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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 15년

정월(1월) 5일 봄

서원경(오늘날 충청북도 청주시)의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졌습니다


<서원경 신라 백성들>으악 벌레다 도망가자 !!


9일에는

흰 색 , 검은 색 , 붉은 색의 세 가지 벌레가

눈밭을 기어 다니다가 햇볕이 나자 사라졌습니다


원순 , 평원 두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이

나이가 70세가 되서 은퇴하고자 했습니다

헌덕왕은 그들에게 안석(등받이 방석) 과 지팡이를 하사했습니다


2월

수성군 水城郡 (오늘날 경기도 수원시 지역) 과

당은현 唐恩縣 을 합쳤습니다


4월 12일 여름

유성이 천시 성좌에서 나와 제좌를 범하고

천시 성좌 동북쪽의 원 성좌 , 직녀 성좌 , 왕량 성좌를 지나서

각도성에 이르러 셋으로 나뉘었는데

북치는 소리를 내면서 사라졌습니다


7월 가을

눈이 내렸습니다


헌덕왕 17년

정월(1월) 봄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 高達山 (오늘날 전라북도 전주시 고덕산 같습니다) 의

적수신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했습니다

(아버지 역시 모반하고 곧바로 진압되자

이번엔 아들이 산적 세력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거 같습니다)


<김범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못이룬 왕의 꿈,,

이번엔 내가 이루겠다 !!!!!!


그들은 평양에 도읍을 세우기 위해서

북한산주를 공격해왔습니다


( 攻北漢山州 공북한산주 )


(북한산주 = 한산주 [황해, 경기, 충청도 지역] 인데

이 기록때문인지 고달산이 북한산 이라고도 해석되는거 같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고덕산 또는 고달산이라 기록되있고

김범문의 아버지 김헌창이 일어난 지역도

충청, 전라도였고 김헌창의 난 당시에는

한산주는 김헌창 세력에 붙지 않았기에

김범문이 한산주 중심인 북한산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보기도 어렵고 아버지 영역에서 소규모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기에

오늘날 전라북도 전주시의 고덕산이 맞아보입니다

그리고 기록에서

북한산주는 '북쪽의 한산주를 공격했다' 로 읽어야 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산주)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김범문)를 잡아 처형했습니다


<김부식>평양은 지금(당시김부식님의 '지금' 은 고려시대) 의

양주(오늘날 경기도 양주시) 인데

태조(왕건)가 지은 장의사 庄義寺 (경기도 양주시의 절) 재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 명산'


이라는 글귀가 있다


3월

무진주(오늘날 광주광역시) 마미지현 馬彌知縣 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 몸이 둘 , 팔이 넷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낳을 때, 천둥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샴쌍둥이로 보입니다)


5월 여름

왕자 김흔을

당 나라에 보내서 조공하고 당황제에게 말했습니다


<김흔이 전한 헌덕왕의 말>이전에 와있는 대학생

최이정 , 김숙정 , 박계업 등을 본국(신라) 으로 돌려 보내주고

새로 입조(조정에 들어감, 여기서는 당나라에 들어감) 한

김 윤부 , 김입지 , 박양지 등 열 두명을

숙위(황제를 모시는 직) 로 머물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그들을 국자감에 배치하여 공부를 하게 하고

홍려시에서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여 주소서.


당황제가 이를 따랐습니다


가을에 삽량주(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 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습니다


우두주(오늘날 강원도 춘천시)

대양관군 大楊管郡 (오늘날 강원도 회양군[오늘날 북한 지역] )

에 사는 내마(=나마, 신라 11등벼슬) 황지의 아내가

아들 둘과 딸 둘을 한 번에 낳았습니다

그녀에게 벼 1백 석을 주었습니다

(신라시대에 다산은 경사스러운 일로 여겨진듯 합니다)


헌덕왕 18년

7월 가을

우잠 牛岑 (오늘날 황해도 금천군) 태수 백영으로 하여금

한산 漢山 (오늘날 북한산) 북쪽의 여러 주와 군에서

1만 명을 징발해서

패강(대동강) 에 장성 300리 (약 117.818182 km ?? )를 쌓게 했습니다


10월 겨울

헌덕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시호를 헌덕 憲德 (법 헌, 덕 덕) 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냈습니다


<김부식> '고기' 에는


'재위 18년 보력 2년 병오 4월에 죽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에는


'장경 보력 연간에 신라왕 언승(김언승, 헌덕왕의 이름)이 사망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 과 '구당서' 에는

모두 태화 5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라봉봉>헌덕왕의 시기는 혼란의 연속이었고

가장 대표적인 사건 '김헌창의 난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의 난)' 이외에도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도적이 된 시기라 할 수 있고

이런 영향등으로 신라인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생존을 모색하며 해외로 나가기도 했고

이에 신라 해적이라 불리는 '신라구' 가 등장해

일본에 해적질을 했다고도 하고

그외에도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속에서

신라인들이 당이나 일본에 인신매매 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나마 간간히 있었던 내정 정비는

헌덕왕의 동생 김경휘(훗날 신라 42대왕 흥덕왕) 의

노력으로 이루어 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마 헌덕왕이 잘한것은

그에게도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어질고 유능한 동생 김경휘를 후계자로 임명한 점 같고

조선시대 피의 군주 태종 이방원의 업적이라면 업적이

첫째(세자), 둘째 아들이 있었음에도

어질고 유능했던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대왕)을 후계로 정해서

한국사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듯이

헌덕왕 역시 내부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들을 제쳐두고

어질고 현명한 동생을 부군(부 임금, 2인자) 에 임명함으로서

나름 김경휘가 왕위에 오르고

신라는 짧게나마 안정,평화를 찾았다고 할 수 있고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찬탈자였음에도

딱히 유능한 모습들을 보여주지 못하고 재위기간 내내 헤메는데

그렇다고 신하들도 일단 찬탈을 했던왕, 유능한 그의 동생 때문에

헌덕왕에게 어떠한 것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헌덕왕 역시 일단 망나니같은 스타일로 국정을 운영했고

그로 인해 신하들도 두려움을 느꼈겠지만

대신 그런 것으로 인한 추진력으로 (어짜피 따지지 말고 막가자는 그런,,)

세 명이나 되는 자신의 아들들을 제쳐두고

동생에게 왕위를 잇게 할 수 있게 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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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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