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제도를 실시한 성덕왕>
성덕왕 21년 (722년)
정월(1월) 봄
중시(오늘날 국무총리) 문림이 죽자
이찬(신라 2등벼슬) 선종이 중시가 되었습니다
2월
서울(=수도, 서라벌) 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8월 가을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 丁田 을 주었습니다
(정전 제도의 실시)
<라봉봉>신라 성덕왕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바로 '정전 지급' 입니다
그의 아버지 신문왕이 '녹읍 폐지와 관료전 지급' 으로 유명한데
녹읍과 관료전은 보통 귀족, 신하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었다면
성덕왕대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에게 '정전' 이라는 토지를 지급합니다
'정전 제도' 는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해줬다고 하지만
실제 문서상의 기록이 없기에
백성들의 '토지 소유권' 을 인정한 것이라 추측하고 있고
귀족들만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상당히 민주, 선진적인 제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본래부터 농민들이 보유, 경작해오던 땅을
국가에서 농민에게 지급한 거같이 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나라의 땅은 모두 왕의 땅' 이라는 '왕토 사상' 에
의거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지급해줬다 하고
여기서 지급이라 하기도 뭐하다 할 수 있겠지만
농민의 토지권, 소유권을 인정했다는 의의가 있을 수 있겠고
혹은 수,당나라의 백성들에 대한 토지 지급 정책인
균전제를 모방했다는 견해도 있다고합니다
균전제 역시 귀족,호족들의 대토지 보유현상이 심해지자
나라에서 세금을 내고 부역에 동원되는
자영농, 일반 백성들의 몰락을 막기위해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토지지급를 해주되
세금, 부역의무를 병행했다 할 수 있는 제도고
당대 적극적인 중국의 문물을 수용했던
신라 역시 당의 균전제를 모방해서 정전을 지급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본래 농민들이 보유하는 토지를
국가에서 인정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합니다)
정전은 일단 백성들의 토지권을 중요시한 제도로 보여지기에
예로부터 왕정시대엔 보통 왕 - 귀족 - 백성 - 노예 이런 계급이
있어왔다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왕과 귀족, 노예는 보통 세금이 면제됬다 할 수 있고
결국 부역, 세금은 다수의 일반 백성들이 부담하게 됬고
만약 귀족들의 힘이 강해져 귀족들이 대농장을 소유하고
백성들이 몰락해 노예화되어 많은 노예를 거느리게,, 된다면
세금을 낼 수 있는 일반 백성들의 수는 줄어들게 되고
국가가 걷어들이는 세금의 양도
크게 준다고 할 수 있기에 결국 국가적 몰락을 초래하게 되고
이에 옛날 개혁 정치가들은 동,서양 가릴거 없이
자신의 땅으로 농사를 짓는 일반 농민인 자영농의 성장을 도우려했고
또 단순 경제적 측면 말고도 결국 자영농에서 장병이 나오기 때문에
자영농이 무너지면 자연히 국방력이 약화되고 외적의 침입에 크게 노출되기에
이는 생존적 문제이기도 해서 상당히 예민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전 지급은 결국 귀족들의 백성들에 대한 토지 수탈을 막고
일반 백성,자영농을 보호 육성하는 '귀족 견제책' 이라고도 볼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귀족은 무조건적으로 악이라고도 할 수 없는게
박제상이나 김유신 장군같은 큰 공을 세워 나라를 지킨 인물들도 있기에
예로부터 이런 개혁들은 여러 사람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며 해야했고
이를 '왕도정치' 라고 하는데
반대의 경우를 '패도정치' 라고 하고
일단 신문왕의 개혁은 개혁이었음에도 귀족들을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패도정치' 적인 성향이 강해보이고
성덕왕은 아버지 신문왕 같이 개혁을 추진하기는 했으나
다소 유연한 모습으로 '왕도정치' 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거 같고
일단 당대 성덕왕의 개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개혁들은 상당한 난이도가 필요한 것이고
특히 토지개혁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농경사회였기에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개혁이었기에 상당히 매우 어렵고 예민한게
토지개혁이었습니다
토지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사회적인 측면 이외에도
상당한 측량기술, 계산력, 행정력이 필요한 것으로
이전에 성덕왕 16년 의박사(의학관료) 와 산박사(수학관료) 를 두었고
성덕왕 17년에는 물시계를 만들었다는 점도
정전 제도 실행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정전제도는
'일반 백성의 토지권을 인정했다' 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는
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과의 조공무역 관계를 확립한 성덕왕>
성덕왕 21년
10월 겨울
대내마(=데나마, 신라 10등벼슬) 김인일을 당에 보내서
신년을 하례(새해 인사를) 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모벌군성을 쌓아 일본의 침입로를 막았습니다
성덕왕 22년
3월 봄
성덕왕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미녀 美女 (예쁜 여자) 두 명을 바쳤습니다
한 명은 포정이라는 여자로서
아버지는 내마(=나마, 신라 11등벼슬) 천승이었으며
한 명은 정완이라는 여자로서
아버지는 대사(신라 12등벼슬) 충훈이었습니다
두 여자가 떠날 때 성덕왕이 의복과 기구와 노비와 수레와 말을 주어서
예장을 갖추어 보냈습니다
당현종은
<당현종>너희들이 모두 왕의 내종자매(고모의 자녀)들로서
친척과 이별하고 고국을 떠나왔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게 할 수가 없다
라고 말하고
후하게 선물을 주어 돌려 보냈습니다
<김부식>정완의 비석에는
' 효성 6년 즉 천보 원년에 당나라에 가다 ' 라고 되어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4월 여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과하마 果下馬 (타고서 과일 나무를 지날 수 있다는 말로
키가 작은 한국의 말) 1필과 우황 牛黃 (소의 담낭,담관에
염증으로 생긴 결석을 건조시켜 만든 약재) ,
인삼, 미체 美髢 (가발로 '당서 신라조' 에는
신라 남자가 머리를 깎아 팔았다고 하고 가난한 사람이
머리를 깎아 가발로 팔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고
이 가발은 옛날 여인들의 장식품, 사치품이었습니다)
, 조하주 朝霞紬 (삼국시대에 제작된 명주의 종류)
, 어아주 魚牙紬 , 조각한 매 방울 鏤鷹鈴 ,
해표피 海豹皮 (바다표범 가죽, 방한용으로 썼음) ,
금과 은 등을 바치고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라 사신>우리나라(신라)가 바다의 후미진 곳,
먼 모퉁이에 있어 원래 외지에서 들어오는 진귀한 보배도 없고
공물을 바치는 자들의 재화도 결핍하므로
감히 지방산물을 가지고서
천관 天官 (황제 ??) 를 모독하고
노건 駑蹇 (둔하고 느림) 한 재주를 내어
용구 龍廐 (황제의 마굿간) 를 더럽히게 함은
마치 연시 燕豕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말) 같다고 할 수 있으니
감히 초계 楚雞 (초나라 닭을 바친 충성 ?? ) 같다 할 수 있겠습니까 ?
