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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가장 중요한 서적이자 한국사 정사 正史 이고

고려시대 대학자 김부식과 고려관료들이

한국 역사책을 탈탈 털어모아

부족한 고대사 이야기들을

박박긁어모아 찾아내며 최대한 자료들을 찾아 만든 역사책이나

역시 역사란 지역에 전승,구전되는 이야기,

지역 전설도 존재하고

이 역시 책에 나와있지 않는 이야기들 등에

유물과 더불어 중요한 보충 자료이고


그렇기에 현재는 삼국사기 중심으로 글을 쓰고있으나

틈틈히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들,

근래에 이야기되는 최신 이야기들도 같이 쓰고 있습니다,,


백제 30대왕 무왕은 백제 말기 최후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고

이에 기록이 다양하고 많은데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들을 더쓰자면,,


저번에 '라봉봉 한국역사 외교적으로

고립되어간 무왕대의 백제'에서 썼지만 무왕은

608년 6월에 왜(일본)가 더이상 백제를 거치지 않고

중국 수나라와 직접 교류를 시도하며 편지를

주고받자

도중에 무왕이

왜 사절이 수나라 양제가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소지하고 귀국할때

국서를 강탈했다고도 하고,,(일본서기 608년 6월)



삼국사기에서 무왕이

무왕 37년에 신하들을 데리고 잔치를 하며

놀았다는 대왕포는

전설에서는(지역 구전같습니다) 무왕이 왕자(서동왕자)시절에

신라의 선화공주를 데리고 이곳에서 뱃놀이를 해서

대왕포라 했다고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동안 했던 이야기들에 대한

삼국사기 이외의 이야기들이었고,,


삼국사기에는 없으나

무왕 말기 정책중 매우 중요한 이야기였던

금마저(전라북도 익산시) 천도사건 이야기입니다


19세기 조선의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지리학자 김정호의 지리지(지리책)인

'대동지지'에서는,,


<대동지지>

익산은 무왕의 별도(別都 서울 밖에 따로 둔 작은 서울)

였다.(今益山武王置別都於址)

(익산은) 본래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일연 삼국유사에서는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라고 나와있고

무강왕은 무왕의 다른 이름이거나

잘못 불리는 이름 같습니다)


때 성을 쌓고는

별도(別都 서울 밖에 따로 둔 작은 서울)를 두어

금마저(金馬渚 금마지의 지 只 는 다만,겨우 지 只 자인데

금마저의 저 渚 는 물가 저 渚 자로 무왕이 이름을 바꿔

격을 높인거 같습니다)


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되있고

꽤가 아니라 백제사에서 수도를 이전할 정도면

매우 큰 사건인데도

삼국사기에 그 기록이 없다는게 이상하기도 하나


무왕이 사비지역 귀족들에 대한 견제 +

자신의 출생지,세력 근거지인 익산으로 천도 +

사비가 있던 부여보다 동남쪽인 익산에 수도를 옮김으로서

신라 경상도 지역 본토공격의 전초기지로서 활용


등의 이유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고 하고

무왕 재위 후반기에 시도했으나

무왕이 얼마후 사망하게 되고

의자왕이 왕위에 오르자 흐지부지 하게됬고

기존 수도 사비에 거점을 둔 백제 귀족,사비세력들도

이를 좋게 볼 수는 없었고 또 백제는 얼마후 멸망했기에

익산 천도계획이 주요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고

이에 이후 쓰여진 삼국사기에서도 기록되지 않은거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1953년 일본 한 사찰에서

10세기쯤에 편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가 발견됬다고 하는데

무왕의 익산천도 기사가 적힌 자료였습니다


<관세음응험기>

백제 무왕은 지모밀지(枳慕蜜地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리 인근의

옛 이름이 지마마지인데 이것의 오기라고 합니다)에

천도(遷都 도읍을 옮김)하여

정사(精舍 절)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정관 13년 기해년 겨울 동짓달

[639년 11월]

하늘에 큰 비와 벼락이 처서

제석정사를 불태웠다

불당 일곱계단

부도 회랑과 방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9층탑 속의 가운데 주춧돌을 [들추고 열어보니]

여러 종류의 칠보(七寶 일곱 보물)와

또한 부처님 사리가 든 수정병과

구리로 만든 종이 금강반야경을 베껴

옻칠한 나무함이 들어 있었다.

주춧돌을 들추고 열어보니

모두 남김없이 타버렸으나.


오직 부처님 사리가 든 병과

반야경 옻칠함과 수정병 안팎을 살펴보니

모두 움직이지 않았는데 사리만 다 없어졌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리) 6개가 들어 있었다.

이를 보고 대왕과 여러 사람과 궁궐 사람들은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 갑절로 받들어 발원하고

공양을 올리고

다시 절을 짓고 담아 두었다.


