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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쓰기 전에>저는 곧 군대에 갑니다

그런 기념으로 입대전 사진 하나 찍었고 글 쓰기전에 올리고 갑니다


<라봉봉>잘 다녀오겠습니다 충성 ~


<나당전쟁때 신라의 승리 석성전투,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편지>


삼국사기 문무왕 하 文武王 下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왕이기에

기록도 방대하고 이례적으로 상, 하로 나뉘어 있습니다


재위기간 20년 661~681년


문무왕 11년

정월(1월) 봄

이찬 예원을 중시(오늘날 국무총리격)에 임명했습니다


군사를 동원해서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웅진 남쪽의 전투에서

당주 幢主 (신라 무관벼슬 이름) 부과가 전사했습니다


말갈 군사가 와서 설구성을 포위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려 하자

우리 군사가 공격해서

3백여 명을 목베어 죽였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 OOOO (삼국사기 원문 4글자 소실) 을 보내서

옹포를 수비하게 했습니다

백어(하얀 물고기)가 ... 에 뛰어 들었는데

OOOOOOOOOO(삼국사기 원문 10글자 소실) ... 한 치였습니다


(白魚躍入□□□□□□□□□□一寸

백어약입□□□□□□□□□□일촌)


4월 여름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습니다


6월

장군 죽지 등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 가림성의 벼를 짓밟게 했습니다

(당나라의 군양미 소모하게 하는 전략)


그 때 마침 당나라 군사와 석성에서 전투가 벌어져

(나당전쟁 석성전투)


5천 3백명의 (당나라군의) 머리를 베었으며

백제 장군 두 사람과

당나라 과의 果毅 (상급무관직이라 합니다)

여섯 사람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7월 26일 가을

대당총관 설인귀(당나라 장수)가 

임륜 법사(임윤법사 琳潤法師 , 신라 승려)를 시켜서

신라왕(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설인귀의 편지>행군 총관 설인귀는 신라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육로 만리 해로 삼천리를 지나

본인은 (당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삼가 듣건대 왕(문무왕)은 사심이 발동하여

변경에 무력을 배치한다 하오니

이는 자유 子由 의 한마디 말을 버린 것이요

후생 侯生 의 한번 약속을 버린 것입니다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었으며

꽃과 꽃받침의 그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움의 달빛만 헛되이 비치고 있습니다


이제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일을 말씀드리려 하니

실로 더욱 탄식이 나올 뿐입니다


선왕 개부 先王 開府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통일을 도모하여 온갖 성을 전전하면서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노를 염려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약탈을 경계하였습니다


사방 천리 땅

도처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누에 치는 여인들은 뽕 따는 시기를 놓쳤고

김 매는 농부들은 밭갈이 할 시기를 잃었습니다


선왕은 나이 60세라는 인생의 황혼기에도

뱃길의 위험을 감내하고 파도를 넘어와서

(태종 무열왕 사망나이는 56~57세인데

설인귀가 착각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중국에 의지하는 심정으로

황제의 대문에 머리 숙이며

어려운 상황을 고하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 상황을 호소하는 말에

진정이 묻어 나왔으니

이를 듣는 사람은 슬픈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태종 문황제(당태종 미세민)는

기품이 천하에 제일이었으며

정신은 우주에 군림하였으니


반고 盤古 (아주 오랜 옛날)의 아홉번 변화나

거령 巨靈 (크나큰 힘을 가졌다는 신령)의 손과 같이

쓰러지는 자를 부축해주고 약한 자를 구원하기에

하루를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당태종 이세민))는 선왕(태종 무열왕 김춘추)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가 요청하는 것을 기꺼이 들어 주셨으며

가벼운 수레와 빠른 말,

좋은 의복과 훌륭한 약품을

하루에도 여러번 주어 특별히 우대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으며

군사에 관한 토의를 하게 되니

그들의 약속은 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서로 의지하였으며

쇠와 돌에 새긴 것 보다 더 분명하였습니다


두 분은 찬란한 대궐과 번화한 수도에서

주연을 벌였으며

궁정의 연화에서 대화를 나누고

군사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일을 달리하여 서로 응원하기로 하고

일시에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 때는 변방의 잡초에 꽃잎이 매달리고

느릅나무에는 열매가 매달리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주필 전투 (주필산 전투로 고구려와 당의 전쟁시기의 전투)에는

문제 文帝 (당태종) 가 직접 가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불쌍한 자들을 구휼하였으니

이는 매우 정의로운 행동이었습니다

(특히나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주필산 전투는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데뷔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얼마 후

