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이야기때 못쓴 글>나당전쟁 기간 당시
김유신 장군의 사망이 있었는데
이는 신라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었으나
그럼에도 큰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당시 신라 내부의 국력이 건실한 편이어서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역사에서는 큰 인물이 죽고나서 얼마후 멸망하거나
빠르게 분열된 나라들도 많다고도 할 수 있는데
신라가 야비하게 당나라와 손을잡고 나라를 팔았다거나 하는
인식들도 있으나 실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뤄냈던 근본적인 힘은
튼튼한 국력과 선진적인 시스템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미 삼국통일 직전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더 앞서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또 문무왕대 아찬 설수진이 개발했다는 '육진병법 六陣兵法 '은
제갈량의 팔진도가 생각나는데
신라는 당과의 결전을 하며 새로운 군사기술의 도입이 필요했고
이에 도입된 진법 陣法 이라 할 수 있다고 하고
군사들이 여섯개의 원을 만들어 꽃의 형상을 띄고있어서
육화진법이라고도 이야기 되는거 같고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진법이라 하면
조선 이순신 장군의 배를 일렬로 펼쳐서 포위 섬멸하는
'학익진'이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겠는데 실제 학익진 같은 경우는
군사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전술이라 할 수 있는
'망치와 모루(망치 받침대)' 즉 오늘날 표현으로 '쌈싸먹기' 식 전략이라 할 수 있고
망치와 모루전술, 학익진 같은 포위 전술은
높은 숙련도, 상대방에 대한 우위성이 필요하고
상당히 공격적인데에 비하여
문무왕은 거대제국 당나라를 상대해야 했다는 것이나
당시 신라인들도 오랜 전쟁으로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는 점도 있었고
그의 시호같이 문,무 양쪽에 균형을 맞춘 것처럼 이런 공격적인 전략보다는
상당히 안정성을 추구한 인물같고 육진병법은
그의 성향이 나타난 진법이라 할 수 있어보입니다
<육진병법(육화진법) 은 학익진과 대조되는 상당히 방어적인 진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문무왕의 이야기입니다,,
문무왕 15년
정월(1월) 봄
모든 관청과 주와 군의 인장 印 (도장,관인)을
구리로 주조하여 나누어 주었습니다
2월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우리나라(신라)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했습니다
유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니
당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당나라 장수)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그 곳 일을 처리하게 했습니다
문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한 사죄하니
당황제가 이를 용서하고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귀국하던 김인문(문무왕의 친동생, 태종 무열왕의 둘째아들이자 신라 외교관)이
당나라로 돌아가자
그를 임해군공으로 바꾸어 봉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아 마침내 국경이 고구려 남쪽지방에 이르렀고
그 곳을 주와 군으로 만들었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군 九軍 (천자[황제]의 군대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신라군을 의미하고 있고
신라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신라가 밖으로는 왕이라 하나 내부적으로는 황제라 하는
외왕내제적 성격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을 출동시켜서 이에 대비했습니다
9월 가을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숙위(황제를 모시는 직) 학생 김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신라)에서 사형을 당했다고 하여
(김진주는 거짓으로 병을 핑계대고 방탕해서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하고
이에 문무왕이 사형시킵니다,, 오늘날 식으로라면 근무태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을 빌미로 해서 김풍훈을 향도(길잡이 즉 앞잡이)로 삼아 백수성을 공격했습니다
우리 장군 문훈(성은 김씨 같습니다) 등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1천 4백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병선 40석을 빼앗았습니다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퇴각하자
우리는 전마 戰馬 (전쟁에서 쓰는 말) 1천 필을 얻었습니다
29일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 買肖城 (매초성이라고도 합니다) 에 주둔하자
우리군사(신라군)가 그들을 격퇴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3만 3천 80필의 전마와 그 이외에 이에 상당하는 병기도 얻었습니다
<매소성 전투 민족기록화, 전쟁기념관>
<신라군>대신라국 大新羅國 만세 ! 삼한 三韓 만세 !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습니다(문무왕의 화전양면 전술[혼란책])
안북하를 따라 관문과 성을 건설하고 또 철관성을 쌓았습니다
말갈이 아달성에 들어와서 약탈을 시작하자
성주 소나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소수 小守 (신라 지방관직, 군태수[군수]와 현령의 중간위치라고 합니다) 유동이 전사했습니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또 석현성을 포위하고 이를 점령하려 하자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전력을 기울여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천 47명의 머리를 베고 2백 필의 전마를 얻었습니다
<라봉봉>매소성 전투는 신라군의 대승이자 한국사 나당전쟁 시기의
기벌포 해전과 더불어 야전(지상전)에서의 대표적인 전투라 할 수 있으며
매소성 전투때의 당나라 군사의 병력은 한국, 삼국사기 기록은 20만이고
중국측 기록으로는 4만이라 하며 중국 기록으로는 20만은 나당전쟁에 파견 된
당군의 총 병력이고 매소성 전투 당시에 참여한 병력은 4만정도라 하고
이에 신라인들은 매소성 전투 대승으로 상징적으로 20만으로 기록해 놓았다고도
추측이 되고 있다하며 이는 굳이 숫자적인 문제를 떠나서
당대 이 전투를 기점으로 신라는 수많은 전략물자들을
노획 鹵獲 (싸워서 적의 물품을 빼앗음) 하게 되고
나당전쟁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할 수 있는
한국사 전설적인 전투라 할 수 있습니다
매소성 전투로 20만의 당군은 신라군의 공격에 쫒겨
임진강변의 칠중성으로 달아났고
신라군은 3만여 필의 말, 3만여 개의 병장기를 얻었다고 할 수 있고
매소성 근처에 '말무덤'이라는 당나라 말들을 묻었다는 곳이 있나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올 정도니 엄청난 대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매소성 전투로 나당전쟁이 완전하게 끝나거나 하는 결과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나당전쟁 당시 신라가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는 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고
오늘날에도 나당전쟁의 매소성 전투는 기벌포 해전과 더불어 전설적인 승리라 이야기되고
특히나 야전(지상전)에서 강했던 유목민족 선비족 계열의 당나라였는데
매소성 전투는 그만큼 큰 의미가 있는 한국사 전설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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