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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학문을 중요시한 성덕왕, 발해의 성장에 대비한 성덕왕>


성덕왕 13년

정월(1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효정을 중시(오늘날 국무총리) 로 삼았습니다


2월

상문사 詳文師 (외교문서 작성 관직, 혹은

임금의 말과 명령을 글로 짓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를 통문박사 通文博士 로 고치고

표문(외교문서)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했습니다


왕자 김수충을 당에 보내 숙위(황제륾 모시는 직)케 하니

당현종이 그를 총애해서 집과 비단을 주고

조당 朝堂 (조정)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환대해준 이후부터

나름 이렇게 신라왕자가 당에가고, 당에서 환대를 해주는게

전통화 된거 같습니다 아마 당황제들 역시 당태종을

닮고 싶어 따라한 그런거도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2월 윤 閏 (윤달)

급찬(=급벌찬, 신라 9등벼슬) 박유를 당에 보내

신년하례 (새해 축하) 를 했는데

그에게 '조산대부원외봉어' 의 직을 주고 돌려 보냈습니다


여름

가뭄이 들었고

질병에 걸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가을

삽량주 歃良州 (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의 산의

상수리(도토리)가 변해서 밤이 되었습니다


10월 겨울

당현종이 내전 內殿 (임금이 거처하는 집)에서

우리(신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재상과 신하 및 4품 이상의 제관 諸官 (여러 벼슬아치)들에게

이에 참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성덕왕의 우호노력에 대한 답례거나

고구려 영역에서 일어난 한국 북방왕조

발해에 대한 견제책으로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한다 할 수도 있고

당나라의 극진한 대우라 할 수 있습니다)


성덕왕 14년

3월 봄

김풍순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4월 여름

청주 菁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흰 참새를 진상했습니다


5월

죄수들을 석방했습니다


6월

큰 가뭄이 들자

성덕왕이 하서주 河西州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 쪽)

용명악 龍鳴嶽 에 사는 거사 居士 (도덕과 학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숨어살며 벼슬을 아니하는 선비

혹은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 있으며 불법을 닦는 남자)

이효를 불러서

임천사 林泉寺 (서라벌[경주]에 있었던 절) 연못에서

기우제(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비는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곧 비가 열흘 동안이나 계속 내렸습니다


<신라 백성들>비랑께 ! 만세 ~ 만세 ~


(자연현상의 일부일 뿐이지만

이런거를 기록할 정도로 성덕왕을 높게 평가한

당대 신라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폭군으로 불린 왕들때에도 이런 일은 분명 있었을 것인데

폭군이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도 기록도 안됬을 것입니다] )


9월 가을

금성이 서자성 庶子星 (북극 근방에 있는 별 이름)을 가렸습니다


10월

유성이 자미성 紫微 (큰곰자리 부근에 있는 자미원의 별 이름)을

범했습니다


12월

유성이 천창 天倉 (별자리 일부,

현재 고래자리의 일부) 으로부터

태미 大微 (대미는 태미의 오기 같습니다)성좌로 들어갔습니다


죄수들을 석방했습니다


왕자 김중경 金重慶 을 태자로 봉했습니다


성덕왕 15년

정월(1월) 봄

유성이 달을 범하자 달이 빛을 잃었습니다


3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성덕왕이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보냈는데


<김부식>또는 엄정이라고도 한다


비단 5백 필, 밭 2백 결, 벼 1만 석, 저택 한 구역을 주었습니다

그 집은 강신공 康申公 의 옛 집이었는데

이를 사준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하는데

이는 그녀가 척신[외척 신하] 김원태의 딸이어서 견제를

하고 김유신 자손 세력을 우대해 대신간의 견제가

이뤄지도록 했다는 의도라고도 하고

일단 내보낸 성정왕후에게 나름 좋은 대우를 했던 것을 보면

태자의 어머니기도 했고 성덕왕은 자신의 아버지 신문왕 같이

일단 신하들을 견제는 해야겠으나 신문왕같이 무자비한 견제는

꺼리는 스타일이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았으며

숭례전 崇禮殿 (신라 왕궁, 사신 접대, 왕의 연회 장소로 이용됨)

