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의 죽음, 문무왕의 유언>
문무왕 21년
정월(1월) 봄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1일)
날씨가 종일 밤처럼 캄캄하게 어두웠습니다
사찬(신라 8등벼슬) 무선이 정병 精兵 (정예군) 3천을 거느리고
비열홀 比列忽 (함경남도 안변지역)을 지켰습니다
우사록관 右司祿館 (관리의 녹봉과 녹읍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을 두었습니다
5월 여름
지진이 있었습니다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습니다
6월
천구성이 서남방에 떨어졌습니다
문무왕이 서울을 새로 꾸미려고
승려 의상(의상대사)에게 물으니
의상대사는
<의상대사>비록 풀밭과 초막에 살지라도
바른 도를 실천한다면 복스러운 세업이 오래 갈 것이요,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비록 사람을 고생시켜 성을 만든다 할지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니
문무왕이 이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의상대사의 말은 굉장히 뼈가 있는 말로
훌륭한 승려였고
문무왕 역시 그 말을 이해했던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문무왕이 비록 실책을 했더라도
끝까지 고집부리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확실히 똑똑한 인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7월 1일 가을
문무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문무 文武 라고 하고 (보통 왕의 시호에는 무 武 나 문 文 만 붙는데에 비해
보통의 시호는 아닙니다 문무왕이 다방면에서 뛰어났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 (대왕암 大王岩, 대왕바위, 문무대왕릉) 에 장사지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문무왕이 용 龍 dragon 으로 변하였다고 했습니다
(문무왕과 호국대룡 護國大龍 전설로
삼국유사에는 이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는데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이되어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려 했던
문무왕의 진심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그 바위를 대왕석 大王石 이라 불렀습니다
문무왕은 다음과 같이 유언했습니다
<문무왕>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백제)을 치고 북쪽(고구려)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멀고 가까운 곳)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훈계,주의)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 父子 (아버지와 아들)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타고난 수명)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만 하였다
내가 온갖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 더욱 심한 병이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 古今 (옛날과 지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 가는 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
태자 太子 (문무왕의 첫째아들인 신문왕이 되는 김정명)는
일찍부터 현덕 (은혜로운 덕, 원문에서는 離輝 [이휘]) 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지위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국왕의 자리)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왕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 萬事 (여러가지 온갖 일)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넋, 영혼)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는 기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 하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의 장례 역시 백성들이 동원되고 무리가 클 수 있는데
백성을 사랑한 문무왕의 애민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오 (문무왕의 애민정신 2)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 (문무왕의 애민정신 3)
원근(멀고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라봉봉>예전의 저는 신라 중기의 왕하면 역시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정작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에 대한 이미지는 미약했는데
문무왕의 유언을 보고 문무왕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 김춘추같이 큰 매력이나 강렬한 이미지는 부족해보이는 듯하나
문,무 라는 그의 시호같이 여러 밸런스(균형)와 안정감을 추구한 성향의 인물 같고
이런 그의 성향은 삼국통일전쟁, 나당전쟁이라는 큰 전쟁에서 무리한 도박같은 것을 자중하고
상당히 안정적으로 당나라에 화전양면 전술을 구사하며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생각되고
그의 글에 인용되는 옛 이야기 등을 보아 학문에 밝았으며 때로는 오랜 전쟁을 겪으며
신하들을 처형하는 등 상당히 엄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인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문무왕의 유언을 인상깊게 읽었던 거 같고
문무왕은 병에 들었을 때 유언을 남기며
죽음 앞에서의 공허함, 쓸쓸함도 글에 드러난 거 같고
문무왕은 유언에서 고금 古今 (옛날과 지금)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지금 2019년의 저가 보기에 이 1000년도 전의 사람도 당대에는
옛날과 '지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지금은 까마득히 먼 옛날임에도
당시에도 그 옛날은 '현재'였고 현재의 2019년의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훗날에는 과거가 되고
먼 과거가 될 것입니다
하여튼 뭔가 죽음 앞에서의
여러 그의 생각들이 드러나 있는 글들이었고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구절에 백성을 위한 유훈들로
그가 '문,무 밸런스형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상당히 영리하고 구체적, 실천적 인물이었고
'기회주의자형 인물' 이나 '박쥐'로 비유되거나 '회색분자'라는 비유로
그를 생각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 자체에서
상당히 많은 학식을 쌓은 인물로 생각되고
검소한 장례, 불필요한 과세 폐지와
불편한 법령,격식을 바꾸라 한 것은
백성을 위한 그의 애민정신이 느껴집니다
신라인들에게 문무왕의 이미지는
문무왕의 아버지 태종 무열왕나 김유신 장군같이
큰 카리스마와 그런 것에 대한 절대적 존경이 있는 이미지는 아니었던거 같으나
'백성을 사랑한 왕' , '편안한 시대를 연 인물' 로 기억된 것이 아닐까 싶고
근데 문무왕 역시 되게 여러 모습도 있고
하여튼 되게 특이한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문무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원문에서도
상당히 거대한 분량이고 이는 상당히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문무왕 대 기록에 있기도 하고
이때를 기점으로 '통일신라시대' 가 시작되기에
여러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호국대룡 전설이나 등등 이야기는 이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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