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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전에>글을 거의다 쓰고날때 안 사실인데

현재 폐에 약간의 염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거 같고

아닐 수도 있고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몇달전까지는 건강했는데 최근 몸이 급격히 안좋아지고

입원도 했고 병원을 여러차례 다녀왔는데도 안좋은 상태였고

가슴통증으로 호흡곤란도 왔고

30일정도동안 코피만 40번정도를 흘린거 같습니다

현재 통제력도 떨어지고 정신도 되게 불안하고 오락가락합니다,,


앞으로 글을 언제 올릴지도 모르겠고

몸,정신 건강에 집중해야겠습니다,,

저도 아프면서까지 무리하면서 일하거나 글은 안쓰고 또 못쓰고

앞으로는 진짜 언제 올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보다 건강해지면 글을 많이많이 써야될거 같습니다,,

솔직히 현재 너무나 억울하고 서럽습니다 정말로요,,


<김유신 장군의 죽음>


문무왕 13년

정월(1월) 봄

큰 별이 황룡사에 떨어지고

재성 在城 (도성) 에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강수(신라 지식인)를 사찬(신라 8등벼슬)으로 임명하고

해마다 벼 2백 석을 주기로 했습니다


2월

서형산성을 증축했습니다


6월 여름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자 잡아 죽였습니다


7월 1일 가을

김유신 장군이 사망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사망할 당시

직접 행차해 문병 온 문무왕에게 말했습니다

 

<김유신>신 臣 (신하) 이 모든 힘을 다하여

원수 元首 (으뜸 머리, 국가 최고 지도자) 를

모시려 하였으나

소신의 몸에 병이 들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이후로 다시는 용안 龍顔 (용의 얼굴, 임금의얼굴을

높여 부르는 말) 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대왕(문무왕)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문무왕>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았오


만일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사직을 어떻게 하리오 ?


김유신 장군이 대답했습니다


<김유신>신이 우둔하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에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오직 다행스럽게도

현명하신 임금께서 의심없이 등용하였고

의심없이 임무를 맡겼기에

대왕의 밝은 덕에 힘입어

약간의 공로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 三韓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일컷는 말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 大韓民國 의

어원이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집안이 되고


(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라는 표현은

당대 신라인들의 삼한일통, 삼국통일 의식과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같은 한 韓 인 이라는

민족의식을 볼 수 있는 김유신 장군의 표현입니다

실제 삼국인들은 뿌리가 같거나 조선[고조선]의

후예이고 오늘날 한국인들에게는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의

피가 흐릅니다)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무사하다고 할 수 없으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을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못하는 일이 없지만

유종의 미(어떤 일 따위의 끝을 잘 마무리하는 성과) 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데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수성 守成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지켜 나아감) 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 (無窮 없을 무, 다할 궁 자로

영원하여 다함이 없음, 공간이나 시간 따위의 끝이 없음을

뜻하는 말) 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문무왕이 울면서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신라인들>장군 !! 우리는 어찌하고 가시는 것이옵니까 ?


그렇게 삼한일통의 주역이자 신라인들에게는

전설적인 존재였으며

한국사의 위인인 김유신 장군은 사망하였고

문무왕 7월 1일 가을

김유신 장군 사망 바로 아래기록에는,,


아찬(신라 6등벼슬) 대토가 모반해서 당나라에 붙으려다가

사건이 누설되어 사형을 받았으며

처자(아내와 자식)는 천인(노비)에 편입되었습니다


8월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임명했습니다


사열산성을 증축했습니다


9월

국원성


<김부식>예전의 난완성


북형산성, 소문성, 이산성, 수약주의 주양성


<김부식>혹은 질암성


달함군의 주잠성, 거열주의 만흥사산성

십량주의 골쟁현성을 쌓았습니다


문무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수비하게 했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말갈, 거란 군사와 함께 와서

(신라) 북쪽 변경을 침범했는데

아홉 번 전투에서

우리(신라) 군사가 승리하였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당나라군들>김유신 없는 신라군은

약할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으악 ~~


호로, 왕봉 두 강에 빠져

죽은 당나라 군사가 이루 셀 수 없었습니다


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습니다

거란과 말갈 군사가 대양성과 동자성을 쳐서

멸망시켰습니다


처음으로 주에 2인(합 18인) , 군에 1인(합 115인)의

외사정 外司正 (지방관의 비행을 감찰하는 관직)을 두었습니다

(외사정의 총정원은 133명)


애초에 태종왕(태종 무열왕, 문무왕의 아버지) 이

백제를 멸하고 수비하는 군사를 없앴던 것을

이 때 다시 두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이 야전인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군에게 패배하고