속깊이 부끄러움을 깨닫게 되니
땀을 더 흘릴 따름입니다
고 했습니다
지진이 있었습니다
성덕왕 23년
봄
왕자 승경(훗날 34대왕 효성왕 김승경) 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죄수를 크게 사면했습니다
웅천주(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에서 서지(영지버섯) 를 진상했습니다
2월
김무훈을 당으로 파견해서
하정 賀正 (새해 인사) 했는데
김무훈이 돌아올 때
당의 현종은 글을 보내 말하기를
<당현종>경은 정삭 正朔 (1월 1일) 을 받들 때 마다
궐정 闕庭 (대궐의 뜰) 에 조공하고
소회 所懷 (속마음, 가슴에 품은 뜻)를 말하니
가히 가상하며
또한 보내준 온갖 물자는 받으나
그것이 모두 창해 滄波 (푸른 바다) 를 건너고
초망 草莽 (풀숲) 을 거쳐 건너온 것으로
모든 것이 정려 精麗 (정교하고 화려함)하여
경의 마음을 깊이 나타냈으므로
지금 경에게 금포 錦袍 (비단으로 만든 도포) ,
금대 金帶 (관리들이 쓰는 허리띠) 와
채소 綵素 (비단 ??) 2천 필을 주어
성헌 誠獻 (정성된 조공) 에 보답하려 하니
이르는 대로 잘 받기를 바란다
고 했습니다
12월 겨울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소덕왕비가 사망했습니다
성덕왕 24년
정월(1월) 봄
흰색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3월
눈이 내렸습니다
4월 여름
우박이 내렸습니다
중시 선종이 은퇴하자
이찬(신라 2등벼슬) 윤충이 중시가 되었습니다
10월 겨울
지진이 있었습니다
성덕왕 25년
4월 여름
김충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하정 賀正 (새해 인사) 했습니다
5월
성덕왕의 아우 김근질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당나라에서는 낭장의 벼슬을 주어서 돌려보냈습니다
성덕왕 26년
정월(1월) 봄
죄수들을 석방했습니다
4월 여름
일길찬(신라 7등벼슬) 위원을 대아찬(신라 5등벼슬) ,
급찬(=급벌찬, 신라 9등벼슬) 대양을 사찬(신라 8등벼슬)에 임명했습니다
12월 겨울
영창궁 永昌宮 (신라 궁궐의 하나로
왕실 사원이나 천지신에 제사를 지내는 신궁이라고도 합니다)을
수리했습니다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배부가 연로해서 은퇴를 요청했으나
성덕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벽에 세워놓고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 과 지팡이를 하사했습니다
성덕왕 27년
7월 가을
성덕왕의 아우 김사종을 당에 보내서 특산물을 올렸습니다
아울러 신라 자제들의 당나라 국학 입학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이를 허가하도록 당황제가 명했습니다
당황제가 김사종에게 과의 벼슬을 주고
숙위(황제를 모시는 직) 로 머물게 했습니다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배부가 연로해서 은퇴를 요청하니
성덕왕이 이를 허락했습니다
이찬(신라 2등벼슬) 사공을 상대등에 임명했습니다
성덕왕 28년
정월(1월) 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하정(새해 인사) 했습니다
9월 가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성덕왕 29년
2월 봄
왕족 김지만을 당나라에 보내서 작은 말 5필,
개 1마리, 금 2천 냥 (1냥 = 1돈의 10배라 하고
1냥 37.5g 으로 계산하면 2천냥이면 75kg 라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 두발 頭髮 (머리카락 즉 가발) 80량 (3kg) ,
해표피 海豹皮 (바다표범 가죽) 10장 등을 바치니
당현종은 김지만에게 대복경의 벼슬을 주고
명주 백필, 자주 빛 웃옷, 비단으로 만든 가는 띠를 주었고
그를 숙위(황제를 모시는 직) 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10월 겨울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해서 특산물을 바치니
당현종은 물품을 내어주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점점 신라에서 조공을 보내면
당에서 보답으로 물건을 건내주는
'조공무역' 관계가 성립되감을 알 수 있고
당에게 굽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나
점점 한국도 실리를 취하는 형태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할 수 있고
이러한 형태의 실리형 조공무역은 조선시대 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말이 실리형 조공무역이지 평등한 관계가 아닌
굽힌다는 거 자체가 좋게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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