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신라 32대왕 효소왕 김이홍

재위기간 10년 692~702년


효소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름은 이홍이며


<김부식>홍을 공 恭 이라고도 한다 (김이홍 혹은 김이공)


신문왕의 태자입니다

어머니는 김씨 신목왕후이며

일길찬(신라 7등벼슬) 김흠운의


<김부식>김흠운 金欽運 을 김흠운 金欽雲 이라고 하기도 한다


딸입니다


당의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서 조문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신라왕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


으로 책봉했습니다


좌우이방부 左右理方府 (오늘날 사법부격)를

좌우의방부로 고쳤는데

이는 '이' 자가 왕의 이름(김이홍의 '이' ) 자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는 왕의 이름과 다른 이름이 같으면 안됬고

그래서 왕의 이름과 같은 자의 한자가 있으면 이를 바꿨는데

이를 '피휘'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왕이름이 2글자인 이유는 보통 3글자 이름이 흔한데

그럴 경우 왕의 이름과 같아질 경우가 나오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2글자 이름을 쓰게 됬습니다


슬슬 효소왕때부터 한국에서도 피휘가 시작되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효소왕 원년(1년)


(효소왕의 생몰년도를 계산해보면

효소왕 1년에 그는 고작 6살이었는데

왕후나 신하들의 섭정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건립된

황복사 3층 석탑 금동사리함기의 발원자는

효소왕과 효소왕의 어머니 신목태후[왕후]이기에

신목왕후가 섭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또 효소왕의 아버지 신문왕은 무자비하다 싶이한

신하견제가 집권내내 있었는데

이는 신문왕이 생전에 이런 일을 직감하고

어린 아들을 위해 판을 철저하게 깔아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경우에는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으로

선덕여왕이 어리지는 않았지만 최초의 '여자왕' 였기에

진평왕 역시 딸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생전에

여러 노력을 했다고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


8월

대아찬(신라 5등벼슬) 원선을 중시(=시중, 오늘날 국무총리)로

임명했습니다


고승 高僧 (지혜가 뛰어나고 덕이 높은 승려)

도증이 당에서 돌아와서

'천문도 天文圖 (별자리 그림)' 를 바쳤습니다


효소왕 3년

정월(1월) 봄

효소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습니다


(당시 효소왕은 9살이었을 테니

어머니 신목왕후와 동행하며

백관들 앞에서 신궁에 제사지냈을 모습이 생각됩니다)


김문영(삼국통일전쟁때 활약한 인물이며 김유신 장군의 심복)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으로 삼았습니다


김인문(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

이 당나라에서 죽으니 나이 66세였습니다


(슬슬 삼국통일전쟁때 활약한 인물들 역시

죽거나 최고위 원로가 되감을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겨울에 송악과 우잠 두 성을 쌓았습니다


효소왕 4년

자월 子月 (음력 동짓달 [11월])을 정월(첫째 달)로 삼았습니다


(동지때부터 해가 길어지기 시작해 첫달로 삼으나

[혹은 태양 숭배 사상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동지 이후 추위가 점점 더 심해져서

5년뒤 효소왕 9년다시 추위가 풀리는

인월 寅月 [음력 1월] 을 정월로 바꿉니다)


개원(태종 무열왕의 아들)을 상대등으로 임명했습니다


(효소왕때 상대등에 임명된 문영과 개원 모두

신문왕때 신문왕의 결혼식에 참가한 인원들로

신라 왕실에 매우 가까운 인물들이고

효소왕 역시 그대로 이 둘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10월 겨울

서울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중시 원선이 연로해서 사직했습니다


(수도 서라벌[금성]에 시장인) 서시 西市 와

남시 南市 를 설치했습니다


(지증왕때 동시 東市 가 세워졌고

이 때에 이르러 서 남 시장이 생겨서

서라벌에 큰 시장들이 들어서며 상업과 유통이 크게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


효소왕 5년

정월(1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당원을 중시로 임명했습니다


4월 여름

서쪽 지방이 가물었습니다


효소왕 6년

7월 가을

완산주에서 상사로운(복되고 길한 일일 일어날 조짐이 있는) 벼이삭을 바쳤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밭고랑에서 난 벼 이삭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었습니다


