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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백제 마지막왕

백제 31대왕 의자왕 바로 전왕인

의자왕의 아버지

백제 30대왕 무왕의 이야기입니다


무왕 武王 은 그의 시호답게

군사,군대,무예 (武) 와 관련이 있는

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사 최고의

로맨티스트이기도 해서


(문제는 로맨스라는게

성공했기에 로맨스지

로맨스들은 과정이

올바르지 않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민간 설화 사랑이야기

'서동요'의 주인공으로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백제 도미부부같이 비극적이나

순수했던 사랑이라기 보다는

비록 공주를 희롱하기는 했으나

끝내 공주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의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고 고구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안장왕(흥안태자)과 한구슬(한씨미녀) 이야기 같이

행복한 사랑이야기라 할 수 있고


서동요의 주인공 답게

그는 대범했고 재기와 도량이 컸던거 같고

실제 기록에서도,,


<삼국사기>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하였다


<삼국유사>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라고 있을정도로 무왕은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고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이유는 인물이 없어서라기보다

약소국이었지만 시대적 변화에

선진적인 문물들을 필사적으로

받아들인 신라인들과 달리


올바른 정책,외교등의 부재가

원인이었던거 같습니다

이미 당대 한국 삼국 고구려,백제,신라인들 모두

바로 옆 중국의 통일왕조가 들어섬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시대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고

이에 삼국중 약소국으로 시작했음에도

선진적인 개혁을 성공리에 마친

신라가 끝내 삼국을 통일했던거 같고


이에 동화 아기돼지 삼형제가 생각납니다

첫째돼지(백제)는 지푸라기

집을 지어서 가장 빠르게 발전했으나

내실 부족등으로 가장 먼저 무너지고

둘째돼지(고구려) 역시 나무집을 지었고 무너지고

셋째돼지(신라)가 비록 느렸고

주위의 비웃음을 받았을 지언정

가장 안전한 벽돌집을 지음으로서

삼국을 통일하고 모두가 하나의 한국으로

신라의 벽돌집 지붕아래에서 살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고

저가 좋아하는 동화중 하나로

저역시 세 돼지의 인생을 선택하라면

셋째돼지의 인생을 살고싶습니다


다시 무왕이야기로 돌아가서,,

무왕은 대범하게 신라공주와 혼인해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서동요'를 남겼으나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해서

백제 정책을 북진,한강유역 수복에서

동진,신라 멸망으로 패러다임을 바꿨고

국운들은 점점 신라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신라는 떠오르는 해처럼 창창했으나

역시 백제는 예전같지는 못하더라도

풍요로운 농산물,경제력,인구력으로

신라를 압도하고 있었고


신라인들이 백제에 멸망위기를 느꼈다는게

저도 옛날에는 나름 승자가

원래 이길줄 알면서도 겸손떤다

이런느낌이었으나 물론 이 역시 틀린말은

아니나 실제로 정말 신라인들은

무왕대부터 나라 멸망의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무왕이야기를 쓰기전에

무왕에 대한

이야기들이었고,,


무왕은 즉위전 행보인

사랑이야기인 '서동요'가

한국인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야기이기에

삼국사기 기록부터 쓰기보다는

즉위전 이야기인

삼국유사 기록을 먼저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나온 무왕이야기 입니다,,


<백제 무왕의 출생>


-삼국유사 [무왕의 출생]-

무왕 武王


<일연>고본 古本 에는 무강 武康 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 30대 무왕 武王 의 이름은 장 璋 입니다

그 어머니가 과부(남편을 잃고 홀로사는 여자)가 되어

서울(수도)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익산의 용샘이라고도 하는 마룡지 馬龍池 라고 합니다)


못의 용 龍 과 관계를 해서 [장을] 낳고


(삼국사기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 나옵니다

문제는 백제 기록이 그런거처럼,,

각기 책마다 저마다 무왕의 아버지가 다르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 주장대로 법왕의 아들이나

적자아들이 아닌 서자출생으로

민간,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지방에서

산 인물 같습니다)


어릴 때 이름을 서동 薯童 이라 했습니다

(서동은)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서동은)항상 마(고구마,감자와 비슷한 작물)를 캐어서 팔아서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그 때문에 서동 薯童 (마 서 薯 아이 동 童)

이라 이름했습니다


<(전라북도 익산지역)백제 백성 1>

아따 우리 서동이가 인물이

훤칠하당께 !


