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성덕왕 5년

정월(1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인품이 상대등(신라 귀족수장직) 이 되었습니다


나라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했습니다


3월

뭇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습니다


4월 여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8월 가을

중시(오늘날 국무총리격) 신정이 병으로 사직하자

대아찬(신라 5등벼슬) 문량을 중시로 임명했습니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이 해에 곡식이 잘 익지 않았습니다


10월 겨울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12월 겨울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성덕왕 6년

정월(1월) 봄

백성들 가운데 아사자(굶어 죽는 사람)가 늘어나자

한 사람에게 하루 조 3되를

7월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


2월

죄수를 크게 사면했씁니다


백성들에게 5곡의 종자를 정도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12월 겨울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성덕왕 7년

정월(1월) 봄

사벌주 沙伐州 (오늘날 경상북도 상주시) 에서

서지 瑞芝 (버섯의 일종으로 상서로움을 나타냄,

금지를 영지버섯이라 저번에 썼는데 서지도 영지버섯이라 하고

혹은 금지가 목이버섯이고 서지가 영지버섯이라고도 합니다)를

진상했습니다


2월

지진이 났습니다


4월 여름

토성이 달을 범했습니다


죄수를 크게 사면했습니다


성덕왕 8년

3월 봄

청주에서 흰 매를 바쳤습니다


5월 여름

가물었습니다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8월 가을

죄인을 사면했습니다


성덕왕 9년

정월(1월) 봄

천구 天狗 (별똥별) 가 삼랑사북 三郞寺北 에 떨어졌습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지진이 있었습니다


죄인을 사면했습니다


성덕왕 10년

3월 봄

큰 눈이 내렸습니다


5월 여름

도살을 금지했습니다


10월 겨울

나라 남쪽 주군을 순행하며 사냥을 했습니다


중시 문량이 죽었습니다


11월

성덕왕이 백관 百官 (높고 낮은 모든 벼슬아치) 의

잠 箴 (훈계하는 글) 을 제정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교시를 했습니다


<성덕왕>백관들은 국가의 대업에 힘쓸 것이요

사사로운 욕심을 금할 것이요

인망있는 자에게 일을 맡겨야 할 것이며 좔좔좔 ~~


<신라 신하들>젊은 왕께서 유능하시군,,

신라의 성덕 聖德 (성스러운 덕)이로다 ~_~


12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성덕왕 11년

2월 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3월

이찬(신라 2등벼슬) 위문을 중시로 삼았습니다


당나라에서 사신 노원민을 보내와서

성덕왕의 이름을 고치라고 칙령(황제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성덕왕의 원래 이름은 김융기였고 동시대 당나라 황제

당현종 이융기와 이름이 같았고 옛날에는

황제, 왕과 이름이 같으면 안되는 '피휘' 관습이 있었기에

당에서는 성덕왕의 이름을 바꾸라 칙령을 내린것 입니다)


<성덕왕 김융기 → 김흥광>음,,  그러면 앞으로 내이름은

김흥광으로 해야겠군,,


4월 여름

온수 溫水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의 옛지명, 온양은

옛날부터 왕실의 온천으로 유명했음) 에 말을 타고 행차했습니다


8월 가을

김유신의 아내를 봉해서

부인 夫人 으로 삼고

해마다 세곡 1천 석씩을 주게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환갑 즉 60세에

자신의 친여동생 김문희와 태종 무열왕의 셋째딸인

지소부인과 결혼했는데 79세에 사망할대까지

5남 4녀를 낳았다하고

김유신 장군 사망후에도 아직 늙었다고 하기 어려운

지소부인일 것으로 성덕왕 시대에도 생존해 있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신라사에서 전설 중의 전설이었던 김유신 장군의

가족들을 우대해줬던 신라 왕실, 성덕왕이었고


개인적 생각이지만

근친혼도 그렇고 거의 손녀뻘 여인과 김유신 장군은

국가적으로는 전설적 인물이나

제 생각에는 젊은 시절에 그의 여인 '천관녀' 를 버린 댓가를

치룬거 같고 아무리 옛날이라 해도 하여튼

당대에도 좋게 여겨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성덕왕 12년

2월 봄

전사서 典祀署 (나라의 제사를 맡아보던 관아) 를 설치했습니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하니

당현종이 문루(문루는 궁중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이라 하는데 한자 원문으로는

어루, 임금이 계신 누각이라 되있고

둘 다 나당전쟁 이후 소원했던

신라와 당의 관계가 정상화 됬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 나와서 사신을 접겼했습니다


10월 겨울

당나라에 갔던 사신 김정종이 귀국할때

당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성덕왕을


'표기장군특진행좌위위대장군

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계림주자사상주국악랑군공신라왕'


으로 봉했습니다


(당현종 입장에서는

하여튼 계속 조공을 바치는 성덕왕이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10월 겨울

중시 위문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은퇴를 요청하므로

성덕왕은 이를 허락했습니다


1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개성 開城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 참고로

효소왕이 쌓은 송악성 역시

같은 지역이긴 하나 당대 개성은 서부쪽,

송악은 동부쪽 이었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이후 태조 왕건이 나오는

거점지이자 고려왕조 500년 수도이기도 합니다)


을 쌓았습니다


<라봉봉>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나라는

거의 단교에 가까운 정도였으나 점차 회복되다가

성덕왕때 당에 계속 사신을 파견하며 조공하게 됬고

일단 당나라랑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왜는 백제의 영향권이었기에 딱히 친하기도,

또 배울것도 없는 나라였고 (왜가 한국보다 수준이 높아진 것은

보통 조선 중기정도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당나라는 초강대국이자 바로 옆의 최선진국이기도 했고

음,, 그러면서 점점 당과의 우호관계를 회복한 성덕왕때의 신라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