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백제 법왕과 왕흥사 이야기>


법왕 2년

정월(1월) 봄

백제 법왕은 왕흥사를 창립하고

스님 30명에게 도첩(나라에서 발급한

승려 인증서,자격증 같은것 입니다,,)

을 주었습니다


당시 백제수도 사비,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에 있었던

백제의 사찰 왕흥사 王興寺 는 국왕이 흥한다는 뜻으로

왕실,나라를 지키는 호국불교적 성격을 띄고있고

백제 왕실 원찰 願刹,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절이었던거 같고

백제 왕실과 관련이 깊은 절로

수도에 있었던 만큼 왕이나 왕실에서

자주 찾은 절 같습니다

삼국사기 무왕때 기록에는

왕흥사는 강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고

왕은 매번 배를 타고 들어가서

행향 行香 (향 피우기) 했다고 하며

정말 신비롭습니다


삼국사기로 보아서는 왕흥사는

법왕때 창립하고 무왕때 완공된 절 같으나

왕흥사 유물이 발견되고 창왕,위덕왕대에

건립됬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왕흥사는 백제에서 전라북도 익산시의

백제 최대규모 절인 미륵사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절이나

삼국유사,삼국사기,왕흥사지(왕흥사 터)에서 나온

유물들의 기록이 다른 점 등이 있고

이는 아무래도 당대 백제인들의 기록인

유물이 가장 신빙성이 높겠으나

그만큼 백제기록의 부실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삼국사기에서는 법왕때 왕흥사가 창립됬다했으나

왕흥사지에서 나온 사리함에서는

창왕(위덕왕, 위덕왕의 이름은 창입니다)대에

건국된 것이라 나왔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 왕흥사 사리함>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 爲亡(三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고 합니다)

王子 立刹 本舍利二枚 葬時神化 爲三


이로인해 삼국사기의 신뢰성에는 크게 상처가 났다고도 하나

삼국사기를 집필하신 당대 김부식님도

백제기록은 졸면서 썼다는 이야기가 있을정도로

1년 기록이 밀려쓰거나 하는 거도 있으나

그만큼 백제 자료가 부실했고 또 아무래도

김부식님 당대의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여서

나라 이름부터가 고려(고구려 20대왕 장수왕대부터

고구려는 고려라 불렸다고 합니다)였기에

고구려 기록은 신중하게 쓰신거 같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기에 삼국중에서

그 유물과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었는데


백제는 신라인들의 삼국통일 후

많은 유산들이 파괴됬다고 하며

애초부터 백제는 신라와 견원지간,원수지간으로

싸운 나라였기에 그 정도가 더 심했을거 같기도 하고

하필 통일신라 말기, 후삼국 시대에도

고려 태조왕건의 고려를 가장 괴롭힌 나라가

견훤의 후백제였기에


(백제는 원조,삼국시대 백제던

후백제던 고구려[고려],신라에게 양쪽으로

안좋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백제사에 대한

자료부족 + 미움 등이 겹쳐서

백제역사는 삼국에서 그 기록이 가장 부실하고

부정확하게 된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삼국사기는 신빙성이

높은 역사서이자 사실상 유일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역사 정사 正史 라고 할 수 있고


다만 창왕,위덕왕대에 건립된 왕흥사는

사리탑이 먼저 건립됬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고


또 삼국유사에서는 법왕을 호의적으로 보기도 했고

무엇보다 승려출신이셨던 삼국유사를 쓰신 일연스님은

왕흥사에 대한 기록들을 남겨두셨고

삼국사기 기록과 다르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유사>

이듬해 경신(庚申)에는 승려 30명을 득도(得度)케 하고,

당시의 서울인 사비성(泗沘城) 지금의 부여(扶餘)에

왕흥사(王興寺)註 를 세우게 하여 겨우

[그] 기초를 세우다가 승하하였다.

무왕(武王)註 이 왕위를 계승하여

아버지(법왕)가 닦은 터에 아들은 집을 지어

수십 년을 지나서 완성했는데,

그 절은 또한 미륵사(彌勒寺)註 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물에 임했으며 꽃나무가 수려하여

사시의 아름다움을 구비하였다.


(멋을 중요시한 백제인들의 예술혼이 느껴집니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물을 따라 절에 가서

그 경치의 장려함을 구경하였다.

고기(古記)의 기록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은 가난한 어머니가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는데,

어릴 때의 이름은 서여(薯蕷)이고,

즉위한 후 시호를 무왕이라고 하였다.

