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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 30년

2월 봄

김지량을 당나라에 보내서 하정(새해 인사) 하니

당현종이 대복소경원외치 라는 벼슬을 주고

비단 60필을 주며 돌려보내며

조서를 보내어 말하기를


<당현종>보낸 바의 우황 牛黃 (소의 담낭,담관 염증으로 생긴

결석을 건조시켜 만든 약재) 및 금은 金銀 등의 물자는

그대(성덕왕)의 표문을 보고 잘 알았다


경의 이명 二明 (해와달, 혹은 부부) 은 복되고

삼한 三韓 (한민족) 은 선린 善隣 (사이좋게 지냄) 하니

오늘날 인의의 고장이라 칭하고

세대로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


문장과 예약은 군자의 기풍을 드러내고

납관 納款 (마음을 다하여 복종함) 과 수충 輸忠 (충성을 바침) 은 

근왕 勤王 (임금에게 충성을 다함) 의 절조를 본받았으니

참으로 번방(제후국)의 요새이며

충의의 의표 儀表 (태도)라 할 수 있으니

어찌 특수한 지방의 먼 풍속과 (신라를) 같이 말할 것이리오


더구나 의리를 사모함이 크게 부지런하고

직책 다하기를 더욱 삼가며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막히고 먼데도 게으름이 없었고

예물과 보물을 바침이

해마다 한결같으며

우리 왕도를 지켜 모든일을 국장 國章 (국가의 글)에 기록하게 되니

그 간절한 성의를 보아 깊이 가상할 만 하다


나는 일찍깨어 오래생각하고

밤에도 옷을 입고 현인을 기다린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잘 보필할 것 같았는데

경의 글을 보니 내 뜻에 부합된다


지금 사신이 이르러서

경이 질고 疾苦 (병으로 인한 고통)로 인하여

명을 받들지 못함을 알았고

멀리 떨어져만 있으니 걱정이 더할 뿐이다


계절이 온화해지면

그대의 병환은 낫고 회복할 것이다


지금 그대에게 능직 비단 500필과

비단 2천 5백 필을 보내니 받기를 바란다


라고 했습니다


4월 여름

죄수들을 석방했습니다


(성덕왕의 죄수석방 기록이 잦은데

조선시대 역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 에서

이를 '지나친 (사면령) 남발이었다 ' 라고 비판했고

성덕왕이 백성을 위한답시고

사면을 자주 했지만 이런식으로 자주하면

범죄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고 사람들이 범법행위를

우습게 알게된다고 비판했다 하고 이는 제자백가 사상으로 치면

법을 중시하는 '법가' 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겠고 성덕왕은 인,어짐을 베푸는 '유가' 적인

통치를 하게 된 인물 같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소 남발된 감도 있겠으나

통일된 이후 신라 왕실에서는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개혁들이 시작됬고

특히 성덕왕의 아버지 신문왕때 엄격한 통치로

귀족들이 숙청됬던 시기가 있었고 신라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해가던 시기였으므로

다소 위문책으로 사면을 많이 한 성덕왕같고

무조건적으로 환경, 시대상을 무시하고 할 수도 없는 것이겠고

성덕왕도 나름대로 현명하게 통치를 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했습니다


일본국 병선 3백척이 바다를 건너와 동쪽 변경을 습격하므로

성덕왕이 장병을 출동시켜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에대한 일본측 기록은 없다 하나

일단 성덕왕 시기 신라는 동아시아의 강국이자

한국사의 전성기 시기였고 그럼에도 일본에 방심하지 않고

대비했다는 것과 통일신라의 국력이 일본보다 훨씬 강했다는

정황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9월 가을

성덕왕이 백관들로 하여금 적문 的門 (신라 궁궐문)에 모이게해서

신하들과 함께 차노 車弩 (수레위에 장치한 쇠뇌[석궁]) 의 사격술을

관람했습니다


성덕왕 31년

12월 겨울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사공과

이찬(신라 2등벼슬) 정종, 윤충, 사인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습니다


성덕왕 32년

7월 가을

당현종이 발해에 소속된 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산동반도) 를

침범하므로

태복원외경 김사란을 당에서 귀국시키면서

동시에 성덕왕 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의 작위를 더하여 주고

김사란에게 군사를 주어서 말갈(발해) 의 남부 지방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하' 기록에서는,,


개원 21년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서 권유하기를


<당나라 사신>말갈과 발해가 겉으로는

번신(번방의 신하) 이라 일컬으면서도

속으로 교활한 음모를 품고 있으므로

이제 군사를 출동시켜 문죄하려 하니

경(성덕왕) 도 군사를 출동시켜

앞뒤에서 서로 견제하도록 하라


듣건대 옛 장수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이 있다고 하니

반드시 이 사람을 차출하여 장수로 삼으라 !