이 무너졌습니다


당나라에 갔던 하정사 賀正使 (1월 1일

중국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하러 파견하는 사신)

김풍후가 귀국하려 하니

당황제가 그에게 원외랑 員外郞 벼슬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6월 여름

가뭄이 들어서

다시 거사 이효를 불러 기도하게 하니

곧 비가 왔습니다 (인류는 불과 몇백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기도를 해서 비가 내리게 한다고 믿었고

이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생각해낸것은

역사에서는 얼마 안됩니다,,)


<성덕왕>오오 하늘이 도우신 바로다 \ *_* /


죄수들을 석방하였습니다


성덕왕 16년

2월 봄

의박사 醫博士 (의약[의학, 약학]을 가르치던 전문직)와

산박사 筭博士 (계산, 수학 관리였을 것입니다)

각 한명 씩을 두었습니다


3월

새로 대궐을 지었습니다


4월 여름

지진이 있었습니다


6월

태자 김중경이 죽으니

시호를 효상이라 했습니다


9월 가을

당에 갔던 대감 大監 (신라의 무관벼슬) 수충이 될아와서

문선왕 文宣王 (공자의 존칭),

10철 十哲 (공자의 뛰어난 10 제자, 기독교로 치면

예수님의 사도 12 제자 같은 ?? ) ,

72제자 七十二弟子 (공자님의 제자중

육예 六藝 에 통한 72명)의 화상 圖 (그림)을 바치자

이를 곧 태학(대학 ??)에 안치했습니다


성덕왕 17년

정월(1월) 봄

중시(오늘날 국무총리) 효정이 은퇴하고

파진찬(신라 4등벼슬) 사공이 중시가 되었습니다


2월

성덕왕이 서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 위무해서

나이가 많은 사람,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직접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하사했습니다


3월

지진이 있었습니다


6월 여름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습니다

(옛날에는 피뢰침이 발명되기 전이어서

80m의 거대 탑이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은

신라 ~ 고려시대에 자주 벼락을 맞게 되었고,,

피뢰침도 없던 시대에 참 이런 탑 관리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누각 漏刻 (물시계)을 만들었습니다


(성덕왕은 의박사와 산박사

즉 오늘날로 치면 의사와 수학자를 임용하기도 했고

물시계도 만드는 등 실용적 학문 진흥에 관심이 많았다 하고

그 결정체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이야기되는

'정전제' 입니다

정전제도는 자영농의 토지소유를 인정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상당한 측량기술과 관측기술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고

평소 이런 실용적인 학문진흥에 힘썼던게

여러 도움이 되었을거 같습니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하니

(당에서) 수중낭장 벼슬을 주어서 돌려보냈습니다


10월 겨울

유성이 묘성으로부터 규성으로 들어가자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따라 들어갔고

천구 天狗 (별똥별)가 동북방에 떨어졌습니다


한산주 漢山州 (오늘날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지역)

도독 관내 (도독[주 장관)이 관리하는 구역)

여러 곳에 성을 쌓았습니다


성덕왕 18년

정월(1월) 봄

당나라에 하정사를 파견했습니다


9월 가을

금마군 金馬郡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에서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성덕왕 19년

정월(1월) 봄

지진이 있었습니다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인품이 사망하자

대아찬(신라 5등벼슬) 배부가 상대등이 되었습니다


3월

이찬(신라 2등벼슬)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삼았습니다


(김순원은 효소왕시대때 역모에 연루되 파면된 인물인데

역모죄는 상당한 중죄인데 비해 다시 이렇게

성덕왕도 복권되어 그의 딸이 왕비가 된 것을 보면

진짜 역모였다기보다는 일종의 파벌다툼등에

휘말려 파면되다가 다시 복권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성덕왕은 김순원을 복귀시켜 대신들간의 견제가 이루어지도록

