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 5소경 체제를 완성한 신문왕>
(*주 는 오늘날 도급[예 경기도]이고
소경은 수도 금성 이외의 부수도급으로
오늘날 광역시급[예 부산광역시])
신문왕 5년
봄
신문왕은 다시 완산주 完山州 (오늘날 전라북도 전주시)를 설치하고
(전라북도 익산시 지역의 보덕국을 멸망시킨 신문왕은
전북지역에 완산주를 설치함)
용원을 총관 摠管 (주의 군대를 통솔하던 벼슬) 으로 삼았습니다
거열주를 나누어 청주를 두니
처음으로 구주 (9주 , 주=오늘날 도) 가 되었습니다
대아찬(신라 5등벼슬) 복세를 총관으로 삼았습니다
3월
서원 소경(소경=부수도, 오늘날 광역시 , 서원소경은
오늘날 충청북도 청주)을 설치하고
아찬(신라 6등벼슬) 원태를 사신 仕臣 (신라 지방관직,
소경의 장관직) 으로 삼았습니다
남원소경(오늘날 전라북도 남원시)을 두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살게 했습니다
(즉 이렇게 신라 31대왕 신문왕때
신라의 전국 9주[오늘날 도] 5소경[오늘날 광역시]
체제가 완성됩니다)
봉성사가 낙성(완공)되었습니다
4월 여름
망덕사가 낙성되었습니다
신문왕 6년
정월(1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대장( 大莊 [사람이름])을
<김부식>장 莊 을 장 將 으로도 쓴다
중시(오늘날 국무총리)로 삼았습니다
예작부 例作府 (토목공사,보수사업을 담당한
중앙기관의 신라때 명칭, 오늘날 국토교통부)
에 경 卿 (각 부의 차관급 [장관은 령]) 두 사람을 두었습니다
2월
석산, 마산, 고산, 사평의 네 현을 설치했습니다
사비주를 군으로, 웅천군을 주로 만들었습니다
발라주를 군으로 무진군을 주로 만들었습니다
당에 사신을 보내서 '예기 禮記 (유교 경전)' 와
여러 문장을 요청하니
측천무후가 해당관청에 명령해서
'길흉효례 吉凶要禮 (좋은일과 나쁜일 중 요긴한 것) '를 베껴주고
또 '문관사림 文舘詞林 (중국 한~당초기의 시문을
분류 수록한 시문집) ' 중에서 준칙에 관한 글을 선택하여
(모범으로 삼을 만할 글을 선택하여 ?? ) 50권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당전쟁 후유증으로 문무왕은 나당전쟁 종결부터
사망시까지 형식적인 조공도 보내지 않고
사실상 단교관계를 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신라와 당과의 교류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료전을 지급한 신문왕>
(*관료전 官僚田 신문왕때 신라에서 관리들에게 지급한 토지,
기존 관리들의 수입원인 '녹읍'이 관리들의 땅에서 노동력, 세금까지 수취가 가능해
관리들이 사실상 그 땅의 왕같이 있었다면
'관료전'은 노동력이 아닌 세금만 수취가 가능해
신하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공고히 하려는 신문왕의 의도였음)
신문왕 7년
2월 봄
원자 元子 (왕의 첫째 아들을 부르는 말) 가 출생했습니다
이 날
날씨가 음침하여 어둡고 우레와 번개가 심했습니다
3월
일선주를 폐지하고 다시 사벌주를 두었습니다
파진찬 波珍湌 (신라 4등벼슬) 관장 官長 을 총관으로 삼았습니다
4월 여름
음성서 音聲署 (신라 궁중음악 담당 관청)의
장 長 을 경 卿 으로 바꾸었습니다
대신 大臣 (고위 관료)을 시켜서 조묘 祖廟 (선조의 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문 (천지신명이나 죽은 사람을 제사지낼 때 쓰는 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신문왕의 제문>왕 아무개(신문왕이 자신을 낮춰부른것 입니다) 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 再拜 (두 번 하는 절 여기선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로 해석가능) 하며
삼가 태조대왕(누구인지 밟혀지지 않았으나
김씨시조 김알지로도 추측) ,
진지대왕(진지왕) ,
문흥대왕(김용춘[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
태종대왕(태종 무열왕),
문무대왕(문무왕) 영전에
아뢰나이다
저는 천박한 자질로 숭고한 유업을 이어받아
자나깨나 걱정하고 노력하여 편안하게 지낼 틈이 없었으나
종묘의 돌보심과 천지가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락 和樂 (화평하고 즐거움) 하며
이역 異域 (외국의 땅)의
내빈 來賓 (손님)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며
형정 刑政 (=정형, 정치와 형벌)이 공평하고
송사 訟事 (소송,재판, 백성들끼리 분쟁 이라 해석가능) 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근자에 와서
도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위에 있다보니
