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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 14년

정월(1월) 봄

헌덕왕의 동복 아우 김수종(훗날 신라 42대왕 흥덕왕) 을

부군 副君 (부사장의 부자와 같은 뜻으로

부임금 혹은 서열 2위 이런 식으로 보면 됩니다) 으로

삼아서 월지궁에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김부식>김수종 金秀宗 을 김수승 金秀升 이라고도 한다


2월

눈이 다섯 자 (122.5cm) 나 내리고 나무가 말랐습니다

.

3월

웅천주 熊川州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도독

김헌창은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이전에 원성왕에게 왕위를 넘겨서)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해서

국호를 장안 長安 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무진(=무진주, 오늘날 광주광역시) ,

완산(=완산주, 오늘날 전라북도 전주시) ,

․청주(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

사벌(오늘날 경상북도 상주시)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오늘날 충청북도 충주시) ,

서원경(오늘날 충청북도 청주시) ,

금관경(오늘날 경상남도 김해시)의

사신 仕臣 (5소경의 장관직 즉 국원,서원,금관경의

장관들)

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협박해서 자기 부하로 삼았습니다


(협박으로 부하로 삼았다 하기에 지역들이 너무 전국구 규모고

대부분 옛 백제 지역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아서

김헌창은 옛백제 지역 지방관으로 활동하며

옛 백제지역의 민심들을 이용하려 반란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주 도독 상영이 추화군으로 도주하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대략 황해,경기,강원,경상도) 등의

여러 성은 김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수비했습니다


(즉 옛 백제지역 충청,전라도 지역은 김헌창 세력에 붙었다 할 수 있고

나머지 황해,경기,강원,경상도 지역은 반란에 동조하지 않고

그대로 신라 영역에 붙어 수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삼국시대 말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역 판도가

다시 재현됬다 할 수 있으며

여기서 고구려는 발해로 대응 가능하고

백제는 김헌창의 장안국, 한강 유역을 점거했던 신라는 역시

이때에도 비슷한 영역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월 18일

완산주 장사 長史 최웅과 조아찬 助阿湌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울(=수도, 서라벌)로 도주해와서 변고를 알렸습니다


헌덕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급벌찬, 신라9등벼슬)의

위와 속함군 速含郡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군) 태수의 벼슬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원장 員將 (실제 근무하는 무장[무인]) 8명을 파견해서

서울의 8방을 지키게 하고

그 후에 군사를 출동시켰습니다


일길찬(신라 7등벼슬) 장웅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신라 3등벼슬) 위공과

파진찬(신라 4등벼슬) 제릉이 뒤를 잇고

이찬(신라 2등벼슬) 김균정과

잡찬(신라 3등벼슬) 웅원과

대아찬(신라 5등벼슬) 김우징(김균정의 아들,

훗날 신라 45대왕 신무왕 김우징) 등이

삼군 三軍 (전체 군대) 을 이끌고 출정했습니다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충공과

잡찬(신라 3등벼슬) 윤응은

문화 蚊火 의 관문을 지켰습니다


명기와 안락 두 화랑이 모두 종군(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감) 을 요청해서

명기는 여러 무리들과 함께 황산 黃山 (황산벌쪽으로 오늘날 충청남도 논산시쪽)

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 施彌知鎭 (위치 미상인데 뭔가 백제스러운 이름으로

옛 백제 영역같습니다) 으로 갔습니다


이 때 김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서

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습니다


장웅이 적병(김헌창군)을 도동현에서 만나 격파했습니다


위공과 제릉은 장웅의 군사와 연합해서

삼년산성 三年山城 (오늘날 충청북도 보은군쪽) 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속리산 俗離山 으로 진군해서 적병(김헌창군)을 격멸했습니다


균정 등은 성산 星山 (오늘날 경상북도 성주군) 에서

적과 싸워 격멸시켰습니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자마자

단기간에 각개격파한 신라 관군으로 아직까지는 그래도

중앙정부의 영향력이나

군사력이 양호한 편이었던 신라군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 역시 점점 폐쇄적인 골품제 유지나 사회적 모순들을

개혁하지 못했고 이에 지방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 熊津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에 도착해서

적(김헌창군)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김헌창이 가까스로 몸을 피해서 성으로 들어가 수비했습니다


모든 군사가 그들(김헌창군)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김헌창은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결(자살)했습니다


김헌창의 종자 從者 (부하) 가

김헌창의 머리와 몸을 베서 각각 따로 묻었습니다


성이 점령되자 김헌창의 몸을 옛무덤에서 찾아내서

다시 베고


김헌창의 친족과 도당(불순한 사람의 무리) 239명을 죽이고

그 백성들은 방면(놓아줌)했습니다


후에 전공을 논하여 정도에 따라 작위를 상으로 주었습니다

아찬(신라 6등벼슬) 녹진에게는

대아찬(신라 5등벼슬)의 작위를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습니다


삽량주(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 의

굴자군(오늘날 경상남도 창원시) 은

적지(김헌창의 장안국, 반란 지역) 와 근접한 곳에 있었으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7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했습니다


이에 앞서 청주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태수의

청사 廳事 (관아)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습니다

그 키는 다섯 자(122.5cm)였으며

빛깔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 정도의 아이의 머리 크기만하고

부리의 길이는 한 자 다섯 치( 1치=1/10자로 36.75cm ) 였으며

눈은 사람의 눈과 흡사하고

위장(모이주머니 ?? )은 닷되들이 그릇 정도였는데

사흘 만에 죽었습니다

이는 김헌창이 패망할 징조였습니다


헌덕왕은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충공의 딸 정교를 태자비로 맞았습니다


패강(대동강) 산골짜기의 쓰러진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났습니다

그 싹은 하룻밤에 높이가 열 세 자(3.185m) ,

둘레가 넉 자 일곱 치(115.15cm) 나 자랐습니다


4월 13일 여름

달빛이 핏빛 같았습니다


7월 12일 가을

해에 흑점이 생겨 남북을 가리켰습니다


12월 겨울

주필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라봉봉>비록 신라 하대가 혼란기라 하지만

이는 갑자기 큰 혼란이 왔다기 보다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할때의 강력한 국력이

점차점차 줄어들며 혼란이 커져갔다고 해석할 수 있고


일단 김헌창의 난때 당시는

초대형 반란이었음에도 신속하게 진압하는

신라 정부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김헌창의 난 이전에도

굶주리는 백성들 , 초적(풀도적 = 풀은 민초를 상징 = 백성 도적) 들이

일어났고 그 이전에도 왕위 쟁탈전 등 여러 혼란이 있던 시기였고

당대에 김헌창의 난은 빠른 속도로 진압됬지만

결국 신라 사회의 여러 모순(가장 대표적인 것은

골품제의 폐쇄성, 지방에 대한 차별) 은

신라 멸망 때까지도 해결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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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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