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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더왕 6년

3월 봄

헌덕왕은 숭례전 崇禮殿 (연회용 궁궐) 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즐거움이 극에 달했고 이에

헌덕왕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이찬(신라 2등벼슬) 충영은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5월 여름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헌덕왕이 사자를 보내 수재를 당한 주군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1년 간의 조세와 공물을 면제했습니다


8월 가을

서울(=수도, 서라벌) 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낮이 밤과 같았습니다


무진주(오늘날 광주광역시) 도독 김헌창을

중앙으로 불러 시중(오늘날 국무총리)으로 임명했습니다


<헌덕왕>김헌창이 지방에서 불만이 많은가 보군

당분간 시중으로 지켜봐야겠어 ,,


10월 겨울

대사 大舍 (신라 12등벼슬) 검모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습니다


헌덕왕 7년

정월(1월) 봄

당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당헌종이 사신을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습니다


5월 여름

눈이 내렸습니다


8월 초하루(1일) 기해일 가을

일식이 있었고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흉년 등으로 양식이 모라자 굶주림)이 들어

도적이 봉기하므로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했습니다


(신라의 서쪽지방이니 옛 백제지역이고

이후 김헌창의 난 때 옛 백제지역 대부분이

김헌창에게 붙은 것을 보면

옛 백제지역은 단순히 기근 뿐만 아니라

지역차별, 백제계 차별, 신라 골품제로 인한

경주 출신 왕족, 귀족들만의 국정운영 등등등

이런 저런 이유로 불만이 많았을거 같습니다)


큰 별이 익성 성좌와 진성 성좌 사이에 나타나서 서쪽을 향했습니다

그 빛이 길이는 6척 (147cm) 정도였고

폭은 두 치 (1치 =1/10 척 이니 1척 24.5cm 이면 4.9cm)

가량이었습니다


헌덕왕 8년

정월(1월) 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김헌창이 외직으로 나가서

청주(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도독이 되었고

장여가 시중이 되었습니다


<헌덕왕>안되겠다,, 김헌창은 내랑 안맞어 ,,


,,


<불만이 매우 가득한 김헌창>또 지방으로 밀렸군,,

아오 사람 놀리냐 !!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절동 浙東 지방(중국 절강성 동쪽 같습니다) 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습니다


<신라 백성들>에혀 이나라를 뜨는게 답이겠군,,


(당대 신라 백성들은 점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고

어려워지는 국내 상황에서 '탈신라' 를 선택한거 같고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헌덕왕 재위기간인 811년 8월부터

824년 5월까지 13회에 걸쳐 모두 826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이미 신라 귀족층 내부에서도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게

유행했다 할 수 있고 이런 경향들에

신라 백성들도 당나라, 일본 할 것 없이

외국과 교류하거나 자국에서 살기 어려우면 이주하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대가 개방적이고 국제적 무역이 활발하던 시기라 할수도 있는데

일단 당대 기록은 좋은 면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한산주 漢山州 (오늘날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를 포함하는 신라 행정구역)

당은현 唐恩縣 에서 길이 10척 (2.45m) ,

넓이 8척(1.96m) ,

높이 3척 5촌(촌= 치이고 3척 5촌은 85.75cm)

이 되는 큰 바위가

저절로 1백여 보 이동했습니다


6월 여름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습니다

헌덕왕 9년

정월(1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김충공을 시중으로 임명했습니다


5월 여름

헌덕왕은 비가 내리지 않아 산천에 두루 기도했습니다


7월 가을이 되자 비가 내렸습니다


10월 겨울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헌덕왕은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서

창고를 열어서 그들을 구제하게 했습니다


왕자 김장렴을 당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헌덕왕 10년

6월 초하루(1일) 계축일 여름

일식이 있었습니다


헌덕왕 11년

정월 봄

이찬 진원의 나이가 70세가 되자

안석(등받이 방석)과 지팡이를 하사했습니다


이찬 헌정이 병이 나서 걷지 못하므로

나이 70세가 안되었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 紫檀 (자단나무) 지팡이를 하사했습니다


2월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김숭빈이 사망하자

이찬 김수종(훗날 신라 42대왕 흥덕왕) 이 상대등이 됬습니다

.
3월

초적 草賊 (풀초 도둑 적자인데

풀이 민초, 백성을 상징하기에 초적이란

백성, 민초들로 이루어진 도적무리를 뜻한다 할 수 있습니다)

들이 도처에서 봉기했습니다

헌덕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해서

그들을 체포하도록 했습니다


7월 가을

당나라 운주 鄆州 (산동반도) 절도사

이사도(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산동지역에 제나라를 건국한

이정기의 손자로 제나라 4대왕이자 마지막왕) 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산동지역은 고구려계인물 이정기가

'제나라' 를 세웠고 이후 4대왕이 이사도입니다

당은 이들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절도사, 지방지역으로 말했으나

4대왕까지 나오고

60여년간 이어진 사실상 독립국이었습니다)


당헌종이 이를 토벌하기 위해서

양주절도사 조공을 보내

우리(신라) 병마의 출동을 요구했습니다

헌덕왕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 김웅원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했습니다


(신라의 3만이라는 대규모 파병기록이고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기에

신라의 3만대군이 바다를 건너 산동까지 갔을 것을 생각해보면

신라의 강력한 해군력을 짐작해 볼 수 있고

이는 이후 해상왕이라 불리는 신라 장보고의 동아시아 제해권 장악의

밑바탕이 됬을 것입니다


그렇게 819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제나라가 공격받을때

제나라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사도는 부하에게 죽고 제나라는 당에게 넘어갔다고 합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계가 세운 나라 제나라를 공격한 것은

또다시 동족을 치는 안타까운 기록이지만

당대 제나라는 기반이 미약했고 애매한 위치에 있었기에

짧게 사라져버린 나라입니다


또 신라 내부적으로도 기근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는데

3만 대군을 파병한 것은 큰 무리가 따른거 같고

이후 신라 전국토 거의 절반이 반란에 가담한 초대규모 반란이었던

'김헌창의 난' 이 일어나는데에도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헌덕왕 12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습니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당목종이 인덕전에서 사신을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 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습니다


헌덕왕 13년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연명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4월 여름

시중 김 충공이 사망하자

이찬 영공이 시중이 되었습니다

청주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도독 김헌창이

웅천주(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도독이 되었습니다


(평소 신라 중앙 왕실에 여러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김헌창은 계속 옛 백제지역으로 발령나게 되자

그곳에서 본 소외 된 옛 백제인들의 불만

역시 자신의 처지와도 비슷하고

아예 옛 백제인들을 규합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생각을 품게 된거 같습니다,,)


7월 가을

패강(대동강) 남천 南川 에 있는 두 돌이 서로 맞붙었습니다


12월 29일 겨울

큰 우레(천둥)가 있었습니다


<라봉봉>점차 백성들이 일어나고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당의 파병요청에 3만대군까지 당에 파병한 헌덕왕으로서

점차 신라 내부에서는 귀족,백성들 할 거 없이 불만에 가득차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왕실도 왕위 쟁탈전 벌이고 있었기에

결국 전계층의 혼란시대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다음에 쓸 기록인 헌덕왕 14년에

신라 거의 국토 절반 지역에서 일어났던 초대형급 반란

'김헌창의 난' 이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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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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