9월

임해전에서 모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효소왕 7년

정월(1월)

이찬(신라 2등벼슬) 체원을

우두주 牛頭州 (오늘날 춘천) 총관으로 삼았습니다


2월

서울(서라벌)에 지진이 있었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였습니다


중시 당원이 연로하여 사직하자

대아찬(신라 5등벼슬) 순원을 중시로 임명했습니다


3월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효소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7월 가을

서울(서라벌)에 홍수가 났습니다


효소왕 8년

2월 봄

흰 기운이 하늘에 뻗쳤고

동쪽에 혜성이 나타났습니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7월 가을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5일만에 회복되었습니다


9월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딫쳐

그 소리가 서울(수도)까지 들렸습니다


병기고에서 북과 나팔이 저절로 울었습니다


신촌 사람 미흘이 황금 한 개,

그 무게 백 푼 (1푼= 0.375g 이란는데

그러면 37.5g 즉 10돈입니다) 되는 것을 주워서

바쳤으므로


그에게 남변 제일의 위품과

벼 1백 석을 주었습니다


효소왕 9년

다시 인월(음력 1월)로 정월을 삼았습니다


(위글에 쓴 기록과 연관)


5월 여름

이찬(신라 2등벼슬) 경영이


<김부식> ' 영 永 ' 을 ' 현 玄 ' 이라고도 한다


모반하다가 처형되고

중시 순원이 연좌(엮여서)되어 파면되었습니다


(왕이 어려서 일어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때 연좌되어 파면된 중시 김순원 이후 성덕왕때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드는 것으로 보아

큰 반역보다는 여러 세력, 파벌 다툼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6월

세성(목성)이 달에 들어갔습니다 (歲星入月 세성입월)


신목왕후가 사망했습니다 (삼국사기나 국내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지만 황복사 삼층석탑 금동사리함에서는

신목왕후가 700년 6월 1일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효소왕 10년

2월 봄

혜성이 달에 들어갔습니다


5월 여름

영암군 靈巖郡 태수 일길찬(신라 7등벼슬) 제일이

공익을 위배하고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므로

곤장 1백대를 때리고 섬으로 귀양보냈습니다


효소왕 11년

7월 가을

효소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효소라 하고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습니다


<김부식> '구당서'에

'장안 2년에 이홍(효소왕의 이름)이 죽었다 '

고 했다


'제고기'에 '임인 7월 27일 죽었다' 고 했다


'통감'에 '대족 3년에 죽었다' 고 했으나

'통감' 이 잘못되었다


<라봉봉>어린 나이인 6세에 즉위해서 16세에 사망한 효소왕이고

아버지 신문왕이 어린 아들을 위해 철저하게 숙청이나

신하 견제등을 했던거 같고

어머니 신목왕후의 섭정 등으로 무난무난한 치세를 이어간

효소왕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목왕후 사후 2년뒤에 사망했고 16세의 나이에 사망하게 됬고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당대기준으로) 성인이 될때쯤에 사망했기에

그의 주도로 정치가 이루어 지지는 않았던거 같고

결국 그의 역시 어린 동생 성덕왕에게 왕위가 넘어가나

성덕왕은 명군이어서 통일신라 최전성기를 이끌게 되어

신라는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름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막 성년이 될때 사망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큰 위기는 없었다 할 수 있고

정치도 무난했던 시기로

어린 임금이었음에도

일단 외척이나 신하들의 발호도 미리 신문왕때 숙청작업등으로

크게 없었다고 할 수 있고 선대로부터 이어진 강력한 왕권 등

그래도 안정적인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