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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리주를 설치한 문무왕>


그렇게 문무왕은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답장을 한 편지인 '답설인귀서'를 보내

당나라를 회유하고 신라의 사정을 호소하려 했고

그 다음 기록에는,,


문무왕 11년 (671년)


소부리주 所夫里州 (백제 멸망후 백제 수도였던

부여에 설치한 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문무왕>하루라도 빨리 옛 백제지역을 점거하라 !


9월

당나라 장군 고간 등이 번병 蕃兵 (중국군을 한병 漢兵 이라 했으니

번병은 지방군이나 이민족으로 편성된 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대방을 침범했습니다


10월 6일 겨울

당나라 수송선 70여 척을 공격해서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백여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급찬 당천의 공로가 제일이었으므로

사찬의 직위를 주었습니다


문무왕 12년 (672년)

정월(1월) 봄

문무왕이 장수를 보내서 백제 고성성을 공격해서 승리했습니다


2월

백제 가림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7월 가을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이근행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동시에 평양에 와서

여덟 개의 군영을 짓고 주둔했습니다


8월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 부흥군이 지키던 평양 근처의)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해서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군대를 진군시켜 백수성으로부터 

5백여 보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했습니다


우리(신라) 군사와 고구려 (부흥군) 군사가

그들(당나라 군)과 결전을 벌여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신라,고구려 연합군>만세 ! 만세 !


고보(간) 등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여

석문 石門 에서 전투를 벌였는데(석문 전투)

우리(신라, 고구려 연합군) 병사가 패배하고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 사찬 산세,

아찬 능신, 아찬 두선, 일길찬 안나함, 일길찬 양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당시 김유신 장군의 아들 김원술도 이 전투에 참전했는데

싸우다 죽으려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겨우 살아왔는데

문무왕은 이를 용서했지만

김유신 장군은 아들이 죽지 않고 도망쳐왔다는 죄를 물어

의절을 선언합니다 매정해 보이나 당대 신라 지휘부, 귀족 자제들이

수많은 전쟁에서 전사하는 상황에서

신라에서는 극도로 상무적인 기풍이 생겨났었고

김유신 장군 역시 그런 분위기에서

아들을 내치지 않을 수도 없었던 상황이라고도 이야기됩니다)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으니 둘레가 4천 3백 60보였습니다


<문무왕이 당나라에 보낸 *표>


(*표 表 품고있던 생각을 황제께 올리는 글)


9월

혜성이 일곱 번 북방에 나타났습니다

얼마 전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빌려 우리를 침략하자

문무왕은 사세가 급박해서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출병해서 이를 토벌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조정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 내마 변산과 억류했던 병선낭장 겸이대후,

내주 사마 왕예, 본열주 장사 왕익, 웅주 도독부 사마 예군,

증산 사마 법총과 군사 1백 70명을 당나라에 보내면서

청죄하는 다음과 같은

 표 表 (품고있던 생각을 황제께 올리는 글) 를 올렸습니다


<문무왕이 보낸 글>저(문무왕 김법민)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드립니다


예전에 제가 위급하여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을 때

먼 곳에서 와서 구원해주어 제가 멸망을 면했습니다


그러하니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도

그 크나큰 은혜에 보답하기가 부족할 것이며

머리를 부수어 재와 먼지가 되더라도

어찌 그 자비의 덕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철천지 원수 백제는

우리의 변경을 핍박하고

황제에게 청병하여 우리를 멸망시키고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파멸이 두려워 우리의 생존을 추구하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취급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은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일을 저지른 의도를 말하지 않은 채

먼저 형벌을 당한다면

살아서는 명령을 거역한 신하가 될 것이요

죽어서는 은혜를 배반한 귀신이 될까 염려되어

삼가 사실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 들어 주시고

근본적인 사유를 밝게 살펴주기를 원합니다


저는 선대 이래로 조공을 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근자에 백제 때문에 조공을 두 번 조공을 하지 않아

