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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에 편지에 답한 신라 문무왕의 편지, 답설인귀서>


그렇게 당나라 장수 설인귀는 신라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에 문무왕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문무왕의 답장>선왕께서 정관(당태종 이세민의 호) 22년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당태종 이세민)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으니

그 조칙에는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매번 침해를 받아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련히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도 토지도 내가 탐하는 것이 아니며

재물도 자녀도 모두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


고 하면서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의 동원 기일을 정하여 주었다


신라 백성들이 모두 이 은혜로운 조칙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동원되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대업이 끝나기도 전에

문제(당태종 이세민)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 황제가 위(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선대 황제의 은혜가 이어져

더욱 자주 은덕을 입음이

지난 날보다 더한 점이 있었다


나의 형제와 아들이 귀한 선물과 관직을 받았고

영광스러운 총애는 지극하였으니

이는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에 따라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지도록

시키는 일을 다하려 하였으며

비록 우리의 간과 뇌가 평원을 덮더라도

은혜의 만분지 일이나마 보답코자 하였다


현경(당 고종의 연호) 5년에

황제는 선대 황제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으니

전일에 남겨 둔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전함을 띄우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대부대의 수군을 동원하였다


당시 무열왕(문무왕의 아버지 태종 무열왕 김춘추)께서는 늙고 힘이 없어

행군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예전의 은혜를 추모하는 감정으로 억지로 국경까지 나왔으며

나(문무왕)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귀국의 군대를 영접하게 하였다


동서가 호응하며

수륙 양군이 함께 진격하여 (나당 연합군)

수군(당나라 수군)은 겨우 강 어구에 들어올 즈음

육군(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육군)은

 이미 대부대의 적군(백제 계백의 5천군)을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두 나라 군사가 함께 백제의 수도에 이르러

백제 전국을 평정하였다


평정 후에

선왕(태종 무열왕)은 소정방 대총관과 함께 뒷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당나라 군사 1만을 머물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에게

군사 7천을 주어

그들과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적의 신하 복신(백제 부흥군 귀실복신)이 강의 서쪽 지방에서 봉기하여

백제의 유민을 모아

부성(사비성)을 포위했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부수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상황이 되었다


또한 부성(사비성) 부근 네 곳에 성을 쌓아

부성을 포위한 채 수비하고 있으므로

부성에 출입할 수 없었다


이 때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포위를 풀고

사면의 적의 성을 한꺼번에 모두 격파하여

우선 그들의 위급함을 구원하였고

다시 군량을 수송하여 마침내 1만 명의 당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범의 아가리에 든 위험을 면하게 하였으며


그곳에 남아 수비하던 굶주린 군사들로 하여금

자식을 바꾸어 잡아 먹는 참상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 徒黨 (떼를 지은 무리, 불순한 사람의 무리) 이 점점 증가하여

강의 동쪽 땅을 침탈하였으므로

웅진의 당나라 군사 1천 명이

가서 적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적에게 격파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 웅진으로부터 구원병의 요청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그 당시 신라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군마를 징발할 수가 없었으나

그들의 애타는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파견하여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나와 공격하여

우리의 군마는 크게 손상 당했고

결국 우리는 승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쪽 지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키고

복신에게 복속하니 복신이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따라 웅진으로 가는 길이 즉시 차단되어

소금과 된장이 떨어졌으므로

건장한 청년들을 모집하여 다른 길로 몰래 소금을 보내

곤핍해진 그들을 구원하였다


6월에 이르러 선왕이 돌아가시자

(661년 음력 6월 59세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 사망)


장례를 겨우 끝냈는데

상복도 미쳐 벗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군사를 웅진으로 보내지 못했던 바

황제의 칙서가 내려 군사를 북방으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 때, 함자도 총관 유덕민 등이 왔는데

그들은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운반하게 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하였다


이 때

웅진에서 사람을 보내와

부성(사비성)이 고립되어 위태롭다는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유 총관이 나와 함께 일을 처리하면서

스스로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 길이 차단될 것이오,

웅진 길이 차단된다면

그 곳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 군사가 바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걱정된다'


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유총관은 드디어 나(문무왕)와 동행하여

우선 옹산성을 공격하였다


옹산을 점령하고

이어 웅진에 성을 쌓고 웅진 길을 개통시켰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모두 소진되었다

그러나 먼저 웅진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칙령을 어긴다는 문제가 있었고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의 군량이 끊길 것이 염려 되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노약자를 시켜 웅진으로 군량을 운반하고,

건장한 장병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웅진으로의 군량 수송 도중에 눈이 내려 사람과 말이 모두 죽어서

백 명에 한 명도 살아 돌아 오지 못하였다


용삭(당고종의 연호2년 정월 유총관이 신라 양하도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보냈다