[절은] 처음에 왕비와 함께 창건하였다.


놀라운 것은 실제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에

나온 유물 금제탑지문에는

무왕의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의 요청으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삼국유사의 역사적 사실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왕흥사가 미륵사라고도 한다는데

왕흥사는 사비,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고

미륵사는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데

왕흥사가 미륵사라고도 불렸으나 동명이찰(같은이름의 절)

이거나 법왕 다음왕 무왕의 거점지이자

수도를 옮기려 했던 곳이 전라북도 익산쪽이었기에

왕흥사는 왕이 흥하는 절, 말그대로 왕실 절,

왕실 원찰 願刹 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있고

실제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지에서

왕후의 요청으로 지어졌다는 문구가 나왔기에

일연스님이 이 부분은 혼동해서 익산 미륵사지 이야기를

넣었을 수도 있는거 같고


사람들은 이 미륵사지 출토 유물에서

나온 이야기에서 이에 무왕의 부인이

사택적덕의 딸이었기에 선화공주가 아니고

서동요의 주인공이 아닐수도 있다는거에 집중하는거 같으나

삼국유사의 기록의 신빙성이

놀랍도록 정확하다는거 같기도 하고


(무왕의 부인이 절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서동요 다음이야기라

무왕의 부인이 신라 선화공주로 오해의 소지도 있습니다)


다시 왕흥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즉 왕흥사 이야기들을 늘어논거 같은데

어째 백제 왕실 족보와 같이

기록들마다 이야기가 다르고

유물도 기록과 이야기가 다르며

엉망진창같습니다,,


요약하기에도 워낙 꼬여있는 매듭들 같은데

그럼에도 요약을 해보자면,,


<왕흥사 이야기 요약>

1. 왕흥사는 삼국사기 기록에는

법왕때 시작해서 무왕때 완성됨


2.그러나 왕흥사에서 나온 유물에서 나온

기록에는 창왕(위덕왕)때 건립했다고 함


3.왕흥사(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는

미륵사라고도 불렸는데

이 미륵사는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미륵사도 있어서 이때

일연스님이 미륵사라고도 하는 왕흥사를 처음에

왕비와 함께 창건했다는데

실제 전라북도 익산시의 미륵사 유물에서는

무왕의 왕후 사택적덕의 딸의 요청으로 지어졌다고 나와서

일연스님이 왕흥사를 익산시의 미륵사로 혼동해서

왕비와 함께 창건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한거로 보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잘못 섞이긴 했어도

전북 익산 미륵사의 기록과 관계가 있는 기록이라 합니다

또 여기서 섞인게 여기의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인데 삼국유사에서도

무왕에게 부인이 부탁해서 절을 지었다고 나오는데

하필 서동요 다음기록이라 신라왕의 딸 선화공주로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워낙 엉망진창의 글 같으나

백제 왕실 족보가 뒤섞인거를

외국 기록과 대조해서 하나하나 풀어서

찾는 기분과 비슷한 기분이었고


대학교에서도 백제사가 가장 인기없고

어렵다고 한다는데

그 이유들이 이해가 됩니다


백제와의 원수지간이었던 신라인들의

유물파괴(혹은 조작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국제적 미움받음(왜,일본 제외,,) 등으로

백제 자료들이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거 같고

그나마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많은

일본기록 일본서기 기록이 백제기록에서는

정확한 편이 많은거 같습니다


저도 백제사를 쓰면서도

다른 역사들이 일반퍼즐이면

백제사는 특히나 외국기록과 대조해야하거나

여러 기록들이 말이 다르기에,,

입체퍼즐같고 뒤통수의 뒤통수의 뒤통수의,,

하는 복잡한 반전영화를 보는거 같습니다,,


(비록 민간에서 전라도인들을 비하하는 말이고

잘못된 말이지만

'전라도 사람들이 뒤통수를 잘친다' 라는 말이

백제인들의 오묘,복잡함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백제 기록은 '한입으로 두말한다'는거 같이

기록들이 말이 다른게 많습니다,,

+일본인들도 백제인들의 성향과 비슷합니다,,)


당대의 김부식님도 삼국사기를 쓰시며

백제 기록에서 여러 골머리를 앓으신거 같습니다,,


(삼국사기 내에서도 백제 이야기는

앞뒤가 안맞기도 한 이야기들이 많은거 같습니다)


다시,, 그렇게 삼국사기 법왕 이야기로 돌아가서,,


큰 가뭄이 들어서

법왕이 칠악사에 가서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5월 여름

법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시호를 법 法 이라 했습니다

 

