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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쓰기 전에>

관료전 이야기를 하다가 좀 딴길로 샌거같고

잘못된 글을 쓴거 같아서 자료도 더 찾아보고

글을 수정했습니다

저가 갑자기 되게

기초적인 실수를 한거 같아 찜찜했고

수정했습니다,,


좀 더 이전 이야기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녹읍은 옛 신라 초기에는 신라가 소국, 부족들을 정복하며

그 지역의 왕, 족장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주거나

또 정복전쟁에 참여한 장수, 귀족들의 권리 인정 등으로

녹읍이나 식읍


(식읍은 녹읍에 한술 더떠 세습까지 가능한 제도라

김유신 장군, 장보고, 경순왕[왕건에게 신라를 바친 대가,,] 등 극소수에게만

지급됬다고 합니다)


등이 그래도 유지가 가능했는데

삼국 통일이 완료된 시점에서는 더이상의 영토증가도 없었고

내부 행정개편, 점점 확대되는 신라의 지방에 대한 행정력 등등으로

점점 녹읍에 대한 중앙정부의 견제가 시작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신문왕의 이야기입니다,,


<녹읍을 폐지한 신문왕>


신문왕 8년

정월(1월) 봄

중시(=시중, 오늘날 국무총리) 대장(사람 이름) 이 죽고

이찬(신라 2등벼슬) 원사가 중시가 되었습니다


2월

선부에 경 卿 (오늘날 차관급) 한 사람을 증원했습니다


(加般府卿一人 가반부경일인이라 나와있는데

선부와 관련된건지 모르겠고

선부는 선박, 항해 관계의 업무관장 부서로

오늘날 해양수산부라 할 수 있습니다)


신문왕 9년

정월(1월) 봄

신문왕이 하교 下敎 (임금의 명령) 해서

서울과 지방 관리의 녹읍 祿邑 (관리들에게 직무의 대가로

지급한 논밭인데 수조권 이외에도 그 지역의

노동력 징발, 공물 수취도 가능해서 귀족들에게는

녹읍을 가진곳에서는 거의 왕같이 행동이 가능했고

정부의 영향을 확대하려는 신문왕의 견제를 받아 폐지됨)


을 폐지하고

매년 직급에 따라 벼를 주는 것으로

( ' 逐年賜租有差 축년사조유차 ' 라는 기록으로

이런 관료들에게 벼로 봉급을 주는 것을

'축년사조' 라고 합니다)

상례(흔히 있는 일)로 삼도록 했습니다


(즉 녹읍으로 영주, 지방의 왕같이 군림하던 귀족들이

관료전이나 벼를 받아 월급으로 하는

속된말로 '월급쟁이' 로 전락했다 하고


점점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오며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영향력도 더 강화됬고

관료들의 녹봉제도 역시 확립되갔다고 할 수 있었는데

당장 지방에서 왕같이 살던

당대의 신라 신하들에게는 큰 불만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왕권이 강했을 때라 신하들도 조용히 있었으나

신문왕의 '녹읍 폐지' 는

수많은 귀족들의 불만을 낳은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경제권이라 할 수 있는

'밥그릇 문제'는 언제나 상당히 예민한 문제로

역사에서 수많은 반발, 반란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결국 이 '밥그릇 문제'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 신하들> 음,, 허허 ,, 새로운 제도가 들어서며

나라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있군요

허허허 (마음과 같아선 빼액 !! 하며 드러 눕고 싶지만

왕이 너무 무셔어,, )


가을 윤 閏 (윤달)

9월 26일

신문왕이 장산성에 갔습니다


서원경성을 쌓았습니다


신문왕이 달구벌(오늘날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대구의 옛 이름)

로 서울(수도) 을 옮기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동남부 구석 해안가에 위치한 수도 금성[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조금더 내륙과 가까운

달구벌[오늘날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으로 옮기려 했다고도 합니다

또 귀족을 매우 견제했다 할 수 있는 신문왕의 성격상

역시 수도이전은 오랫동안 금성에서 기반을 잡고있는

신라 귀족들에 대한 견제책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문왕 10년

2월 봄

중시(오늘날 국무총리) 원사가 병으로 사직하자

아찬(신라 6등벼슬) 선원을 중시로 삼았습니다


10월 겨울

전야산군 轉也山郡 (오늘날 경상남도 남해군)을 설치했습니다


신문왕 11년

3월 1일 봄

신문왕은 왕자 김이홍(훗날 신라 32대왕 효소왕 김이홍)을

태자로 봉했습니다


13일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사화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습니다


남원성을 쌓았습니다


<당황제의 칙명을 거절한 신문왕>


신문왕 12년 봄

대나무가 말랐습니다


당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서

구두 口頭 (입으로) 로 다음과 같은 칙명을 전했습니다


<당중종의 사신>우리 태종 문황제(당태종 이세민)는

신성한 공덕이 천고 千古 (오랜 세월) 에 뛰어났으니

붕어(사망) 하시던 날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선왕

김춘추(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 에게도

동일한 묘호를 쓴 것은

매우 참람 僭濫 (분수에 넘쳐 너무 지나치다) 된 일이니

조속히 칭호를 고쳐야 한다


<신문왕>으음 ㅡ_ㅡ ;;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당사신>알았다해


신문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한 후에

대답했습니다


<신문왕>우리나라(신라)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 聖祖 (성스러운 조상, 당태종을 높여 불러준 말) 의 묘호와

서로 같게 되었는데

칙령(임금의 명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컨대 !

