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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대의 무산성 전투,

신라 김유신 장군의 등장>


의자왕 3년

정월(1월) 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11월 겨울

의자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그 목적은 신라의 당항성(한강유역 밑

경기도 화성시 쪽,중국과 해로,

바닷길로 교역하려 할때의 중요 길목)을

빼앗아서

그들이 당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의자왕이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서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신라왕 덕만 德曼 (신라 27대왕 선덕여왕의 이름, 김덕만 金德曼)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구원을 요청하니

의자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습니다


의자왕 4년

정월(1월) 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니

당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서

두 나라(백제,신라)를 타이르자

의자왕이 표문을 올려서 사죄했습니다


의자왕의 아들 융(부여융)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9월 가을

신라장군 유신 庾信 (삼국통일의 주역,

한국사 위인 신라장군 김유신 金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습니다


의자왕 5년

5월 여름

의자왕은 당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7개 성을 빼앗으니

신라에서 장군 유신(김유신)을 보내 침공했습니다


<김유신>나는 평생 충효를 다하기로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감히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따르라 !


<백제 장수들>김유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

김유신과의 정면대결은 피하라

굳게 지켜라 !


의자왕 7년

10월 겨울

(백제)장군 의직 義直 이 보병과 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했습니다


신라장군 유신(김유신)이 직접 군사들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서

아군을 크게 격파하니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김유신 장군의 전투는

삼국사기 개인이야기인 '열전'에

'김유신 열전 상 上(김유신 장군은 신라 영웅이기에

상,중,하로 길게 써져있습니다) ' 에 기록되있는데

이때 김유신장군이 백제군사가 매우 날쌔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기력이 없어지자 부하 장수 비녕자 丕寧子 와

함께 술을 마시며 비녕자에게 은근히

(자살돌격을 해달라는,,) 마음을 표시를 했고,,


비녕자는 김유신 장군에게 절을 한 뒤

백제군 진영으로 돌진해서 여러 백제군사를 죽이고

자신도 전사했고 비녕자의 아들 거진도

따라 돌격해서 죽었고 곧 비녕자의 종(노비,,) 합절도

싸우다 죽었고

신라군사들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는

감격 感激 (감격, 감동,,)해서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해서

백제군사를 대파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합니다,,


김유신 장군은 세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곡을 매우 슬피 했다고 합니다,,


<라봉봉>'무산성 전투 茂山城 戰鬪 ' 라는 이야기는 따로 없지만

무산성 茂山城 , 감물성 甘勿城 , 동잠성 桐岑城 이 세 (3) 성의

전투를 모아서 저가 무산성 전투라 썼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실제로 이렇게 부하 장수들을

자주 자살돌격을 시켜서 신라군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전술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때 이런게 효과를 본 이유는

신라군은 이미 선진화된 장비와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에 머뭇거릴때 이런 자살돌격을 시켜서

사기를 끌어올리려 했던거로 보인다고 저가 쓴적이 있고

만약 신라군이 백제군에 비해 장비나 조직이 후진적이었다면

일본이 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때 미군에 후진적 무기로

자살돌격(반자이 돌격,가미카제 자살특공대)하다가

비유하면 개죽음,,을 당한거 같이

아무짝에도 효과를 볼 수 없었겠지만

신라군은 선진적은 장비나 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때

머뭇거리다 패배할때 김유신 장군의 자살돌격이 효과를 본 것으로

보인다고 쓴적이 있고

하여튼 이런 기록들이나 황산벌 전투에서도

총 지휘관이었던 신라 김유신 장군이 5만 신라군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백제군과 대치했는데

백제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로 결사항전을 하자

이를 뚫으려고 화랑 반굴과 관창을 자살돌격 시키기도 하고

이런거를 보면 정말 나쁜인물 같으나

실제 역사에서도 수련중에 방해된다고

본인이 자주 찾아가던 기생집에 평소같이

길을 찾아간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인

말의 목을 베기도 했고

('말목자른 김유신'으로 유명한 이야기지만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부하들을 자살돌격 시키는 등 결코 착한 인물이라 하기만도

어려운 인물이고 유능한 신라,한국사의 영웅,위인이지만

그의 어두운 모습도 있다 할 수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고


대신 앞뒤가 같고 정직하고 우직했던 인물이기는 했기에

신라의 영웅이 되었고

젊고 어린 부하 장수들을 자살돌격 시키기만 한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35세에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때


'제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옷깃은 옷을 바로잡는 부분,

벼리는 그물의 조정줄, 즉 핵심이 되겠다 , 맨 앞에 서겠다)


하고는 말에 올라서 칼을 뽑아들고

적진을 드나들며 적장(고구려 장수,,)의 머리를 베어서

머리를 끌어 돌아와서 신라군들의 사기를 올려서

전투를 승리시킨적이 있어서

이후 지휘관이 되어서는

부하 장수들에게도 이런 방식을 사용시킨거 같은데

대부분의 부하장수들이 김유신 장군 같이 영민하게

싸우다 살아돌아온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그냥 비녕자,거진,합절이나

반굴,관창같이 그냥 돌격하다 사망했고,,


하여튼 본인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모습에

부하들에게도 (사실상 자살)돌격을 시켰지만

본인 스스로도 젊은 시절 돌격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앞뒤가 다르거나 뒤에서만 명령을 내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김유신 장군같은 것도 아니었고

하여튼 위인전에 좋은 모습만 나와있는

김유신 장군과 달리 현실주의 정치군인 + 잔인한 모습

등도 상존해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물됨 자체는 유능하고 정직했기에

신라군의 보급을 담당하기에 무리가 없었으나

(보급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정직,부정부패와 거리가 먼 인물이 해야만 하고

김유신 장군이 쌀배달꾼이라는 유머도 있기는 하나

보급에는 올바른 인물됨이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지휘관으로서 김유신 장군은

냉혹하고 잔인한 모습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대의 인물이자 삼국통일,삼한일통의 주역이며

신라,한국사의 영웅,위인으로서

당대 백제인들을 공포에 떨게한 인물이었고

그렇게 의자왕 7년 10월 겨울에 있었던 이 무산,감물,동잠성

세 성의 전투는 백제군들도 본격적으로

신라의 영웅,인물이었던 김유신 장군과의

대결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고

만약 백제인들이 이때부터 이런 김유신 장군의

(자살돌격)전술을 알고 미리 대비했더라면

황산벌 전투나 백제 멸망은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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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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