<라봉봉>법이라는 법왕의 시호는 불교를 숭상했던 그의

삶의 행적과 일치하는 칭호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백제 법왕은

살생을 금하고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극단적 평화주의자 왕이었고

 

(이런거 보면 그냥 백제같이 별 특별한것은 없어도 

평범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유를 알거 같기도 합니다,,)

 

그가 건립했다는 왕흥사는 백제에서 가장 중요한 절이었다고 하나

2007년 충청남도 부여군 동남리 왕흥사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며

사리함에는 구체적인 왕흥사 창건내용이 기록되있는데

백제왕 창, 즉 위덕왕이 죽은 왕자(위덕왕의 아들)을

기리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나와서

이전까지 왕흥사는 법왕 혹은 무왕때에 지어진 거로 여겨졌으나

이 유물로 위덕왕 24년으로 파악한다고도 하고


도중에 위에서 글을 여럿 썼는데

글쓰기 복잡하더라도 여기는 한쪽 기록만 써도

이해가 어렵기에 여러 기록들을 섞어서 썼고


법왕은 재위기간 1년의 왕이었으나

워낙 이름같이 (법 法 은 불법,불교를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불교계에서는 살생금지령,왕흥사 창립(왕흥사 창립은

위덕왕대라 하지만

법왕도 왕흥사와 관련있는 인물일 수 있을거 같습니다)등의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고


그만큼 스님이었던 일연스님은

'삼국유사'를 쓰시며 법왕을 의미있게 보셨고

법왕을 찬미하시며 시까지 지으셔서

다음과 같이 시를 남기셨습니다,,


<삼국유사>

찬하여 말한다.

짐승들 보호하니 그 은혜 천 산에 미쳤고

가축이나 물고기에까지 어진 덕택 흡족하네

덧없이 가신 성군이라고 말하지 말라

상방(上方) 도솔천(兜率天)엔 꽃피는 봄 한창이라네


저는 법왕이 백성들의 고기잡이 그물들까지 태워버리고

엄격한 불교의 규율을 백성들에게까지 강요해서

좋게 보지는 않은거 같았는데

일연스님은 의미있게 보신거 같고

시가 엉뚱한 매력이 있기는 하나,,

어찌됬건 국왕의 자리에서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법들을

민간에게 까지 강요하는거는

백성들의 생업을 해치는 경우가 되기에

문제가 있고


이는 일본인들의 675년부터 메이지 유신때까지

1200여년동인 시행된 '육식금지령'에 큰 영향을 끼친거로 보이며


(좋은거든 나쁜거든 일본인들은

백제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거 같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초식남' 이런 느낌같고

이로 인해 일본인들의 평균 키가 크게 줄어드는

계기가 됬다 할 수 있는거 같고

결국 일본인들의 평균키는 한국 조선인 남성들이 161cm일때

155cm였고 육식금지령 해제 이후부터

급격히 상승해서 오늘날에는 한국인 평균키보다 약간 작고

실제로 일본은 백제인들,한국인들이

왜 倭 에 집단 이주해서 건국한 나라기에

유전자와 한국과 비슷,중국과는 연관이 없다해서

한국,일본인들의 평균키의 차이는

유전자의 차이라기보다

오랜 육식금지령 등 정책이나 다른 외부 환경적 요인의

차이로 발생한거 같습니다,,


되게 미묘하고 복잡하고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글들을 썼지만,,

또 '나도 내가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든거같고 물론 뭘 말하려는지 쓰면서

이해는 해서 알기는 압니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이고,,

그게 백제사의 매력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백제 법왕의 이야기였고

법왕 다음왕은 백제의 사랑이야기

'서동요'의 주인공이라 이야기되는 무왕이고

무왕은 서동요 주인공의 유쾌한 ??

로맨티스트 이미지와는 다르게

무왕 武王 굳셀,무예 무자라는 이름과 같이

정복전쟁이 많았고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있는

의자왕 바로 전왕이었고

의외로 백제는 망국때까지도

충청도,전라도 지역의 비옥한 농업생산력,

거대한 인구등으로

부유한 나라였기에 신라를 떨게했고

고구려,백제 모두 망국 전까지에도

신라보다 많은 군사들을 동원했던거로 보이나

고구려는 오랜 중국통일왕조,

수나라,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지쳐가고 백제는 무왕대부터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으로 신뢰를 잃게 되고 점점 그렇게

700년 백제왕조와 삼국시대가 끝나가게 됩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