하게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로 치면 '탕평정치'를 했던

영조, 정조 임금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4월 여름

큰 비가 내려서 산이 열세 곳이나 무너졌습니다

우박이 내려서 볏모(벼의 모[벼의 싹])를 해쳤습니다


5월

유사 有司 (관리)에게 명령해서 해골을 묻게 했습니다

(큰 비들로 산들이 무너졌다 하고

이때 묘들도 무너져서 묻었던 해골들이 튀어나와

다시 묻게 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완산주 完山州 (오늘날 전라북도 진주시)에서 흰 까치를 진상했습니다


6월

왕비를 왕후로 책봉했습니다


7월 가을

웅천주 熊川州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에서 흰 까치를 진상했습니다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습니다


중시 사공이 은퇴하고

파진찬(신라 4등벼슬) 문림이 중시가 됬습니다


성덕왕 20년

7월 가을

하슬라도 何瑟羅道 (하슬라는 강원도 강릉시쪽) 장정 2천명을 징발해서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습니다 (성덕왕은 고구려를 계승한

북방의 한국왕조 발해에 대한 견제로 성을 쌓았고

당대는 통일신라 시대라고 보기보다 ' 남북국 시대 南北國 時代 ' 라 표현하는게

적절하다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설명들은 위에서 틈틈히 썼고

이야기를 더하면,,

성덕왕(재위기간 702~737) 당시 북방 한국왕조 발해의 왕은

발해 2대왕 무왕 대무예 (재위기간 719~737) 였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건국 초부터 옛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영토를 끊임없이 확장해 갔으며 이런 발해의 영토확장에 맞서서

남쪽 한국의 신라 성덕왕도 서북방인 한산주에 여러 성을 쌓고

동북방인 하슬라에도 장정을 선발해서

장성(긴 성)을 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덕왕의 시대는 평화시대로 이야기 되나

이렇게 적극적인 방비 태세를 갖추고 강력한 국력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주변 국가들이 신라를 넘보지 못했다 할 수 있고

성덕왕은 통일신라의 최전성기 국왕으로 이야기됩니다


당대는 통일신라 시기로 불리기는 하나

발해 역시 한국의 왕조였기에 '남북국 시대'가 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고

통일 신라 역시 틀린 말은 아닐 수 있겠으나

진정한 한 韓 민족의 통일은 보통 태조왕건의 고려시대에

발해 유민들까지 고려가 포용하며 이루었다고도 이야기 됩니다

그러나 성덕왕 시대때는

옛 백제지역에서 공물이 올라오기도 하고

점점 국가가 안정화 되며

민족적 통합이 있어가고 있었다고 생각되고

고구려 유민들을 포용한

신라 역시 정통성 면에서는 부족하다고 할 수 없고

하여튼 남,북 할거 없이 강했던 당대 한국왕조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발해 역시 적극적으로 고구려 영토를 되찾으려고

거침없이 무서운 속도


(고구려인들이 수백년동안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갔던 영토였는데

발해는 국가의 기틀을 3년만에 잡았다 하고

발해인들은 멸망한지 얼마 안된 고구려 유민 출신들이었고

당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역시

나당전쟁 패배, 토번과의 사투,

보장왕의 반란 등으로 고구려 영토 지역을 통치하지 못했고

신라 역시 북방 지역은 당과의 관계나

옛 고구려 유력자 세력들의 존재,

백제 영토나 관리를 잘하자는 생각으로

북방의 완충지 역활로 냅둔거 같습니다

이에 발해는 매우 빠른 속도로 무주공산[주인없는]의

고구려 영역을 수복해나간거 같습니다)


로 영토를 확장해 나간게

옛 고조선 영토를 되찾으려 했던

고구려인들과 닮아있고 당대의 한민족 韓民族 의 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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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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