마침내 황제의 조정에 의론을 일으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저의 죄를 성토하게 하였으니

죽은 후에도 받아야 할 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요

포야산의 나무도 저의 착고(죄인 발목에 채우는 틀)를 만드는 데

부족할 것이니


종묘와 사직을 연못으로 만들고

저를 죽여 몸을 찢어 버리더라도 

이 사정을 듣고나서 친히 판단하여 주신다면

기꺼이 형벌을 받겠습니다


저는 부왕(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관과 상여를 옆에 두고

머리의 진흙이 마르지 않은 채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며 삼가 형벌에 관한 명령을 듣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의 밝음이 해와 달 같아서

그 광명이 세상 어느 곳에나 골고루 비치며

덕은 천지와 같아서

동식물이 모두 그 덕으로 자라나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멀리 곤충에게도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마음은

날짐승과 물고기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만일 용서를 내려 머리와 허리를 베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가 죽어야 하는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로 변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어려우나 감히 생각한 바를 아뢰옵자니

황공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글을 올려 사죄하며

엎드려 칙명을 듣고자 합니다


황송하고 황송하여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신라왕 김법민-


이와 동시에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소의 담낭,담관에 염증으로 생긴

결석을 건조시켜 만든 약재) 1백 20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했습니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습니다


<당나라 조정 대신 1>특이하군,,

얘네는 싸우자는거야 조공하겠다는 거야 ?


<당나라 조정 대신 2>음 사실 신라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지,,

딱히 우리의 위협세력은 아닌거 같은데 ?


<라봉봉>나당전쟁은 한국 고구려와 중국 수,당과의 결전같이

아시아의 패권과 국운을 건 결전적 모습을 띄었다기 보다는

신라의 자기방어적 목적의 수비전 양식의 모습을 보였으며

신라인들 역시 당나라라는 초강대국 앞에서

백제 영역을 찾아 나서며 전투를 벌이되 계속해서

외교적 방식으로 당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고

상당히 똑똑한 처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라에게도 나당전쟁은 큰 부담과 무리로 다가왔고

문무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와 진상품 바로 다음기록이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수많은 조공물자를 마련하는 등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옛 백제지역에 대한 권리,

나당동맹 약조이행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례를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준비한다는 

'화전양면전술'의 대표적인 예라고도 이야기 하나

정말 신라는 나당동맹으로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도

아무런 이익도 없던 억울한 입장이었고

화전양면전술은 보통 고구려에서 사용했다 생각되고

화전양면전술이라기 보다는 정말 약속이행과 신라의

부당함을 알리며 또 군사적으로도 백제 영토를 점거해나가는

모습이라고 생각되고


다시 문무왕의 표 이야기로 돌아가서,,

당 황제에게 보내는 문무왕의 이 편지의 글들이

상당히 화려한 수사로 가득차

인상적인데 

사대적인 모습, 아부하는 듯한 느낌도 있고

이런 모습들이 역사에서는 우리 역사지만 빠짐없이 기록되있기에

비록 비굴한 기록이라 생각될 수 도 있으나

신라인들의 수장으로서 신라, 한국인들의 생명 보호라는

엄중한 책무가 있던 문무왕으로서는

비록 사대적인 모습이었음에도 안보를 지키기 위해 노력을 했던

모습이라 볼 수도 있는거 같으며

상당히 사대주의, 아부가 극도로 화려해서 예술의 경지까지 갔다는

느낌이 있는데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성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는 연애편지의

경지까지 갔다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나라와 국민, 자국 이익 보호를 위한 문무왕의

큰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했기에

영광의 시기로 이야기 되나

과정적으로는 당대 신라인들 역시 초강대국 당나라에 대한

큰 두려움, 위기감등이

보이는 글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도 

싸움에 있어서 물러남이 없는 신라 화랑의 세속오계 정신인

임전무퇴 臨戰無退 정신으로 군사적, 외교적으로

위기를 타파해 나가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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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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