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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 4년

2월 봄

당은군 唐恩郡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을 당성진 唐城鎭 으로 바꾸고

사찬 沙湌 (신라 8등벼슬) 극정을 파견해서

이 곳을 수비하게 했습니다


흥덕왕 5년

4월 여름

흥덕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되자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승려 150명에게 도첩(승려 자격증) 을 주었습니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흥덕왕 6년

정월 봄

지진이 있었습니다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김우징 (훗날 신라 45대왕 신무왕 김우징) 이 퇴직하고

이찬(신라 2등벼슬) 윤분이 시중이 되었습니다


2월

왕자 김능유와 승려 아홉 명을 당 나라에 보냈습니다


7월 가을

당나라에 갔던 진봉사 進奉使 (중국 황제에게 방물[특산물] 을 바치기 위하여

보내는 사신) 김능유 등 일행이 귀국하다가 바다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당에 사신으로 보낸 아들을 잃은 흥덕왕 입니다,,)


11월 겨울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흥덕왕 7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서

땅의 빛깔이 붉은 색으로 변했습니다


흥덕왕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특사(특별 사면) 했습니다


7월 가을에야 비가 내렸습니다


8월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10월 겨울

흥덕왕은 사자(신하)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무했습니다


흥덕왕 8년

나라에 대기근이 들었습니다


4월 여름

흥덕왕이 시조묘에 참배했습니다


10월 겨울

복숭아와 오얏(자두)나무에 두 번째 꽃이 피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한해에 복숭아와 자두나무 꽃이 두번 핀다는것은

날씨 이상이나 기온차등 여러원인이 있다 하고

불시개화라 하는데 이럴경우 다음해 봄에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지 않기에 재앙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월

시중 윤분이 사직했습니다


흥덕왕 9년

정월 봄

김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임명했습니다

.

9월 가을

흥덕왕이 서형산 西兄山 (신라 수도였던 금성, 오늘날 경주 서쪽에 있는 산 ,

김유신의 누이가 꿈에서 서형산에서 오줌을 쌌는데

오줌으로 온 나라가 잠진 꿈을 꾼 이야기로 유명) 에 행차해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 武平門 (서형산 근처에 있었던 문루 [문위에 세운 다락집] )

에서 활쏘기를 관람했습니다


10월 겨울

흥덕왕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하면서

노인과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과 베를 하사했습니다


흥덕왕 10년

2월 봄

아찬(신라 6등벼슬) 김균정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으로 임명했습니다


시중 김우징이

그의 아버지 김균정이 재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대아찬 김명이 시중을 맡았습니다


(김우징은 훗날 신라 45대왕 신무왕이 되는 인물인데

즉 왕족이었고 당대 얼마나 고위직에 왕족들이 많았는지 [골품제로 인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왕족이 아니면 신라에서는 고위직으로 승진 불가]

김우징도 아버지와 아들이 둘다 신라 최고위직을 맡기에는

눈치가 보여서인지 물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덕왕 11년

정월(1월) 초하루(1일) 신축일 봄

일식이 있었습니다


왕자 김의종을 당에 보내 사은(은혜에 감사)하고

아울러 숙위(황지를 모시는 일) 를 들게 했습니다.


6월 여름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습니다


7월 가을

금성이 달을 범했습니다


12월 겨울

흥덕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흥덕 興德 (일어날, 흥할 흥에 덕 덕 ) 이라 했습니다


조정에서는 흥덕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했습니다


( 흥덕왕은 재위 초에 사망한 장화부인과 금슬이 좋았던 거 같고

장화부인 사망 후에도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거나

유언때 합장한 것 등 애처가였던 인물로 보입니다 )


<라봉봉>분명 훌륭하고 어진 통일신라 군주로 보이는 인물이고

실제로도 평이 좋은 인물입니다

사망때 보인 애처가적 모습은

노국대장공주를 사랑했던

고려의 개혁군주 공민왕이 생각나기도 하고

비록 말기에 재해등이 있기는 했으나 적극적인 구제정책 등

대처를 했던 인물로 보이고 짧은 기간동안이나

신라의 안정기가 다시 찾아오게 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통일신라가 혼란기라 이야기되나 분명

이렇게 여러 인물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왜 신라가 계속 멸망했냐 생각해보면

삼국통일 후의 신라는

옛날 서라벌(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여섯마을 사람들의

나라가 아닌 고구려, 백제까지 통할하는 거대한 대국이 되어 있었는데

계속 정치적으로는 서라벌 사람들끼리만 해먹는,

특히나 경주사람 중에서도 김씨 왕족들만 고위직을 독점하는

'골품제' 가 발목을 잡았다고 할 수 있고

이에 백제, 고구려 유민들은 물론 지방민들, 권력에서 밀린 귀족들

모두가 불만이 점점 커졌다고 할 수 있고

아무리 개인적으로 훌륭한 인물이 나와도

이미 이런 사회적 불만등은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멸망의 원인이 된 거 같습니다


물론 서울(수도) 지역 사람들과

왕족들이 독점하는 구조는

예로부터 있어왔다고 할 수 있었지만

옛 국가를 계승했던 고려, 조선과 달리 신라는 

같은 민족이지만 수백년동안 다른 나라였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까지 흡수한 이후로

이런저런 대처를 못하고 골품제를 고착화 시킴으로서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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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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