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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 32년

12월 겨울

성덕왕의 조카 김지렴을 당에 파견해서

사은 謝恩 (은혜에 감사함) 했는데

먼저 당현종이 성덕왕에게 흰 앵무새 암수 한쌍과

자라수포 紫羅繡袍 (자줏빛 비단에 수놓아 만든

도포의 한 가지) 와

금은전기물 金銀鈿器物 (금과 은을 입힌 나전그릇)과

서문금 瑞紋錦 (상서로운 무늬의 비단) 과

오색나채 五色羅綵 (다섯가지 색깔로 물들인 얇은 비단) 등

300여 단을 보내왔으므로

이때 성덕왕은 글로 사례하며 말하기를


<성덕왕>생각컨대 폐하는

법을 지켜 즉위하여

성문신무 聖文神武 (문과 무가 다 뛰어나다는 말,

문무겸비) 로

천세 千齡 (천년)의 창운 昌運 (좋은 운수) 에 응하시고

만물의 가상 嘉祥 (아름다운 징조) 을 이루게 하시니


풍운 風雲 (바람과 구름, 자연)이 통하는 곳마다

다 극진한 덕을 입게 되었습니다

일월(해와 달) 이 미치는 곳마다

다 깊은 인덕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 臣 의 사는 곳은 봉래산 사이에 있어

중국과 멀지만

황제의 은택은 멀리까지 미쳐서

화하 華夏 (중국의 별칭)을 바라보니

어진 은택이 깊게 멀리 미쳤습니다


글을 보고 옥갑 玉匣 (옥으로 만든 상자) 을 여니

하늘의 비와 이슬을 머금은 듯 하고

오색 빛깔의 신기한 새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은혜를 말할 줄 아는 영물스러운 새인 앵무는

흰 것과 푸른 것 두 마리가 신묘하게 어우러져

때로는 장안의 노래를 부르기도하고

때로는 황제의 은혜를 전해주는 듯 하였습니다


비단의 채색 무늬와 보물의 금의 장식은

보는 자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자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원래 당나라에 정성을 바친 공은

사실은 선조들이 이룬 것인데

저에게 이처럼 큰 은총을 내리고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니

미미한 충성은 티끌처럼 작은데

은혜는 태산 같이 큰 격입니다

저의 분수를 생각해보면 무엇으로 보답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당현종은 내전으로 김지렴을 불러 향연을 베풀고

속백 束帛 (비단 한 묶음) 을 하사했습니다


성덕왕 33년

정월(1월) 봄

백관(신하)들이

직접 북문으로 들어가 상주를 올리거나

왕과 마주 대하도록 하라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신하들에게 괜히 빙빙 돌아오지 말고

또 머리 조아리고 있지 말고

그냥 실용적이게, 편하게 대하라는

성덕왕의 조서 같습니다)


이 때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황제를 모심) 하는

좌령군위원외 장군 김충신이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렸습니다


<김충신>제가 받은 명령은

제가 폐하의 신임표를 가지고 본국(신라) 에 가서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물리치는 것이었으며

다른 상황이 발생하면 계속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나서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저를 대신하여 숙위할 사람인 김효방이 죽었기 때문에

제가 숙위로 유임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본국(신라) 왕은 제가 황제를 오래 모셨다 하여

저의 종질 從姪 (사촌 형제의 아들) 김지렴을 파견하여

저를 대신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그가 이미 도착해 있으니 저는 귀국함이 합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전에 받은 황제의 명령은 언제나 염두에 둘 것이며

밤이나 낮이나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예전에 본국의 왕 김흥광 金興光 (성덕왕의 이름) 에게

영해군 대사의 직위를 가핫고

군사 출동의 정절 旌節 (의장의 한 가지) 을 주어

흉적을 토벌케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에 임하면 먼 곳이라도 가까운 곳 같았고

황제의 명령이 내리면 신은 감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오랑캐들은 자신의 행동에 화를 불러 일으켰음을

이미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근본에 힘써야 할 것이며

법령을 선포함에 있어서는 새로움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의 충돌에 있어서는

세 번의 승리보다도 정의가 더욱 귀중하며

적의 방종케 하면 후환이 누대에 미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저의 귀국을 기회로

부사의 직을 저에게 맡겨 주셔서

황제의 뜻을 신라에 거듭 선포토록 하소서


그리하면 이것이 어찌 황제의 위엄만 떨칠 뿐이겠습니까

실로 군사들도 또한 기운을 내어

반드시 오랑케의 근거지를 뒤엎어서

이 거친 변방을 안정시킬 것이고

마침내 저의 작은 정성이 국가의 큰 이익으로 변할 것입니다


신 등이 다시 창해 滄海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고

승리의 보고를 대궐에 바치며

작은 공이라도 세워 크나큰 황제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폐하께서는 이 뜻을 들어 주소서


당황제는 이를 허락했습니다


4월 여름

대신 김단갈단을

당에 파견하여 하정(새해 인사)