정의가 하늘의 뜻과 달라
천문 天文 (우주, 천체의 법칭성) 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매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모관 모 (某官某 라 써있는데 아무개 관리 아무개라
해석 가능할거 같습니다) 를 시켜
변변치 못한 제물을 받들어
살아 계신 신령 앞에 드리오니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사
이 하찮은 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해주시며
5사 五事 (다섯가지 덕목인데 여러 뜻이 있음
대략 여러 조건이 고르게 되어 균형을 맞춘다는 뜻)
성과를 틀리지 말게 하시며
농사가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먹고 입을 것이 풍족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중외 中外 (안과 밖, 나라 안팎, 조정과 민간)가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남겨주고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룁니다
5월
신문왕은 교서를 내려서 문무 관료들에게
직급에 따라 밭을 주었습니다
( ' 敎賜文武官僚田有差 교사문무관료전유차 ' 라는 기록인데
여기서 관료전 官僚田 이라는 말이 있고
이 관료전이란게 신문왕이 그냥 신하들 좋으라고 밭을 준게 아니라
밭을 주되 그곳의 조세만 얻을 수 있게 하고
그 지역을 지배할 권한을 주지 않게하고 또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밭은 관료전을 반납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이는 결국 나라에서 월급을 주었던 것으로
더이상 귀족들의 개인 소유영지이자
영지내 백성들의 노동력, 공물을 모두 수취할 수 있었던
'녹읍' 을 견제하고
공물만 수취할 수 있는
'관료전' 을 지급함으로서
더이상 귀족들은 자신의 토지에서
왕같이 행동하기가 어려워 졌다 할 수 있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려는 신문왕의 목적이었지
신문왕이 관리들 좋으라고 나눠준 땅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을
사벌과 삽량 두 주의 성을 쌓았습니다
<라봉봉>점점 신라도 안정기가 찾아오며
내부 지역, 행정체제 개편 등이 있었다고 할 수 있고
계속 거침없이 왕권 강화책을 시도한 신문왕이었다고 할 수 있고
왕권이 강해서 딱히 신하들도 반발도 못하고
숨죽여 있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에는 왕권이 강했던 신라왕실이어서
귀족들을 찍어누르다 싶이 하며 개혁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이후 신하들의 불만으로
이때부터 70여년간 유지되던 관료전은 폐지됩니다,,
신문왕은 재위기간 내내 끊임없이 신라의 중앙집권화,
왕권 강화에 집중한 인물이나 귀족들의 입장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깔아뭉개기식 개혁이 있었던거 같고
결국 다시 이후 원상복귀되고 귀족권이 강화되는 것을
막기에는 어려웠던거 같고
대신 그의 의의라 할 점은 귀족들의 권력 유지수단이었던
골품 즉 핏줄이 아닌 후천적인 '직분'을 중시하였다고도 하고
그렇다고 그가 골품제를 부정한다거나 하는 뚜렷한 느낌은 없기에
골품제는 신라 멸망때까지 신라 사회의 '암덩어리'로
이어져 가며 내부의 수많은 불만을 낳았다고 할 수 있으나
단지 그가 (무자비한) 전제왕권력 강화에 집중할때
나름 선진적인 제도들을 도입하려는 의지를 보임으로서
자연히 혈연, 인맥위주의 신하들 보다는
그래도 조금의 발판은 마련되어 이후
6두품 등 신라 지식인이 활동할 기반이 조금이나마
마련됬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는 '귀족국가 신라'에서 '관료국가 신라' 로 탈바꿈 시키려는
그의 노력 때문인지 주의깊게 다루는거 같고
이는 점점 신라의 지방까지의 행정력이 확장되어 감을 알 수 있습니다
'라봉봉 한국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린 임금 효소왕 (0) | 2019.01.12 |
---|---|
녹읍을 폐지한 신문왕, 당황제의 칙명을 거절한 신문왕 (0) | 2019.01.11 |
신문왕의 성대한 결혼식, 보덕국의 멸망 (0) | 2019.01.09 |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공신들을 숙청한 신문왕 (0) | 2019.01.08 |
문무왕의 죽음, 문무왕의 유언 (0) | 2019.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