이 때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계속 내리고

눈과 바람으로 날씨가 몹시 추웠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동상을 입어

가진 장병과 군량을 전할 수 없었다

평양의 당나라 군사들은 귀국을 원했다

신라 군사들도 양식이 떨어져 역시 귀환하였다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손발에 동상이 걸려 도중에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행군이 호로하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가 뒤를 따라와 언덕에 진을 쳤다

신라 군사들은 오래도록 피곤한 상황이었으나

적이 멀리까지 따라 올까 염려하여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가서 접전을 벌였는데

선봉대가 잠시 교전하는 사이에 적이 와해되고 말았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 온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못되어

웅진 부성에서는 여러 차례 곡식을 요청하였다

이 때 앞뒤에 보낸 곡식이 수만여 곡이었다


이와 같이 남으로는 웅진,

북으로는 평양으로

 작은 나라인 신라가 두 군데나 공급을 하고 보니


인력은 극도로 피로하고 소와 말은 모두 죽었으며

농사 지을 시기를 놓쳐서 흉년이 들고

저축해 두었던 창고의 양식은

두 지역의 수송으로 모두 없어졌으므로

신라의 백성들에게는 풀뿌리도 모자랐는데

웅진에 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는 식량이 남아 돌았다


또한 진에 주둔하는 당나라 군사(원문은 한병 漢兵 ) 들은

집 떠난 지가 오래되어 옷이 헤어져

몸에 걸칠 성한 의복이 없었다

이에 따라 신라에서는 백성들을 독려하여 철에 맞는 의복을 지어 보냈다


도호 유인원(당나라 장수)은 멀리 고립된 성을 수비하는데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포위를 당하였으므로

언제나 신라의 구원을 받았다


1만명의 당나라 군사가 4년동안 신라의 식량을 먹고

신라의 의복을 입었으니


유인원 이하 모든 (당나라) 병사들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 땅에서 났으나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었다 (문무왕의 표현력,,)


당나라의 은택이 비록 대단하다고 하지만

신라가 바친 충성도 또한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용삭(당고종의 연호) 3년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의 병마도 역시 참여하여 행군이 주류성에 이르렀었다


이 때 왜국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돕게 되어

왜선 일천 척이 백강에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가에서 배를 수비하고 있었다(백강 전투)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당나라 군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가의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은 사기를 잃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남쪽 지방(백제)이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방(고구려)을 치는데

(백제 지역의) 임존성 한 곳이 미혹하게도 항복하지

이에 따라 두 군대(나당 연합군)가 협력하여

그 성을 함께 공격하였으나 

그들이 성을 굳게 수비하고 강력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없었다

신라는 즉시 회군하고자 하였으나

두대부가 


'칙령에 의하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는

모두가 함께 맹약을 하게 되어 있으니

임존성 하나가 비록 항복하지 않았더라도

모두 모여 맹약을 해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신라는 칙령대로라면


'완전한 평정 旣平'


이후에 맹약의 회합을 가져야 하며

임존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평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신라는 또한 백제는 모든 행동이 간사하여

향후의 행동 변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지금 비록 함께 모여 맹약을 하더라도

뒤에 가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 염려되므로

맹약을 하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주청하였다


인덕 원년(인덕은 당고종의 세번째 연호, 원년은 첫번째 년으로

인덕 원년은 664년) 에 다시 엄한 칙령이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질책하였으므로

나(문무왕)는 즉시 사신을 웅령으로 파견하여

제단에 쌓아놓고 모두 함께 모여 맹약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맹약을 한 지역을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맹약의 행사는 비록 우리가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령을 어길 수 없어 행한 것이었다


또한 다시 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칙사 유인원과 마주하여 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산하를 두고 맹약하였는데

맹약의 내용은 경계를 확정하고 봉토를 쌓아서

이를 영원한 국토로 삼아

백성들이 거주하고 저마다 생업을 경영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건봉 2년에

대총관 영국공(당나라 장수 이적[이세적])이 요동(고구려)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성주에 갔으며 그곳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에 집합하도록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들어가서는 안되겠기에

먼저 3회에 걸쳐 정탐을 보내고

배를 잇달아 보내 당나라 군사의 상황을 알아 보았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당나라 군사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


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을 공격하여 길을 열어놓고

당나라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의 사자인 강심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었는데

신라 군사가 반드시 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으니

평양으로 조속히 군대를 파견하여

병기와 군량을 공급하라는 대총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명령을 내려 군대를 모아 행군하여 수곡성에 당도하자

