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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4대왕 민애왕 김명

재위기간 1년 838~839년


민애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입니다


그는 원성대왕의 증손(증손자) 이며

대아찬(신라 5등벼슬) 충공의 아들입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관직을 거쳐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이 되었던 바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이홍과 함께 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추존하여

선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귀보부인은 선의태후라 하고

아내 김씨를 윤용왕후라 하였으며

이찬(신라 2등벼슬) 김귀를 상대등으로

그리고 아찬(신라 6등벼슬) 헌숭을 시중으로 임명했습니다


2월

김양은 군사를 모집해서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훗날 신라 45대왕 신무왕 김우징) 을 만났습니다


아찬(신라 6등벼슬) 김우징은 청해진에서

김명(민애왕) 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大使 궁복(장보고의 다른 이름으로

궁복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에게 말했습니다


<김우징>김명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아비를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그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소


원컨대 장군의 군사를 빌려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궁복(장보고)은


<장보고>옛사람의 말에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용기 없는 자 '


라고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 庸劣 (변변찮으나) 하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


라고 대답하고

마침내 군사 5천을 그의 친구인 정년에게 주면서


<장보고>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평정하지 못하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12월 겨울

김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장보고의 5천 군사를 이끌고)

염장 ,․장변 , 정년 , 낙금 , 장건영이

순행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 武州 (오늘날 전라도 광주광역시) 철야현 鐵治縣 에 도착했습니다


민애왕은

대감 김민주로 하여금 군사를 출동시켜 싸우게 했습니다


이에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에게

기병 3천을 주어 돌격케 하여 거의 모두를 섬멸했습니다


민애왕 2년

정월(1월) 윤달 봄

김양의 군사가 주야(밤낮으로) 로 행군해서

1월 19일에 달벌(=달구벌, 오늘날 경상도 대구 광역시)

에 도착했습니다


민애왕은 김양의 군사가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신라 2등벼슬) 대흔과

대아찬(신라 5등벼슬) 윤린 , 의훈 등으로 하여금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대항하도록 했습니다


김양의 군사(청해 군사라고도 나오고 장보고의 군사 입니다) 가

다시 한번 싸워 대승했습니다

민애왕의 군사 중에는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습니다


(이를 '달벌 전투' 라고 하는데

백제 계백장군은 5천 정예군으로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에 패했는데

장보고의 5천 정예군은 신라 중앙정부군 10만을 5만명의 살상자를 내고

대승했다 할 수 있고,, 전쟁은 수로 하는것도 아니지만 또 수도 중요한데

당시 신라 중앙군은 원정군이었던 김유신 장군의 5만 정예군과 달리

반란을 막기 위해 급조한 병력이었을 것이고

[그냥 서라벌과 서라벌 부근 인구에서 쥐어짜서 급조한 10만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신라 중앙군 역시 정통성이 약했던 민애왕에게 충성해야 할지

김우징에게 가야할 지 갈팡질팡 + 청해진에서 압도적인 무력으로

바다를 제패하며 압도적인 부를 쌓고있었던 장보고 군의 강력함 등으로

일어난 일 같습니다)


이 때 민애왕이 서쪽 교외(도시 주변지역) 의 큰 나무 밑에 있다가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게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 月遊宅 (민애왕의 별장같습니다) 으로 도주했습니다


(청해진) 군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죽였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 閔哀 (근심 민 , 슬플 애 자로

저는 이름만 보고서는 백성민에 사랑 애자가 떠올랐는데

김우징 세력에 의해 역시 그렇게 좋은 시호가 붙을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라 했습니다


<라봉봉>역사에서는 수많은 반정, 반란이 있었는데

실패한 반란, 성공한 반란이 존재했고

장보고가 지원해서 일어난 당시 내전은

성공한 반란, 쿠데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보고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이후

자신의 사병화된 로마군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고 말하며 로마 수도로 진격했던

