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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전설적인 왕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켰다는 전설이 있고,,

길고 긴 그의 이야기가 끝나게 됬고

이제는 그의 아들 김정명, 신문왕의 이야기입니다,,

신문왕 역시 아버지를 닮아 또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두번째 군주라는

자신의 위치와 시대적 과제를 잘 알고 통일신라의 기반을 단단히 다진

훌륭한 왕이라 하고(근데 고려 광종이나 조선 태종 이방원 같은

숙청으로 유명한 왕이고 당대 신라에서는

삼국통일전쟁은 끝났으나 나라에 전쟁공신이 가득해

왕권을 강화하고 신권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을 했습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일본 통일후 많아진 무사들을

'소모'시키려고,, 한국 조선을 공격했고 그게 임진왜란입니다,,] )


태종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이 3 부자 父子 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할 만큼 명군들이 계속 나왔던

신라였다고 할 수 있고 초기 신라가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라인으로

전성기적 모습이 있었다면 역시 중기 신라도

태종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라인으로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문왕의 이야기입니다


신라 31대왕 신문왕 김정명(혹은 김명지)

재위기간 11년 681~692년


신문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름은 정명이며


(개인적으로 이 태종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의

업적 말고도 이 세 부자 父子 의 이름이 멋있습니다

김춘추, 김법민, 김정명 상당히 클래식한 느낌을 받습니다,,)


<김부식>명지의 자 字 는 일소이다


(해석으로는 그의 이름을 명지라고도 하는데

그의 자는 일소이다 [자 字 는 호 號 와도 비슷하며

이름 이외의 별명, 부이름 같은거라 보면 됩니다


예 : 제갈량의 자가 공명이어서

제갈량, 제갈공명 이라 부름])


(신문왕은 한국 모든 군주중에서

최초로 자가 확인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신문왕 김정명은) 문무대왕의 맏아들(첫째아들)입니다


어머니는 자의왕후 慈儀王后 입니다


<김부식>의 儀 를 의 義 로 쓰기도 한다


왕비는 김씨이며

소판 蘇判 (=잡찬, 신라 3등벼슬) 김흠돌의 딸입니다

신문왕이 태자였을 때 그녀를 맞았으나

오랫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뒤에는 그녀의 아버지의 반란 (김흠돌의 난)에

연좌(옛날에는 반란을 일으키면 반란자 말고도

그 가족들까지 처벌을 받았고 이를 '연좌제'라고 합니다) 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문무왕 5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당고종이 사신을 보내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왕(문무왕)의 관작을 이어받았습니다


신문왕 원년(1년) 8월

서불한(=이벌찬, 신라 1등벼슬) 진복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으로 임명했습니다


8월 8일

소판(=잡찬, 신라 3등벼슬) 김흠돌,

파진찬(신라 4등벼슬) 흥원,

대아찬(신라 5등벼슬) 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됬습니다


(김흠돌의 난인데 딱히 어떤 반란이거나 하는 기록은 없고

김흠돌 역시 삼국통일전쟁 전쟁공신에 신문왕의 장인인데

적극적인 왕권강화책을 구사하려는 신문왕과

그런 신문왕을 풋내기로 보는 고위귀족 김흠돌의 마찰이 있었던게 아닐까 싶고

또 김흠돌의 딸, 신문왕의 왕후 역시 오랫동안 마땅히 후사도 못낳았고

이런 이유 등으로 위기의식이 커진 김흠돌이 반란을 모의하다

역시 아버지 문무왕으로부터

매우 강력한 왕권을 물려받은 신문왕에게 곧바로 진압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신라 신하 1>오오 ;; 이번 왕께서도 장난아닌데

그래도 장인인데 권력 앞에선 피도 눈물도 없으시군,,


<신라 신하 2>선왕을 닮으신 구석이 있군,,

것보다 말조심하게 읍읍


8월 13일

보덕왕(보덕국왕, 보덕국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의 후원으로

옛 백제땅에 세운 괴뢰[허수아비]국가 )이

사신 소형 小兄 (고구려 관직명) 수덕개를 보내

역적을 평정한 것을 치하했습니다


<수덕개>우리 국왕께서는 신라국의

새로운 임금의 즉위를 열렬히 환영하며

역적을 평정한 것을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별수있나 신라에 붙어야지,,)