성안에서의 방어전위주로 갔듯이

신라인들도 석문전투에서 패배하고 방어전위주로 가며

당나라에 사죄하는 서신을 보내는 등의 '화전양면전술'을

구사해갔다고 합니다

당나라는 다른 중국왕조들과 달리 유목민족인 선비족 계열이

세운 국가였고 실질적인 당나라 건국자였던 당태종 이세민은

유목민족과 대결하며 그들의 노하우를 습득했기에

야전에서 매우 강력했다 할 수 있고 또 신라군은 고구려와 달리

중국 군대를 상대로 싸워 축적된 경험이 별로 없었기에

패배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애초에

당나라와의 패권, 자존심 싸움이었다기 보다는

신라의 독립적 지위, 약속과 다른 당나라의 입장에 대한 백제영역의 확보가

큰 목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기에 문무왕의 편지가

사죄의 의미라기보다도

부당함을 알리는 목적이 드러나 있어서

화전양면전술이라고만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봉한 당고종>


문무왕 14년

정월(1월) 봄

당나라에 갔던 숙위(옛날 궁궐에서 군주를 호위하며

지키는 사람들을 뜻하나 여기서는 당나라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주변 여러나라 사람들의 직책) 대내마(=대나마, 신라 10등벼슬)

덕복전이 역술(달력, 천문, 기상학등이라 보면됩니다) 을 배우고 돌아와

그 때까지 사용하던 역법(달력)을 새 역법으로 고쳐서 사용했습니다


당나라에 반기를 든 고구려 백성들을 문무왕이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해서

관리로 하여금 수비하게 했습니다


당고종이 크게 노해서

조서를 내려 문무왕의 관작을 없애고

당나라에 있던 문무왕의 아우(동생)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김인문은 신라의 대당전문 외교관이었다고 할 수 있고

당고종이 김인문을 매우 좋아했다고 하고 당나라와 친했던 인물인데

당나라의 신라 분열을 목적으로 한 이간책이었으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 역시 당나라와 친한것과 별개로

신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있었고

간곡히 사양했으나 신라에 어쩔 수 없이 보내졌는데

이런 당나라의 의도에

말려들어가지 않고 왕위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았고

문무왕 역시 동생 김인문의 입장을 이해하고

별달리 의심하지도 않아 그럭저럭 넘어갔다고 합니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당나라에 이간되어 분열해 싸운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들입니다)


좌서자 동중서문하 3품 유인궤를

계림 방면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 대장군 이근행을 부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해왔습니다


2월

대궐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습니다


7월

큰 바람이 불어서 황룡사 불전이 훼손되었습니다


8월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했습니다


9월

의안 법사를 대서성 大書省 (왕의 자문의 응하는 신라 승관직) 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했습니다


<김부식> (문무왕) 10년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두 번째 봉하였으니

보덕 報德 (용어로 보면 남의 은덕을 갚음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이 귀명 歸命 (부처를 깊이 믿는다는 뜻) 등과

같이 불교적 용어인지 아니면

지명인지 알 수 없다


(신라에게 보덕국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들을 옛 백제땅에 옮겨 만든

괴뢰국[특정 나라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국가,

예를들면 일제강점기 일제의 조종을 받은 만주국]정도 였기에

실제 보덕국의 이름은 신라에게 큰 의미는 없다고 합니다)


문무왕이 영묘사 앞길에 나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신라 6등벼슬) 설수진의 육진병법(6개의 꽃잎모양으로

진을 이뤄 사방의 적에 대응할 수 있는 병법) 을 관람했습니다


<라봉봉>중간중간에 이야기는 썼고

당시 나당전쟁 시기를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며

당대 신라는 김유신 장군의 사망이라는 큰 타격이 있었음에도

신라인들은 불굴의 의지, 신라 화랑의 세속오계인

싸움에 있어서는 물러섬이 없다는 '임전무퇴 臨戰無退 ' 정신으로

당나라의 야욕에 맞섰고 한국의 역사는 당대 신라에 의해

삼한이라 불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하나가 되어 삼국통일을 이루어

하나의 통일국가가 형성됬고 이후 신라는 고려, 고려는 조선으로 계승되다

조선은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일제에 병탄되고

이후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북한 [분단상태의 한국])으로 계승된 것 입니다


어려운 상황, 거대 통일제국 당나라에 맞서야 했던

당대 신라인들의 공포감, 두려움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이나 조지오웰의 1984 ,안중근 의사 등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당나라의 회유에도 엄중하게 대처하거나

단결된 모습을 보였고 또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통합하여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한국인들의 전설적인 시기로 이야기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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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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