'카이사르의 내전' 이 떠오르기도 했고


고려 장수였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며 고려 개경으로

말발굽을 돌린

'위화도 회군' 이 떠오르기도 해서

이름은 장보고의 내전이라 써봤고,,


장보고군의 달벌전투와 카이사르의 내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의

공통점은 개인의 군사력이 중앙정부의 군사력을

압도해서 수도를 함락시킨 사건이라 할 수 있고

이런 인물들은 당대의 영웅적 모습 이외에도

야심가적 모습도 분명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데

야심가적 인물들의 경우 이들을 발탁한 인물이 생존해 있을 경우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뛰어난 공을 세우는 인물이나

(예를 들면 고려 공민왕 생존기당시 이성계 ,

세종대왕 생존 당시 수양대군[세조] 등)


장보고 역시 미천한 출신이었던 자신을 발탁했던

흥덕왕 생존시기에는 백성과 나라를 지키는 장수이자

막대한 부를 바치는 지역 호족으로서 충성을 다한 인물인데

흥덕왕 사후에도 청해진 교역 등으로

계속 힘은 축적되가는데 왕실에서는 권력쟁탈전이 벌어졌고

어디에 있어야 할지 생각하다가

자신에게 의탁해온 김우징 세력의 일원으로 가게 된 거 같고

결국 자신의 사병화된 5천군사로

신라 중앙군을 격파하는 일까지 벌여지게 된 거 같습니다 ,,


저번에 김우징과 장보고의 관계를

김춘추와 김유신의 관계와도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어렸을때부터 친구이자 혼줄로 엮여있었던

또 양쪽 모두 집안이 빵빵했던

김춘추, 김유신과 달리


왕족집안이자 세력가였던 김우징 집안과 달리

장보고는 출신이 미약했던 인물이고

또 어린시절부터의 교접점도 없었다고 할 수 있기에

이후에도 말썽이 많아 장보고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게

김우징과 장보고의 관계였고 하여튼 장보고는

희대의 영웅이자 비극적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장보고는 김우징이라는 정통성 높은 인물과의 결탁 +

민애왕의 찬탈에 대한 명분은 있었기에

정통론자였던 김부식에 의해 좋은 인물로 평가되었고


다르게도 보면 장보고의 동아시아 바다 제패는

동아시에 무역과 한국 문화,사상 발달에 큰 기여가 있었는데

장보고는 중국에서 도자기 기술을 한국에 가져와서

한국에 도자기 제조기술을 퍼트린 인물이라 하고

(고려청자 탄생에 영향)

또 중국에서 불교사상 '선종' 도 수입했는데

엄격한 교리보다는 쉽고 보편성이 높았던 선종은

지방 호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결국 선종을 믿었던

지방 세력에 의해 김부식 당대의 왕조 고려가 건국되었다는 점 ,


그 외에도 무엇보다 외국에 노예로 팔려가던

한국인들을 수호한 인물이라는 점 등 때문에

이미 당대 한국인들에게는 영웅적 인식이 퍼져있어쓸 것으로

보이고 이에 김부식님 역시 분명 군벌로서 왕위 다툼에 개입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본인도 이전에 문벌귀족으로서

묘청의 서경세력같은 반대파를 제거한 적이

있었기에,,)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된 거 같습니다


일단 고려시대에는 영웅적 모습은 인정하나

그정도까지였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전왕조였던 고려를 부정하기 위해

신라 정통론을 띄웠는데 (고려는 고구려 계승이었기에

이에 조선왕조에서는 고구려 - 고려  , 신라 - 조선 이런

구도를 만들려 했던거 같습니다 )

이에 민애왕은 반역자이고

장보고는 반역자를 토벌하고 해적들을 소탕한

충신으로 높게 평가했고

일단 그가 외국에 팔려갔던 자국민을 구원한 인물인 것은

어느 기록을 보더라도 명백한 사실로서

고려, 조선,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르기 까지

그의 이름은 해상왕 海上王 (바다의 왕) ,

혹은 바다의 왕자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장보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장보고의 죽음 이야기는 이후 문성왕 이야기에 나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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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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