당나라 군사가 이미 회군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어

신라 군사도 그곳을 즉시 빠져 나왔다


건봉(당고종의 연호 3년 대감 김보가를 시켜 해로(바닷길)을 통하여

요동에 들어가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의 명령을 받아오도록 하였는데

그는 신라 군사를 평양에 집합시키라는 분부를 받아 왔다


5월에 이르러 유우상이 와서 신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다


나도 역시 한성주에 가서 군사들을 검열하였다

이 때 번군 한군 (번군은 번방의 군 즉 신라군을 겸손하게 부르는 말이며

한군은 중국 즉 당나라군의 의미 같습니다) 모두가 사수에 집결하니

(고구려 지도자) 남건(연남건,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도 출병하여 결전을 하고자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을 격파하니

평양 성중의 기세가 꺾였다


그 후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이 다시 신라의 정예 기병 5백명을 선발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신라 군사들이 모두


'정벌을 시작한지 9년이 이미지나 인력은 소진되었으나

마침내 두 나라(백제, 고구려)를 평정하여

누대에 걸친 소망을 오늘에야 이루었으니

나라는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은 것이요

백성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이 


'신라가 이전에 군사의 동원 기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반드시 조치를 해야 한다'


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어

신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나라 서울(수도)에 전달되었는데

기록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에는 아무런 공이 없다'


는 말이 나왔다


그 장군이 돌아오자 백성들의 공포심이 더하였다


또한 비열성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빼앗은지 30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회복하여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관리를 두어 수비했으나

당나라는 이 성을 다시 빼앗아 고구려에 돌려 주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할 때부터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바치고 힘을 다하여

당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가 있기에 하루 아침에 이렇게 신라를 저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라는 비록 이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배반할 마음은 없었다


총장(당고종의 연호) 원녀에 백제는 앞서 모여 맹약하였던 곳에서

경계를 옮기고 경계표시를 바꾸어 전지 田地 (논과 밭)를 침탈하였으며

우리의 노비들을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 내지로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 보내지 않았다


또한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 하면서

불안하게 지냈다


또한 백제 여자를 데려다가 신라의 한성 도독 박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어떤 한 주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다행히 일이 발각되어 즉시 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함형 원년(당고종의 연호로 원년[1년]은 670년) 6월

고구려가 모반하여 당나라 관리를 모두 죽였다


신라는 바로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반드시 함께 흉적凶賊 (흉악한 적)을 토벌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군사의 출동은 상호 토론을 해야할 문제이니

청컨대 관인(벼슬아치, 관리)을 이곳에 파견하여

함께 토벌을 계획하여 보자'


라고 하였는데

백제의 사마예군이 이곳에 와서 의논하는 중에 말하기를


'군사를 동원한 뒤에 서로가 의심할 수 있으니

응당 신라와 백제 두 편 관인(벼슬아치, 관리)을

상호 인질로 교환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유돈과 부성의 백제 주부 수미, 장귀 등을

부로 파견하여 인질 교환의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백제는 인질의 교환에 찬성하기는 하였으나

성 안에서는 여전히 병마를 모아 성 아래에 있다가

밤이 되면 나와서 공격을 했다


7월에 당나라에 갔던 사신 김흠순 등이 귀국하여

장차 경계를 확정 할 것인데


'지도에 의하여 백제의 옛 국토를 조사하여

백제의 국토는 백제로 돌려줄 것'


이라고 말했다

황하는 아직 마르고 않았고

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3,4년 사이에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모두 원래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실망하면서

아울러 이르기를


'신라와 백제는 누대에 걸친 철천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백년 이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하여 멸망될 것이다

신라는 원래 당나라의 한 지방이므로 두나라로 나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원컨대 이를 한 집안으로 만들어 영원히 후환을 없애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작년 9월에 이러한 사정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상주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바다에서 표류하여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역시 당나라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 후에는 바람이 차고 풍랑이 심하여

결국 상주를 올리지 못했다


백제는 거짓으로


'신라가 반역한다'


고 상주하였다


신라는 앞으로는 당나라 고관의 심정적 후원을 잃고

뒤로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어떻게 행동하든 언제나 질책만 당하였으므로

충성심을 보일 길이 없었다


황제는 이와 같은 참소를 날마다 들었으므로

변함 없는 충성을 한 번도 황제에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자 임윤이 전하는 편지를 보니

총관이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서 왔다하므로

도리상 사신을 교외에 파견하여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올려야만 할 것이나

다른 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영접을 못 한 것이니

청컨대 크게 탓하지 말라

총관의 편지를 보면 전적으로 신라가 반역을 한 것으로 취급되어 있으나

이는 본심이 아니었으니 걱정스럽고 놀랍고 두려운 심정이다

우리가 기울인 노력을 조목 조목 말하면 욕된 꾸지람이나 들을까 걱정되어

입을 다물고 질책을 받으려 하였으나

이리하면 또한 사정을 모르는 당나라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므로

이제 억울한 사정을 대략이라도 설명하여 우리가 반역할 뜻이 없었음을

상세하게 글로 쓰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나라는 사신 한명 보내어 근본적인 사유를 물은 적이 없다