산과 바다가 형상을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은 듯

황제는 무기를 놓으셨고

왕도 역시 선왕의 뒤를 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위와 칡이 서로 의지하듯

함께 토벌군을 일으켰고

병기와 말을 정비하여

선대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 후로 수십년이 흘러

중국은 국세가 흥성치 못하였으나

때때로 창고를 열어

일용한 물자를 공급하여 주었습니다


바다 건너 신라를 위하여

중국의 군사를 일으키니

중국에 유익한 일은 적고

쓸 데 없는 일은 많았습니다


이를 중지할 줄을 어찌 몰랐으리오마는

선왕의 신의를 저버릴까 염려하여 그만 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강했던 적(백제, 고구려)들이 이미 숙청되었고

원수들은 나라를 잃었으며

그 병사와 말과 재물을 왕(문무왕)이 또한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문무왕)은 마땅히 정신과 육체를 헛되이 쓰지 말고

안팎이 서로 도와 병기를 녹이고

허욕에 눈뜨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실정에 알맞는 일입니다

후손에게는 좋은 국책을 전해 주어

그들을 평안하니 돕는다면

역사는 이를 칭한할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왕은 지금 평안한 국가의 기반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정책을 싫어하여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친의 말씀을 어기며

천시 天時 (하늘의 때) 를 업신여기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깨트리면서

한 구석의 궁벽한 작은 땅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 아이로 하여금 밭 일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나라를 지키자니 의지할 곳이 없고

나아가 싸우려해도 대항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얻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이며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요

크고 작은 것이 짝맞지 아니하고

순리와 역리가 차례를 잃은 격이니


이는 또한 활을 가지고 닭을 잡으러 가다가

마른 우물에 빠지는 위험을 못 보는 것과 같고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다

참새가 자기를 덮치는 것을 모르는 것과같으니

이는 왕이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한 탓입니다


만약 선왕이 살아 계실 때

일찍부터 황제의 은혜를 입고도

음험한 생각을 품고

거짓 예절로 정성을 내보이며

자기의 사욕을 위하여

황제의 큰 공을 차지하려 하고

앞에서는 구차하게 은혜를 바라고

뒤에서는 반역을 도모했다면

이는 선왕의 단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맹세는 반드시 황하가 허리띠처럼 좁아질 때까지

지켜질 것이며

의리와 명분은 추상같이 엄정해야 할 것이니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충성이 아니오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왕은 충성과 배반의 두 가지를 한 몸에 지녔으니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


선왕이 지금의 당신이

하루 아침에 확고한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은

모두 황제의 염려가 멀리 미쳤고

그 위력이 서로를 협조하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 주와 군이 이어져

마침내 기반이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선왕과 그대 왕이 번갈아 책명을 받았고

스스로 신하임을 일컬어 왔던 것입니다


왕은 앉아서는 경서를 읽고

시와 예를 상세히 알면서도

정의를 들으면 따르지 않고

선을 보고도 경멸하며

권모술수에 귀기울이니

이는 눈과 귀가 어두운 것이며

고귀한 가문의 기반을 소홀히 하는 것이니

필경 귀신이 엿보는 결과를 맞아 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왕의 성대한 업적을 받들면서도

다른 뜻을 품고

안으로는 충신을 없애고

밖으로는 강적을 불러 들이니

이를 어찌 슬기롭다고 하겠습니까 ?


또한 고구려의 안승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인 설인귀의 병선은 돚을 펴고 깃발을 달아

북쪽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예전에 받은 신라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풀지 않았는데

왕은 도리어 외부의 원조를 믿고 나와 대적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된 잘못 입니까


황제의 은덕은 끝이 없고

어진 교화는 멀리 미치며

사랑은 햇볕처럼 따스하여

봄날의 꽃잎 같이 밝게 비치나니


멀리서 신라와 고구려가 꾸미는 일을 듣고도

이를 염려할지언정 믿지 아니하고

마침내 본인(설인귀)에게 명령하여

이 곳에 와서 자세한 사유를 알아 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본인이 온 사정을 묻지도 않았고

술과 고기를 보내 우리 군사를 먹이지도 않았으며

마침내 군사를 언덕 밑에 숨기거나

병기를 강 어구에 감추거나

병사들을 숲속으로 숨어 다니게 하며

풀이 무성한 언덕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게 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해칠 군사를 양상하는 것이요

우리가 서로 돕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나라의 대군이 출동하기 전에

유격대가 먼저 대열을 정비하여

바다로 출동하니

물고기는 놀라고 새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왕은 사람의 도리로 해야할 일을 스스로 찾아

망령된 행위를 요행스럽게나마 그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큰 일을 하려는 자는