百濟 武廣王 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歲次己亥 冬十一月 天大雷雨遂災 帝釋精舍 佛堂七級浮圖 乃至廊房 一皆消盡 塔下礎石中 有種種七寶 亦有佛舍利 ?水精甁 又璘作紙 寫金剛波若經 貯以木漆函 發礎石開視 悉皆消盡 唯佛舍利甁與波若經漆函與故 水精甁內外徹見 盖亦不動而舍利悉無 不知所出 六個悉見於是大王及 諸宮人倍加敬信發卽供養 更造寺貯焉.


관세음응험기는 익산 왕궁리 석탑에서 출토된 세가지 유물을

정확히 맞추었다고 합니다

(정관 13년 기해 11월, 제석정사의 화재로

법당과 탑 등이 모두 타 버렸으나,

탑의 심초에 들어있던 금판경과 사리함 등만은 타지 않았고,

그것을 다시 절에 봉안했다)


즉 무왕은 재위 후반기,말기에

익산지역을 중시하며 천도할 계획을 했고

실제로 왕궁 평성을 축조하고 제석사를 창건했으나

다만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고 하고

삼국사기에도 축조된 익산 왕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전라북도 익산은 '김정호 대동지지'의 기록같이

별도 (別都 서울 밖에 따로 둔 작은 서울)였고

무왕대부터 중시되며 백제 제 2의 수도역활을 했고

익산 왕궁리 유적은 완벽한 도성의 형태를 하고있으며

실제로 궁성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고 합니다


위에서 말한거 같이

익산으로 천도한 이유는


기존 사비 귀족세력 견제 + 무왕의 출생지,근거지

+사비(충청남도 부여군)보다 동남쪽인 익산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서 신라 경상도 본토지역 공격의

전초기지


라고 이야기되고 있고

급속도로 왕권이 강력해진 무왕대의 백제였고

이에 무왕은 익산으로 수도를 천도하려 했던거로 보이나

재위 말기였고 얼마후 사망하며 흐지부지해 진거 같고

다음 왕인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이 물려주신

강력한 왕권을 이어감으로 사비세력과 타협을 하고

수도 이전을 중지하게 된거 같습니다,,


무왕대의 익산 천도계획은

백제의 한강 - 웅진 - 사비 다음의

4번째 수도이전이라 할 수 있는 큰 사건이음에도

삼국사기에 기록되있지 않은 것은

역시 무왕 말기대 이루어지고

수도이전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흐지부지해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익산지역은

'서동대왕'이라고도 불린

무왕의 출생지로 알려진 마룡지(용샘)와

미륵사,제석사 등 여러 무왕의 흔적들이 남겨있고

백제 말기의 주요 중심지였으며

이런 무왕의 고향사랑은

이후 전라도 지역이 백제인들의 중심지가

된 계기가 된거 같습니다

전라도 지역은 그렇게 무왕대인 백제 말기부터

멸망 이후 통일신라 김헌창의 난때에도

전라도 지역은 그대로 백제 수도였던

충청도 지역과 함께 김헌창의 장안국에 붙어버렸고

이후 후백제가 나타나자 무진주(전라[남]도 광주광역시)

완산주(전라북도 전주시)가 후백제의 수도가 됩니다,,

사실 백제의 수도이자 근거지는 한성(오늘날 서울,한강유역)과

웅진(충청남도 공주시), 사비(충청남도 부여군)인데도

오늘날 사람들의 인식이 백제 = 전라도 라는 인식이 생겨난 것은

역시 경상도 신라와 전라도 백제의 전통적인 라이벌 구도도 있었으나

이렇게 무왕대부터는 전라북도 익산시 지역은

실제로 백제 제 2 수도라 할 수 있었고

이후부터 후백제의 근거지가 전라도 지역이기도 했고

즉 백제 무왕대, 말기부터는

전라도 지역이 백제의 주요 지역이 됬기에

오늘날 이런 인식이 생겨난거 같습니다


<라봉봉>백제 최후의 불꽃이자 백제 마지막 자존심이라 할 수 있었던

무왕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삼국사기 이외에도

전설이나 구전등 여러 이야기가 있는거 같고


그는 말통(맛둥=서동 薯童 =마파는 아이)대왕 혹은

서동대왕이라고도 불리며 '서동요'라는 한국사의

아름다운(성공했기에,,) 사랑노래,사랑 이야기를 남긴 인물이자

왕이 되고서는 무너져가던 백제를 재건하고

오랫동안 패배하기만 했던

신라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서

신라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며 신라를 떨게했고


한국 이외에는

중국과 직접 교류를 시도한 왜(일본)를 저지하려했고

당나라와 수교관계를 맺으며

비록 말기 백제였지만 무왕 당대의 백제는

무시못할 나라였으며

마지막 백제의 자존심,불꽃이라 불리기에

무리가 없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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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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