선왕 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 同心爲政  一統三韓( 동심위정 일통삼한 )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별세하던 때에

온 나라의 신민 臣民 (신하와 백성) 들이

그를 추모하는 심정이 극진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당태종 이세민)의 묘호에 저촉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교칙을 들으니 송구스러움이 다할 수 없습니다

사신께서 황제에게 복명 復命 (결과를 보고) 하되

이대로 보고해 주기를 삼가 바랍니다


그 후에 다시는 이에 관한 (당나라의) 다른 칙명이 없었습니다


(상당히 부드럽고 정중한

신문왕의 거절이었다고 할 수 있고

신문왕도 역시 그의 아버지 문무왕를 닮아서인지

당나라를 상대할때 정중히 당나라를 높이면서

거절하는 그런 모습도 있습니다

당도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복원하고

또 신라와 전쟁을 했던 경험이 있었던 만큼

신라를 자극하지 않으려 더이상 신라의 묘호문제를

논의하지 않게된거 같습니다


[오늘날 보기엔 쓸때없는 이야기같아도

종 宗 과 조 祖 같은 묘호는

황제국에서만 사용가능해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전부 일단 중국 몰래 올렸다고 합니다,] )


7월 가을

신문왕이 붕어했습니다


시호를 신문 神文 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습니다


(옛날에는 신문왕 하면 그냥 뉴스 할때의 신문, 신문지가 떠올랐는데,,

실제로는 여러 개혁정책과 신라 행정개편, 신하 견제로 유명한 왕이고

신하들은 신문왕이 여러 기도와 같은 장문의 명령을 내리거나

제사지낸 것과 또 그의 개혁정책이 선구적이었다는

의미로 신문 神文 이라는 시호를 올리게 된거 같습니다)


<라봉봉>신문왕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이야기가

9주 5소경 체제의 통치구역을 정비했다는 점 이외에도

바로 '관료전 지급과 녹읍폐지' 가 유명합니다


신라는 오랫동안 녹읍이 유지됬고

오랜 전쟁등으로 귀족들의 녹읍에 대한 권리 등이

보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전쟁시기에는 귀족들도 많이 죽어나가서

귀족이 죽을 경우 녹읍에 대한 권리가 상실되 다른 귀족이 가져갈 수도 있겠고,,

영토 확장등으로 녹읍지역도 확장되서 녹읍이 운영되는게

가능하다 할 수 있겠지만

삼국통일 전쟁, 나당전쟁 종결 이후 신라에 평화가 찾아오고

신문왕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과 달리

정복보단 수성(지키기)에 집중해야할 입장이었고

영토도 이미 고정화가 된 상태고 지방으로 영향력이 확대되는 신라 정부에서는

더이상 녹읍 유지에 대한 부담이 생겼다고 할 수 있고

이에 신문왕은 적극적인 관료전, 녹봉 지급정책과 녹읍폐지로

녹읍에 대한 견제를 했다고 할 수 있고


원래 최상위 귀족들인 진골 귀족들은 녹읍을 지급받고

중간 관료인 6두품과

그 이하는 '축년사조'라는 일종의 곡물, 토지로 받는

월급이 있었는데

신문왕의 녹읍폐지로 진골귀족들 역시

6두품들과 마찬가지로 축년사조로 봉급을 받게 되었고

이는 신문왕이 진골귀족들 역시 6두품같은 신라의 행정 관료층으로

편입시키고 경제 기반에 타격을 입혀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중앙집권화,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개입이

지방 군현까지로 확대 된 것은 신라 다음시대인 고려시대도 아닌

조선시대때 가서야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고

(모든 군현의 지방관 파견은 조선시대때야 확립됩니다)

이 당시에도 많은 불만이 있었을 것이고

결국 진골 귀족들은 70년 뒤 경덕왕때 다시 녹읍이 부활시킵니다

그러나 신문왕대 녹읍폐지부터 경덕왕때까지는

70년간 귀족들도 축년사조를 받아가면서 생활을 했고

이는 나라에서 관리들에게 일정한 보수를 지급한것이는데

의의가 있는 조치라 하며 오늘날 보면 당연해 보여도

옛날에는 지방에 대한 정부의 행정권이 오늘날보다 훨씬 약했고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다는 것은

살기 위해서라도 부정부패, 하극상 등이 발생하고

여러 문제점이 역사에서는 계속 반복되 왔기에

(대표적인 예로는 조선시대 부정부패의 온상인 아전[이방])

하여튼 매우 예민한 문제이기도 하며

오늘날 보기엔 당연한 느낌이어도 그당시에는

상당히 선진적인 제도를 도입하려 했던

신문왕의 의도였다 할 수 있고

이런 개혁정책을 아버지 문무왕에게 물려받은

강력한 왕권으로 강하게 밀어나가는 신문왕이었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개혁과

말년에 당황제의 칙명 거절 등 자주적인 모습도 보인

신문왕은 한국사, 통일신라사에서

중요하게 이야기 되는 인물이고

역시 그의 아버지 문무왕과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도 말할것도 없어서

이 세 부자 父子 왕을

태종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라인이라며

신라 중대의 전성기 라인이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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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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