<신문왕>허허 ,, (보덕국도 언젠간 쓸어버려야겠군,,)


8월 16일

신문왕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습니다


<신문왕>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예전 성인들의 좋은 법도이며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 또한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다


과인이 못나고 박덕한 몸으로 숭고한 왕업을 이었기에

식사를 잊고 새벽에 일어나고 밤 늦게 잠을 자면서

충복 忠僕 (어떤 사람을 충직하게 받드는 사람) 대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였으니

상중에 서울(수도, 서라벌[금성])에

반란이 일어날 것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


반란의 괴수 흠돌, 흥원, 진공 등은

그들의 재능이 훌륭하여 작위에 오른 것이 아니며

관직도 실은 은전 恩典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혜택)에 의하여 오른 것이다


그들은 항상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여 부귀를 보전해야 했으나

결국은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행복이나 위세를 마음대로 만들어

관료들을 업신여기고

상하 上下 (위, 아래) 를 기만하였으며

한없이 탐욕스런 생각을 함부로 내보이고

포학(횡포하고 잔악)한 마음을 휘둘렀으며

흉악하고 사악한 자들을 끌어 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 결탁하였다


그 화란이 안팎으로 통하여

악의 무리들이 모여

거사일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과인이 위로는 천지 天地 (하늘과 땅) 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 조상의 도움을 받아

쌓이고 쌓인 흠돌 등의 음모가 탄로되었으니


이는 곧 사람과 귀신이 모두 취하지 않는 행위요

천하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니

정의를 범하고 기풍에 상처냄이

이보다 더 심한것이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를 모아 흉악한 무리들을 무찌르고

더러는 산골로 도망하고

혹은 대궐 뜰에 와서 항복하였다


잔당들은 모두 체포하여 이미 처형하였고

향후 3,4일 사이에 괴수(못된 짓을 하는 무리)들도

모두 소탕할 것이다


이는 부득이한 조치였으나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여러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백성을 걱정하고 그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야

어찌 하루라도 잊었겠는가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원근 遐邇 (먼 곳과 가까운 곳) 에 걱정이 없어졌으므로

소집하였던 병마 兵馬 (병사와 말)를 조속히 돌려 보낼 것이니

이를 사방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알도록 하라


8월 28일

신문왕은 이찬(신라 2등벼슬) 김군관 金軍官 을 목베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습니다


<신문왕>임금을 섬기는 법도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근본이요

관직에 있는 의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병부령 이찬 군관은 순서에 따라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임금을 정성껏 보좌하지 못하고

결백한 절조 節操 (절개와 지조)를 조정에 바치지 못하며

임금의 명령을 받으면 제 몸을 잊어 버릴 줄 모르고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표할 줄 몰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신 逆臣 (임금을 반역한 신하) 흠돌 등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반역할 것을 알고도

미리 고발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이 없고

더욱 공공의 질서를 따를 뜻이 없는 것이니

어찌 다시 재상의 직무를 맡겨

국가의 헌장 憲章 (법적 규범) 을 흐리게 할 것인가 ?


마땅히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후진 後進 ( '후진국' 이라는 말의 그 후진으로

여기서는 후손이라 해석가능할 것입니다)

들에게 경계를 삼게 하리라


군관과 그의 맏아들(첫째아들) 한 명을

자살하여 죽게 하고

원근(먼 곳과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모두가 알도록 하라


<김군관>김유신 장군과 함께

평생을 군인 軍人 으로서 나라에 몸바쳤건만

권력이란 허무하구나 !