<익산 지역 백제 백성 2>그라죠잉 ~

거시기가 연못의 용의 아들이라는데 ?


<백제 백성 1>허허 소문일 뿐이지,,

우리 마파는 아그 서동이가 속내를 쪼깨 알기 어려우나

그만큼 재기와 도량이 큰 아이로 보인당께 ㅎ


<백제 백성 2>그래불제 !

서동이가 그 서동이였고만

마를 파는 아이여서 서동 薯童 이 됬고마잉 !


<라봉봉>삼국유사에 나온 무왕은

삼국사기의 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과

달리 용의 아들로 나와서

그 출생이 괴이하나

확실히 백제 왕실 핏줄 부여씨니

왕위에 올랐을 것이고

이렇게 마를 캐서 먹고살았다는 것은

그가 왕실 궁궐에서 자란 정식 아들이라기보다

법왕의 후궁이 낳은 아이나 사생아 출신이어서

민가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높은거 같습니다


그의 출생지는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라 하며

오늘날에도 익산시에는 그의 출생 유적들이

남아있고 실제로 그는 왕이 된 이후

익산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려했고

익산은 그의 출생,거점지였기에

재위기간 내내 중요시하며

제 2의 수도역활을 했다고 합니다


무왕이 용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중국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 유방이

생각납니다

무왕은 비록 왕족 출신이었지만

왕족도 왕위 계승권에서 밀리거나

후궁의 자식들등은 민가에서 살아왔던게

역사였기에 무왕도 민간 생활을 했던 거로 보이며

용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내며 대범함을

드러냈을 수도 있고


한고조 유방역시 진시황의 폭정속에서

난들을 평정하고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었으나 민간의 평범한 동네 건달,,출신이었으나

용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내며

스스로의 신비로움,귄위들을 내세웠던거로 보이고


용은 신성한 동물로서 왕을 상징하기에

물론 실제 용의 아들일리는 없겠으나,,

이 두 민간출신의 왕들은

이런 소문들을 내서 비범함을 백성들에게

알리며 정치적 프로파간다,선전으로 활용했던거 같습니다


마지막 백성들의 대화는 저가 전라도

사투리를 써서 창작해봤는데

전라도사투리가 조롱거리로 이야기된거 같은데

실제 들어보거나,,

글로 봐도 음흉하다는 이미지와 다르게


(요즘은 아닌거 같으나

실제로 한국드라마에서 조폭이나

음흉한 캐릭터들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게

고질병이었다고 합니다)


시원시원하고 은근 매력이 있습니다

사실 전라도 사투리는 은근이 아니라

매력이 쎄고 강한쪽에 속하고

은근한 매력은 충청도 사투리가

맞는거 같습니다,,


백제 말기 배경 영화로는

'황산벌'이 역시 유명한데

영화속에서 '거시기' 나 전라도 사투리가

백제 표준어로 나와서 백제인들은 서울과 충청도가

수도였기에 전라도 사투리는 올바른 고증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무왕대부터는 전라북도 익산이 중요시됬고

사실상 익산은 백제의 제 2수도였기에

백제 후대,말기에 갈수록 전라도 지역이

중시됬고 전라도 사투리 역시 백제어로서

큰 문제는 없는거 같습니다


그렇게 매력이 강한 지역인

전라도 지역은 무왕때부터 서서히

백제의 중심지역으로 나타나게 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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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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