했고

동시에 김윤중에게 약간의 황금과 비단을 주었습니다


이에 성덕대왕이 김윤중과 그의 아우 윤문 등 네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서 당병과 합세해서 발해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신라군은 10만(??) 의 대군 으로

발해의 남부지방, 즉 신라의 북부 국경너머를 공격하러

출정했는데

그 때 마침 큰 눈이 한 길(=척, 23cm) 넘게 내려서

산길이 막혔고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으며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귀환했습니다

김사란은 원래 신라 왕족이었는데

앞서 당나라 조회(조정회의)에 참여했을 때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므로

숙위(황제를 모시는 직)로 머물게 했는데

이 시기에 당나라의 대외임무를 맡긴 것이었습니다


<라봉봉>발해와 당이 충돌하게 된 배경에 대한

상황으로는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 땅에 발해를 건국했고

발해 2대왕 무왕 대무예는 왕위에 오르자

인안이라는 연호를 제정하고 발해가 자주국가임을 공표했고

고구려 고토를 수복하려는 대외확장을 적극적으로 시도했습니다


'신당서'에는


'그(발해 무왕 대무예)가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이민족들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다 (동북의 모든 유목민족들이

겁을 먹고 발해 무왕을 섬긴 이유는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에게

전설적인 국가였고 존경받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


라고 기록되 있고


이런 발해의 기세에 발해가 옛 고구려같이 될까 두려워한

당의 견제(발해 고립화)가 들어갔는데

점점 당의 발해 고립화 정책은 성공하는듯 했고

점점 궁지에 몰려가는 발해의 무왕은 결국

당시 최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전면전쟁을 마다치 않는

정책을 피게됬고

당나라는 당연히 육로로 올거라 생각했겠으나

뜬금없이 바다로 산동반도 (등주) 지역을 공격해서 점령하자

당에서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산동지역은 발달된 상업항이었고 또 군사적으로도

한국지역을 공격할 때 군항으로 이용될 수 있는 지역이었고

또 요하를 건너고 요서를 지나 장성을 넘어

당나라 수도까지 갈 수 있는 지상로와 달리

산동지역으로 발해군이 오게 되면

당나라의 주요 지방들이 곧바로 위협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공격받자 결국 당은 신라와 함께 발해를 공격하려하고

신라는 당의 요청을 받고

당이 발해 서부를 공격할 때

신라는 발해 남부를 공격하러 출정했는데

당군은 마도산 지역에서 발해의 후원을 받은

거란 + 돌궐 연합군에게 천멸당했다하고

(마도산 전투)

이런 이유 등으로 신라 원정군도

추위를 핑계대고 치는 시늉만 하다

바로 군대를 물리게 된거 같습니다


발해 원정길에 오른 신라군의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다는데

신라군은 삼국통일전쟁 과정과

나당전쟁때 이미 신라군은

북쪽 국경을 넘은적이 몇번 있었고

신라군이 고구려 유민으로 편성한 부대도 있었고

오합지졸같은 약한 군대는 아니었다 할 수 있기에

이는 과장된 기록이라 생각되고

그런데도 이렇게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당나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확실히 거짓된 기록 같습니다


당은 발해와의 전투를 계기로

결국 중국 동북 이민족을 제어하려면 발해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됬고 발해 역시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신생국가였는데 당과의 전면전은 큰 타격이 될 수 있었고

당나라 역시 동쪽의 발해나 신라를 제외하더라도 사방이 적으로 가득했고

북방의 돌궐과 서방의 토번이 주요 적으로 일어났기에

결국 발해와 당은 서로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현실적인 외교관계를 구축하게 됬고

신라군 역시 당시 당에게도 불리한 상황이 있었고

안보적인 측면에서도 발해가 멸망하고 그지역에 당이 들어오면

더 부담이 커지고 발해 역시 같은 한민족이었는데

굳이 발해를 쳐봤자 이익이 될 것도 부족했다 할 수 있기에

추위를 이유로 바로 군대를 뺀거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사 마지막 북방왕조 발해 이야기를 더하자면

당대 신생국가 발해에게도 당나라와의 전쟁은 큰 부담이었고

당시 발해 무왕은 신생국가 발해의 군주로서

당에게 자주권을 넘기냐 아니면 당과의 전쟁을 불사하냐의 기로에서

당과의 전쟁을 불사했고 승리하며 발해의 독자적인 자주권을 성립하게 됩니다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당나라와의 눈치만 보고 움츠렸다면 더 나쁜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게 당나라도 결국 동북아의 지배권은 발해의 영역으로 인정하게 되고

발해는 주변 부족과 소국을 거느린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고

오랜 평화의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발해사는 상당히 미지의 영역에 있으며 (쓰면서도 또 발해의 소속이었던 말갈이

훗날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다는게 ,,)

발해 멸망 이후 동북아 지형판도가 크게 바뀌기에 상당히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고

또 마지막 한국 북방왕조라는 점에서 고구려, 발해사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 특히

새롭고 또 아쉽게 다가오는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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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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