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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1대왕 헌덕왕 김언승

재위기간 17년 809~826년


헌덕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언승이며

소성왕의 동복(같은 어머니) 아우입니다


원성왕 6년에

(김언승은)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대아찬(신라 5등벼슬) 의 직위를 받았고


원성왕 7년에는

반역하는 신하를 처형해서

잡찬(신라 3등벼슬) 이 됬고


원성왕 10년에는

시중이 됬고


원성왕 11년에는

이찬(신라 2등벼슬) 으로서 재상이 되었고


원성왕 12년에는

병부령(오늘날 국방부장관) 이 됬고


애장왕 원년(1년) 에는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이 됬고


애장왕 2년에는

어룡성(왕을 가까히서 모시는 관청) 사신이 됬고

그 후 얼마 안되서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이 됬다가

(반란을 일으켜 애장왕을 살해하고) 이 때에 와서

즉위한 것이었습니다


(헌덕왕은 요직 중의 요직을 거치다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렇다고 평가가 좋은 인물은 아니고

노른자같은 요직만 골라서 승진이 가능했던 이유도

개인의 야심도 있었겠지만

당시 신라 왕실에서는 신하들을 견제하려

가까운 핏줄(왕족)들을 요직에 앉히는 경향이 있었고

결국 혈통의 힘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헌덕왕의 왕비는 귀승부인이니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김예영의 딸입니다


(헌덕왕 1년)

이찬(신라 2등벼슬) 김숭빈을 상대등(신라 귀족수장직) 에

임명했습니다


8월 가을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이찬 김창남 등을 당에 보내 이전 왕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당헌종은 직방원외랑섭어사중승 최정을 정사로 ,

인질로 가있던 김사신 金士信 을 부사로 파견하면서

황제의 신임표를 지니고 가서

조의를 표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며

헌덕왕을 책봉해서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


으로 책봉하고

헌덕왕의 아내 정씨를 왕비로 책봉했으며

대재상 김숭빈 등 3명에게 문극 門戟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문에 세우는 갈라진 창) 을 주었습니다


<김부식>생각컨대 왕비는 각간 김예영의 딸인데

여기에서는 정씨라고 했으니 확실하지 않다


헌덕왕 2년

정월(1월) 봄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습니다


하서주 河西州 (오늘날 강원도쪽) 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했습니다


2월

헌덕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람을 보내 국내의 제방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7월 가을

유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갔습니다


서원경 西原京 (오늘날 충청북도 청주시 지역) 에서

흰 꿩을 진상했습니다


10월 겨울

왕자 김헌장 金憲章 을 당에 보내서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등을 바치고 아뢰기를


<헌덕왕의 말>순종(당순종)을 위하여 명복을 빕니다


라고 했습니다


유성이 왕량 성좌에 들어 갔다.


헌덕왕 3년

정월(1월) 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양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원흥이 시중이 됬습니다


2월

이찬(신라 2등벼슬) 웅원을

완산주(오늘날 전라북도 전주시) 도독으로 임명했습니다


4월 여름

헌덕왕이 처음으로 평의전 平議殿 (신라 궁궐 중 하나) 에서

정사를 처리했습니다


헌덕왕 4년

김균정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으로 임명했습니다


이찬 충영이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안석(등받이 방석)과 지팡이를 하사했습니다


9월 가을

급찬(=급벌찬, 신라 9등벼슬) 숭정을

북국 北國 (발해) 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헌덕왕 5년

정월(1월) 봄

이찬 김헌창을 무진주(오늘날 광주광역시)

도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불만 가득한 김헌창>아나 ;; 내가 애장왕때는 시중까지 했는데

감히 날 무진주까지 보내 ?


(김헌창은 애장왕이 숙부 김언승[헌덕왕의 이름]에 맞서

키우려 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이후 김언승이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이 된 후

김헌창을 견제하려 전라도쪽인 무진주로 보낸거 같고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은 한때 왕이 될뻔한 인물인데

왕위를 양보했기에

신라 왕실에서 그를 우대해주었느데

이런 저런 일들로 김헌창은 불만을 점점

품어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월

헌덕왕은 시조묘에 참배했습니다


현덕문 玄德門 (신라시대 궁궐에 있던 문의 하나)

에 불이 났습니다


<라봉봉>김헌창은 헌덕왕 5년에

무진주 도독이 됬고 바로 다음해

헌덕왕 6년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시중이 되는데

2년 뒤인 헌덕왕 8년 에는

청주 菁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도독이 되는데

헌덕왕도 김헌창의 불만을 감지했는지

잠시 중앙 정계에 다시 불러들였다가

또 자신의 성향과 안맞았는지 다시

지방으로 보낸거 같고

이런 불신 등과 김헌창 스스로도

중앙 정계에서 밀린 것에 대한 불안감 등에

반란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헌창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후 반란

'김헌창의 난' 을 일으키는데

신라 9주 5소경 중에서

4주 3소경이 김헌창에 붙었을 정도로

(거의 국토의 절반,,)

초대규모 반란이었다 할 수 있고

당대 점차 불만을 키워가는 시기의 김헌창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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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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