수만의 군사를 파견하여 그리고 곧바로 우리의 터전을 뒤엎고자 했다

병선은 창해를 덮어 배의 수미가 강 어구에 줄을 이었고

저들 웅진(백제 세력)을 독촉하여 우리 신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아아 !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심부름을 시키더니

들짐승이 없어진 지금에는

도리어 삶아 먹히는 사냥개의 박해를 당하고 있도다

(사냥을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사자성어 토사구팽 兎死狗烹 과 일치하는 말입니다)


잔악한 백제는 오히려 옹치의 상(옹치 雍齒 는 한나라 고조가

옹치를 제후에 봉했다는 말 '옹치봉후'와 관련된 말로

미워하는 사람에게 요직을 맡겨 여러 장수의 불만을 무마시킨 계책을 뜻하는

의미입니다) 을 받고 

당나라에 희생당한 신라는 이미 정공 丁公 (정공은 초나라 항우의 장수로

한나라 고조가 싸움터에서 정공에게 애걸해서 목숨을 구했는데

훗날 한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정공이 한나라 고조를 뵈자

고조는 정공은 항우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다하지 않았고

항우가 천하를 잃게 한 자가 정공이며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된 사람들로 하여금

정공을 본받지 말도록 하라면서 정공을 베었다고 합니다,,)

의 죽음을 당하였도다


태양이 비치지 않건마는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오히려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총관은 영웅의 기상을 받고 태어났으며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재기를 갖추었고

일곱 가지 덕을 겸비하였으며

아홉가지 종류의 학술을 섭렵하였는데

삼가 천벌을 주는 데 있어

함부로 죄없는 자에게 죄를 주려 하는가


황제의 군대가 출동하기 이전에

그대는 먼저 그 근본 이유를 물었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보내는 편지를 계기로

우리가 배반하지 않은 사정을 설명하노니


청컨대 총관은 깊이 생각하여 

실상을 정리하여 황제께 상주하라


계림주대도독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상주국

신라왕 김법민이 말하노라 


<라봉봉>그렇게 신라 문무왕은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신라에 대한 당나라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편지를 상당한 명문으로 보냈고

이는 문무왕의 똑똑함을 알 수 있는 글인데

이 글을 '답당설총관인귀서'라고 하며

줄여서 '답설인귀서'라고도 합니다


답설인귀서는 혹은 당대 신라 지식인 강수가 썼다고도 하고

문무왕의 당대 당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깊은 고민과

머리를 쥐어짜내면서 쓴 글로 보입니다


신라는 당대 나당전쟁도 승리했고

당대의 시기를 신라 삼국통일기로 영광의 시기로 기억하나

문무왕 당대의 삼국통일전쟁은 백제,고구려,당나라와의 대결 할 거 없이

신라인들에게는 '총력전'의 양상을 띄고 있었고

'답설인귀서'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 신라인들도 노약자까지 동원했다거나

식량과 자원을 쥐어 짜내면서 신라군과 당나라군에 식량과 물자를 공급했다고 할 수 있고

당대 신라인들의 극심한 피로감, 고통들을 느낄 수 있는 글로

이는 중국 수나라와의 대결 당시 한국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여수장우중문시' 같은 명문이라 할 수 있고

이 '답설인귀서'가 명문으로 이야기 되는 이유는

당대 신라인들의 외교감각, 언어학적 수사만이 아닌

당대 '삼국통일전쟁', '나당전쟁'이라는 민족사의 큰 흐름이 바뀌던 순간에

큰 흐름을 바뀌는 계기가 되게 했던 글이었기 때문이고

당대 신라인들 역시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와의 싸움은 큰 무리가 가는 일이었기에

당나라에게 최대한 굽히며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이었다고 할 수 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라인들은 이성적 사고관을 잃지 않고

조리있고 일목요연하게 장문의 글에 당이 약속을 위반한 것을 정리하여 쓴 글이고

또 결국 신라 역시 당나라의 부당한 침해에서 당세력을 공격할때의

통보문적 모습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당에 대한 충성심, 사대주의적 표현도 있으나

당대 당나라라는 초강대국에 맞선 당나라에 비해서는 소국이었던

신라인들의 당나라에 대한 회유와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당당한 모습이

같이 나타나는 글이라 할 수 있고 상당한 명문이며 이 글로 인해

당나라 역시 신라가 위협세력이 아닌 약속 이행, 자국보호적 목적으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음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대의 위기의상황에서 외교적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라 할 수 있으며

한국사의 명장면이자 고려 서희의 담판같은

'외교로 나라를 구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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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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