적은 이익을 탐하지 않으며

높은 절개를 가진 자는

영명해야 합니다


선량한 나라와 사귀지 못하면

적국이 엿보게 되는 법입니다


고장군이 거느렸던 한나라 기병이나

이근행이 거느렸던 번병,

오나라 초나라의 용감한 수군들과

북방의 사나운 군사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여

병선을 열지어 내려가서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게 된다면

이는 왕에게도 치유될 없는 병이 될 것입니다


왕이 만약 전쟁에 치친 병사들로 하여금

평화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면

잘못된 일도 단번에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니

왕은 사유를 모두 말하고

우리와의 관계를 명백히 말씀하십시오


본인 설인귀는 일찍이 황제의 행차를 수행했을 때

직접 황제로부터 위임을 받았으니

이제 보고문을 기록하여 황제에게 상주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모든 일이 밝게 해결될 것인데

왕은 왜 그리 초조하여 스스로 복잡하게 소동을 부립니까


아, 슬픈 일입니다

옛날에는 충의를 다하다가

이제는 역신이 되었으니

처음의 좋은 관계가 나중에 와서 나빠진 것이 유감이며

근본은 같았는데 말단이 달라진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바람은 높고 날씨는 차며

나뭇잎은 떨어져 한 해가 슬프게 흘러 가는데

산자락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니

가슴아픈 회포가 떠오릅니다


왕은 마음이 밝고

풍신 風新 이 준수하니

겸손한 자세를 가직 원칙으로 돌아가

당나라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때에 따라 제향을 받을 것이요

왕통이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이러한 행운을 선택하고

복을 받아 들이는 것이

바로 왕의 정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엄한 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이제 왕의 휘하에 있는 스님 임윤에게

편지를 맡겨

몇 가지 본인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문무왕>얘네는 뭐이리 말이 기노


<신라 신하들>하나같이 억지 주장일 뿐입니다


<문무왕>'개기지 말라'라고 요약할 수 있겠구나

짐이 친히 답서를 보내겠다 받아 즉어라 !


-다음 이야기에 이어서 쓰겠습니다-


<라봉봉>그렇게 나당전쟁 기간중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편지가 있었고

비유를 하면 주한대사, 연합군 사령관 격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말도 안되는 책망을 하는 글을

보낸 꼴이라 하고 (편지에 상당한 억지주장이 많습니다)

쓰면서도 되게 귀찮은 글들이었고

대신 설인귀의 편지에서

문무왕의 성격 등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당대에도 문무왕은 아버지 못지않게 유능한 인물로

정평이 낫다고 할 수 있었으며 당나라군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로는,,

이에 문무왕 역시 기나긴 글의 답서를 준비합니다,,


군대가기전까지

라봉봉 한국역사를 얼만큼 쓸까 했는데

고구려, 백제사는 일단 끝내놨고

신라는 문무왕대까지 쓰게된거 같습니다

근데 이후에도 삼국사기 열전(개인,인물들의 이야기) 이야기도 쓸거고 

이후에는 삼국유사나 조선상고사등의 글들도 쓸 것입니다

요즘 미미쿠키 사건 등 남의것을 그대로 가져와 재포장해서

판매한 사건이 있는데 저도 그런가 싶어서 뜨끔 한거 같으나

이것은 제과제빵도 아니고

역사는 삼국사기 집필때도 그랬고

기본적으로 글,자료들을 모아서 쓰는 것이고

저역시 글들을 거의 비슷하게 쓰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이거는 저의 생각과 일치할 경우, 또 역사적으로 반박하기

그런 사실의 이야기일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고


저는 적어도 성의없이

복사 붙여넣기만 하는게 아니라 최신 경향, 이론들과

어려운 한자용어등은 직접 번역,해석해가며 썼고

글 하나하나에 수십분, 많게는 몇시간씩 걸려서 써왔고

이것을 거의 매일 올해 1월부터

현재 군대 가기 얼마전까지 했을 것입니다

(올해 이전에도 여러 자리잡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또 글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차별화를 하려

일부로 틈틈히 유머러스한 그러나 당대 상황을 왜곡하거나

하지 않는 선에서 또 글의 이해를 쉽게하는 선에서

틈틈히 대사를 넣고 있으며

이는 라봉봉 한국역사의 독창적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의 생각, 요즘 최신 학설등 여러 글들을 정성껏 쓴 것이기에

미미쿠키 사건 같이 완전 포장만 바꿔서 거짓말로 파는 비양심적인 행위는

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삼국사기에서 가져왔다고 밝히며

김부식님의 사론,생각들은 <김부식> 이런식으로 해서

항상 써왔습니다 


언젠간 저가 쏟은 정성들이 더 빛을 발하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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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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