군사들이 이를(앞장서서 싸우는 귀산)을 보고

분발해서 진격하니

쓰러진 (백제군)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수레 한 채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고 나옵니다,,


결국 백제 성왕대의

관산성 전투에서의 백제 3만대군의 대패는

또다시 백제 무왕대의 아막성 전투에서

백제 4만대군의 대패로 이어졌고

수만이 살아돌아온거도 아닌

모조리 참살당했다고 할 수 있고

아무리 백제가 인구가 많았다고 한들

성왕대에도 그렇고 무왕대의 4만대군의 패배는

결코 보통 규모라 할 수 없었고


이 아막성전투에서 무왕은

자신을 왕위에 올리는데 기여했던

장인이었던 신라 진평왕을 즉위 첫 기록부터

바로 공세를 시작했고


이에 진평왕이 정예 기병 수천으로

곧바로 방어하고

백제 변경을 공격했고


무왕은 곧 좌평 해수에게 명령해서

보병과 기병 4만대군으로

신라군을 공격했는데


먼저 신라군은 그런 4만 백제 대군에

맞섬에서도 해수를 불리하게 했고

이에 해수는 복병,병사들을 숨겨놓고

복병책을 성공시켯음에도


신라장군 무은의 아들이었던

귀산이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니 신라군들은 분발해서 진격했고

복병책이란 원래 인구가 적거나 불리한쪽에서 하는거고

성공했더라면 그 효과가 크고 막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음에도

백제군들이 복병책에 성공했음에도

다시 신라군은 백제군을 무찔렀고


이는 단순히 귀산이 앞장서서 나서며

싸우자 신라군이 사기가 올라서

이겨냈다고만 보기 어렵고

그만큼 신라군이 인구와는 별개로

강군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만대군,복병 등에서

백제군에게 성공적으로 도망치거나

약소하게 이긴거도 아니라

그런 악조건에서도

신라군이 4만 백제군을 전멸시켰다는 기록은

단순히 귀산의 용감함만이라고 보기보다는

신라군 장비의 (당대기준에서의)현대화나

우수한 조직,보급체계 등 질적인 여러 관점에서

이미 신라군이 백제군을 압도했다고 생각되며


무왕대의 백제는 이 아막성 전투로

또다시 성왕대의 관산성 전투같이

큰 손실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고


물론 그럼에도 당대 백제역시 안망하고

계속 이후에도 신라를 공격하나,,


결국 그렇게 무왕대부터 백제는

국력과 국제 신뢰도를 점차 까먹으며

결국 무왕 다음대에 멸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라는게 정말 한 순간에

왕이 방탕하거나 충신들의 말을 안듣거나

하며 멸망하는거 같으나

역시 수십,수백만 규모의 인구로 움직이는 만큼

선대왕이 내실을 잘 다져놓으면

다음왕이 방탕하거나 해도

왠만하면 잘 안망하고,,

다음왕이 오히려 선대왕대 쌓여진 국력으로

영토를 넓히며 정복군주가 되기도 하나

(물론 그럼에도 선대왕대보다 국력이 소모되기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가면갈수록 상황은 나빠져서

멸망해 가고

한번에 멸망한다기보다

선대왕,선대왕의 선대왕대에

걸쳐서 국력소모,내부혼란등이 겹쳐서

한번에 멸망하는 거처럼 보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잘되는 나라나 사회는

오랫동안 다져진 내실을 기반으로

점차 잘되는 건데 한번에 잘되는 거로도 보여질 수 있습니다)


백제 무왕이 인물됨은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당대 신라는 오랫동안의 안정된 정치체계로

평안했던 상황이었고


물론 그럼에도 백제 역시 수많은 인구,풍요로운 지역 등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계속 이렇게 성왕,무왕대에 신라군을 공격하고

얻은것은 없고 잃은것은 많으며

수만 규모의 큰 손실만을 가져오게 됬고


신라군은 백제에 비해서 큰 규모의 피해는 없이

백제의 한강유역을 빼앗고

한강유역의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해양으로 중국과의 교역로를 확보하며

안정을 구가하고 있었기에

점차 백제는 계속 큰 손실을 입고

반대로 신라는 점차 계속 이익을 얻어가는

입장이었기에 오랜 기간에 걸쳐

점점 백제와 신라의 국력이

뒤바뀌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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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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