<김군관의 맏아들>끄윽 난 뭔죄냥,,


10월 겨울

시위감 侍衛監 (궁성에서 국왕을 시위[호위]하는 부대인 시위부의 총 책임자)

을 없애고 장군 將軍 (신라 최대 군단인

6정, 9서당 및 왕궁친위대 시위부에 배속된 최고 지휘관,

흔히 아는 '장군'과 한자가 같음) 6인을 두었습니다


<라봉봉>신문왕은 통일된 신라를 이어받은 첫번째 왕으로서

자신의 시대적 직무등을 파악하고 적극적인 왕권 강화, 사회안정책을

구사하려 했던거 같고

적극적으로 삼국통일전쟁기간 많아진 전쟁공신들이나

다른 세력들을 숙청하며 왕권을 공고히 하려했던 인물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왕권 강화책이라지만 장인 김흠돌이나

(아무리 반란을 일으켰다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신문왕의 견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을거 같습니다)


처갓집 이외에도 김군관같은 전쟁영웅까지 쓸어버린

신문왕의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등은

처갓집, 외척, 공신들을 숙청한 조선 태종 이방원급의 숙청왕이라 할 수 있으며

하여튼 '권력앞에선 피도 눈물도 없다' 를 보여주는 역사의 씁쓸한 이야기 같습니다


일단 김군관 같은 케이스는 전쟁영웅임에도

김흠돌과 친해 줄줄이 엮여 사형당한 케이스같고

(+아버지로 인해 연좌죄로 사형당한 김군관의 첫째아들)


일단 김흠돌, 김군관 같은 경우에는 삼국통일때 활약한 전쟁공신인데

문무왕때에는 신하로서 공을 세운 인물인데

신문왕은 매우 강력한 왕권을 구사한 아버지 문무왕 같이

강력한 왕권을 구사하려 했으나

일단 그에게 김흠돌, 김군관은 '아버지의 신하'였지

'자신의 신하'는 아니었고

이에 자신의 세력들로 점점 바꿔가려 하고

또 커져버린 전쟁공신 세력들에 대한 신문왕의 부담감 등

이에 김흠돌이 위기를 느끼다 난을 일으키고 곧바로 진압, 숙청하며

자신과 뜻이 안맞는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의 숙청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정계에 피바람이 불었음에도

왕권이 매우 강할때라 다른 신하들도 별다른 소리를 내지 못했고

이에 신문왕은 적극적인 숙청과 왕권강화책, 귀족 견제책을 했던거 같습니다


음,, 김군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름이 김군관 金軍官 인데 군관 軍官 의 사전적 의미는

말그대로 '군사를 맡아보는 관리' 이고

그는 삼국통일전쟁 기간동인 '이름값'을 한 거같이,,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고 신라 귀족의 정점인 상대등까지 임명됬고

당연히 다른 전쟁공신 귀족들과도 친분이 있고

많이 인맥이 있었을 것이라 김흠돌의 난 당시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뭐해서 가만히 있다가 역시 줄줄이 엮여서

신문왕에게 처형된거 같고

나름 명성이 있던 인물이고 반란에 직접 가담은 안해서

신문왕도 김군관과 첫째아들 한명만 자결시키는 정도에서 끝낸거 같은데


다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옛 한국, 특히 신라인들은 자식의 이름을 지을때

자신의 소망, 그가 이름같이 성장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지은거 같고

이에 이름들이 되게 클래식한 느낌이 된 거 같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 김무력 金武力 은 가야계 인물이나

이름인 무력 같이 무력을 쓰는 장군으로 활동했고

김춘추는 이름 춘추 春秋 같이 역사에 이름을 날렸고 등등

신라 초기에는 자연, 고유어적 이름이 많다면

중기로 넘어오면서 불교의 유입등으로 불교식 이름,

부모의 바람이 담긴 이름 등으로 짓는게 유행하게 된 거 같고

(예를들면 자식이 과학자로 이름을 알리라고 이름을

'김과학 金科學' 이라 짓는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김군관도 정말 요즘말로 '닉값(이름값)' 한 인물이기도하고

신문왕도 숙청작업을 벌이면서 김군관이 전쟁영웅이었기에

조심스럽게 김군관 본인과 그의 첫째아들까지만 죽이는 선에서,,

끝난거 같고 이는 대신 그의 왕권 강화로 이어졌다 하기만 보다는

수많은 아버지대의 인재들을 숙청하며 한편으로는 국력의 약화나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으로도 이어진게 아닐까 싶고

당장은 나라가 기울지 않더라도

이렇게 점점 인재풀들이 사라지거나 불신이 늘어가며

반란이 일어나고 기울어 간다 할 수 있고

일단 신문왕대에는 삼국통일을 한지도 얼마 안됬고

아직 신라가 튼튼했고 왕권과 국력이 강력했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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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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