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신문왕의 성대한 결혼식>


신문왕 2년

정월(1월) 봄

신문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습니다


4월 여름

위화부령 位和府令 (위화부의 장관급 관직,

위화부는 신료 위계,인사 담당 관청)

2인을 두어 관리의 선발과 추천을 맡게 했습니다


5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습니다


6월

국학을 세우고

경 卿 1인을 두었습니다


또 공장부감 工匠府監 (공장부 장관. 사묘[사당, 묘] 공사를 맡던 관청으로

추측) 1인과

채전감 彩典監 (채전은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1인을 두었습니다


신문왕 3년

2월 봄

순지를 중시(오늘날 국무총리격)로 임명했습니다


<신문왕>앞으로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집사부 중시의 권한을 강화시켜야겠군,,


(신라의 최고위직은 보통 3개 정도가 있는데

이벌찬[=각간, 신라 1등벼슬] ,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

그리고 집사부 중시(=시중) 였고

성향적으로는 왕과 가까운 순으로는 중시, 이벌찬, 상대등이 아닐까 싶고

신문왕때에는 신문왕의 무자비한 왕권강화정책으로

귀족들의 수장직인 '상대등'이 아닌

왕이 직접 임명하는 '중시'의 권환이 막강해졌고

이후 다시 신라에서 왕권이 약화되자 상대등의 권한이 강화되기도 했고

신라사에서 중시의 '권한이 강할때는 왕권이 강했다' 라고 해석할 수 있고

반대로 중시가 아닌 '상대등의 권한이 강할때는 왕권이 약했다'

라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신문왕은

일길찬(신라 7등벼슬)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삼기로하고

먼저 이찬(신라 2등벼슬) 문영과 파진찬(신라 4등벼슬) 삼광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신라 5등벼슬) 지상을 보내

납채 納采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사람을 보내

혼인의 뜻을 전달하고 여자의 집에서 받아들이면

받아들인다는 것을 하는 의식을 한다는데 이게 납채라 합니다,,)를 했는데


폐백(예물)이 열다섯 수레,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얇게 핀 고기) , 식해 食醢 (생선 젓갈)

1백 35수레,

벼가 1백 50수레 였습니다


4월 여름

평지에 눈이 한 자(당나라 기준 24.5cm) 쌓였습니다


5월 7일

이찬(신라 2등벼슬) 문영과 개원을 김흠운의 집에 보내

그녀(김흠운의 딸)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그 날 묘시에

파진찬(신라 4등벼슬)인 대상과 손문 ,

아찬(신라 6등벼슬) 좌야와 길숙 등으로 하여금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과

이 밖에 양과 사량 두 부의 여자

각 30명씩을 데리고 가서 부인을 맞아오게 했습니다

부인이 수레에 탔는데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한로 따르는 부녀들의 모습이 성대했습니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갔습니다


<신라인들>으 으리으리 한 결혼식이구만,,


<라봉봉>통일신라 초기의 문무왕과 신문왕은 이런식으로

왕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던거 같습니다

또 당시 김흠운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는데

왕후는 김흠운과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결국 왕실 근친혼쪽입니다,,

일부로 이런 집안의 여인을 왕후로 앉혀

외척의 발호를 극도로 경계한거 같고

결혼때 보내진 신하 개원, 삼광, 문영은

개원은 태종 무열왕의 아들,

삼광은 김유신 장군의 아들,

문영은 김유신 장군 심복출신이라

왕권에 밀착한 인물들이었고

이 결혼 자체가 귀족들에 대한 왕권 과시목적과

신문왕의 전제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외척 이외에도 신하들의 발호에 대한 극심한 알레르기가

있었던 신문왕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신문왕의 왕후가 되는 신목왕후는 김흠운과

요석공주의 딸인데 여기서 요석공주는 승려 원효대사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인물로 남편 김흠운이 일찍 죽자 재가해서

원효대사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인물로

그런 집안의 여인과 결혼한 신문왕이었고

나름 여인의 재가가 허용되는

신라 사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요석공주는 신문왕의 할아버지 김춘추의 딸이었고

요석공주의 딸과 결혼한 신문왕으로 역시 신라 왕가에 잦았던 근친혼과

권력 유지 목적을 위한 신라사회의 극단적 폐쇄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보덕국의 멸망>


신문왕 3년

10월 겨울

보덕왕(보덕국왕) 안승을 (신라 수도 금성[경주]로) 불러

소판 蘇判 (=잡찬, 신라 3등벼슬) 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려 서울(금성)에 머물게 했으며

좋은 집과 좋은 밭을 주었습니다


<신문왕>허허 오랜 전란을 겪으며 고생 많으셨소

앞으로 고구려 고 高 씨가 아닌 신라 김 金 씨 성으로 사시며

금성에서 편히 (반란 일으키지는 말고) 여생을 보내시오


<김안승>예 폐하 (음;;)


혜성이 오거 성좌에 나타났습니다


신문왕 4년

10월 겨울

저녁부터 새벽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날아 다녔습니다


11월

안승의 조카뻘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보덕국 자리,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됬습니다


잔적(남은 도둑)들이 대문의 처형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한 채 반역하므로

신문왕이 장병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토벌했는데

이 전투 중에 당주 幢主 (신라 무관직,

신라군 편성단위인 '당'을 통솔하던 군관) 핍실이 전사했습니다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지방(금마저,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에 옮겨 살게 했으며

그곳을 금마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신라에 의해 세워진 고구려 유민들이

옛 백제땅에 세운 괴뢰국가였던

보덕국은 멸망했고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 지역은

이로서 신라에 완전히 편입됩니다)


<김부식>대문을 혹은 실복이라고도 한다


<라봉봉>당시 보덕국지역에서 일어난

대문의 반란 이야기가 더 나와있는

'김영윤 열전'에서는 보덕국 반란진압때 투입된 신라의 부대는

지휘관은 김영윤이나 휘하는 옛 고구려인들로 편성된 부대인

황금서당 黃衿誓幢 이었다 하고 즉 고구려인의 반란을

고구려인으로 진압했고 이는 아마 신라가

당나라의 '이이제이, 오랑캐는 오랑캐로 친다' 전술에

영향을 받은거 같고 삼국통일을 하며 고구려인을

하나의 한 韓 민족으로 여겼음에도 또 이렇게 반란 진압때

고구려인을 보내 진압한 냉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 신라인 같고

혹은 고구려인들의 반란 기세가 심상치 않고

전투력이 강하고 용맹한 고구려인들이었기에

고구려인을 잘 알던 고구려인들을 보내 막는 신라의 정략적 판단

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용맹하고 지상전에서 강했던 고구려인들 답게

보덕국 지역의 반란진압 당시에는

동족상잔 同族相殘 (같은 겨례끼리 서로 해침)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승패를 떠나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