황제는 내전 內殿 (임금의 집) 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를 접견하고

위위소경 벼슬을 주고

비란포 緋襴袍 (비단으로 만든 상하가 하나로 된 옷) 와

평망은대 平漫銀帶 (평평하게 흩어진 은으로 만든 띠 ??) 와

견 絹 (비단) 60필을 하사했습니다


먼저 왕질 王姪 (왕의 조카) 김지렴을 파견해서

사은(은혜에 감사) 하고

작은 말 2필과 개 3마리와

금 500냥, 은 20냥에

베 60필, 우황(소의 담낭 담관에 염증으로 생긴 결석을

건조시켜 만든 약재) 20냥, 인삼 200근,

머리털 100냥 (가발용으로 장식, 사치품) ,

해표 가죽 16장 을 바쳤습니다


이 때 당황제는 김지렴에게도

홍려소경원외치 벼슬을 주었습니다


성덕왕 34년

정월(1월) 봄

화성이 달을 범했습니다


김의충을 당에 보내서 신년 하례(새해 인사) 를 했습니다


2월

부사 김영이 당에서 사망하자

광록소경 벼슬을 추증했습니다


김의충이 신라로 귀국할 때

당황제는 신라에 패강(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라는

조칙을 내렸습니다


(원래 신라에게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당과 맺은

나당동맹 약조로 당연히 신라 몫으로 하기로 약속되있었던 것인데

당의 야욕으로 당은 한국 전체를 지배하려 하다가

나당전쟁이 일어났고 나당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났는데

그 이후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소원하다

성덕왕의 적극적인 대당외교로 우호관계가 완전히 회복됬고

극진한 조공외교나

당의 발해공격 때 당의 요청에 출정하는 모습 등에

결국 당황제도 공식적으로 신라의 영역, 독립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덕왕 35년

6월 여름

사신을 당나라로 파견해서 하정(새해 인사) 하고

아울러 표문을 보내 사례하기를


<성덕왕의 표문>패강(대동강) 이남의

지경 地境 (땅과 땅의 경계) 을 주신다는

은혜로운 조칙을 받았습니다


신은 바다 모퉁이에 살면서

성조 聖朝 (이진 임금이 다스리는 조정, 당나라의 높임말) 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비록 충성을 바칠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공적은 없었으며

충정을 일 삼았으나

상을 받을 만한 노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가 크나큰 은혜를 베풀고

해와 달 같이 밝은 조서를 내려

저에게 토지를 주어서 나라를 넓혔으니

마침내 땅을 개간할 희망이 생기고

농사지을 터전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서의 뜻을 받들어 큰 은총을 입었으니

분골쇄신( 원문에선 粉骨糜身 ,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진다는 뜻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함) 할 지라도

황제에게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11월 겨울

성덕왕의 종제 從弟 (사촌동생) 인

대아찬(신라 5등벼슬) 김상을 당에 파견해서

조회(조정 회의에 참석) 하게 했는데

도중에 사망하자

당황제가 매우 슬퍼하며 그에게 위위경 벼슬을 추증했습니다


이찬(신라 2등벼슬) 윤충, 사인, 영술을 보내서

평양 平壤 주(이당시 통일신라가 고구려 마지막 수도 평양을 신라 영토로

편입시켰다는 얘기도 있고 이후 발해의 관할로 들어갔다고도 하는데

평양은 당시 발해와 신라의 국경지역이었기에 양국 모두

크게 신경을 못쓰는 변방화 되다가 훗날 태조왕건의 고려건국때부터

다시 그 중요성이 재인식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와 우두 牛頭 (오늘날 강원도 춘천시)주의 지세를 조사했습니다


개가 재성 在城 (도성) 고루 鼓樓 (북을 단 누각) 에 올라가

사흘(3일) 동안 짖었습니다


성덕왕 36년

2월 봄

사찬(신라 8등벼슬) 김포질을 당나라에 보내서

신년 하례(새해 인사)를 하고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성덕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성덕 聖德 (성인의 거룩한 덕, 임금의 덕) 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성덕왕때의 기록은 당과의 우호관계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여러 보물들, 미사여구들이 많아서 번역이 쉽지 않은 편지만

당대 신라가 매우 번성했음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성덕왕은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왕이라고도 이야기 됩니다


성덕왕은 선대왕 때부터 이어진 왕실의 개혁과

넓어진 영토에 대한 중앙집권화를 완수했고

당과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이미 대동강 이남을 지배하고 있었긴 했지만

이때에 이르러서 논란의 여지가 없게

당 조정에서도 공식적으로 신라의 대동강 이남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신문왕과 달리 강압적이거나 무자비한 모습보다는

어질고 유연한 모습으로 정치를 하며

신라의 안정기, 평화기를 이끈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신라 성덕왕은 고려의 문종, 조선의 세종대왕으로 비유될 정도로

한국사의 명군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지도가 낮은 편인 이유는

고려 문종이 그렇듯이 큰 정치적 격변이 없이

나라의 내실을 다지고 태평한 나라를 통치해서라고 하고

당대 백성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고 할 수있습니다


훗날 신라인들은 그를 기려

'성덕대왕 신종' 을 만들었는데

당시 종이 완성되지 않자

시주받은 아기를 종안에 넣고 종을 만들자

종이 완성됬는데 종 울음소리가

아기가 어머니를 원망하며

에미일리레(어미의 탓이다 ??) 라 고 해서

'에밀레종' 이라 불리는 한국의 문화유산

'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 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통일신라 시기는 진짜 근데 별 유명하거나

자극적인 이야기가 적고

오랜 평화기가 많아서 평화로운 이야기가 많고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지루한 느낌이 있는 기록들이 있더라도 ,

별 이야기는 없어보여도 당시부터 계속 국력,

시대적 성숙도가 쌓이다가 고대 시대가 저물어가고

한국의 중세 시대 고려시대가 시작되는 것이기에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지루한 느낌이 있는 기록들이 있더라도

이당시에도 조용히 민족적 문화, 경제, 사상등이 발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극적인(혹은 난세의) 이야기들은

점차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권이 강화되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고

신라 중앙정부의 힘이 약화되자 지방 호족들이 일어나는

통일신라 말기, 후삼국 시대가 많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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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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