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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안중근

 

1879년 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 수양산 아래에서

안중근은 태어났습니다

 

아기였던 안중근의 가슴과 배에는

7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나있었기에

아기 이름은 응칠이라 불렸습니다

 

안응칠 , 이 인물이 훗날

일제에 빼앗긴 한국의 주권과 자유를 위해

일제의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한

'도마 안중근' 의사입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과거에 급제한 진사여서

안진사라 불렸고

응칠이네 집안은 만석꾼이라고도 불리는

부유한 양반집안이었고 안진사네 아들들인

여섯 형제들 역시 글들을 꽤나 잘했습니다

 

응칠이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한학(한문)을 배웠는데

어릴적부터 성격이 가볍고 급해서 무술과 전쟁놀이를 좋아했습니다

 

이런 응칠이의 성격을 고치려고 할아버지는

엄격한 한문교육을 시켜 응칠이에게 글을 가르쳤고

응칠이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당시는 조선 말기였고

당시 조선은 변화하는 세계문명과

동양과 한국으로 침투해오는 서구열강 세력 앞에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개화파와

그것을 반발하는 수구파가 대립하고 있었고

탐관오리에 반발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시대였습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는

개화파의 박영효가 조선정부를 개혁하려

외국에 유학생으로 70명을 선정해 외국으로 유학시키려 했는데

거기에 뽑혔고

그러다 박영효는 모반혐의로 모함당해서

박영효는 일본으로 도망가고 박영효의 주변사람들은 죽거나 잡혔고

안진사 역시 나라를 걱정하다가 난리를 피해

가족들과 해주에서 떨어진

황해도 신천군 두리면 청계동으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응칠이는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무예를 좋아했습니다

 

개화파 인물 박영효

 

응칠이는 무예실력이 뛰어났는데

12살때부터는 총쏘는법도 배웠고

특히 사격실력이 우수해서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중근은

500m 떨어진 솔방울도 한번에 명중시켰다고 합니다

 

솔방울

 

응칠이는 공부보다 무예를 좋아해

부모님의 꾸중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무예를 좋아하자

안진사는 응칠이를 불러 꾸짖었습니다

 

<안진사>너는 앞으로 사냥꾼이 될것이냐 !

 

이에 그 뜻을 알아들은 응칠이는

아버지에게 반발했습니다

 

<안응칠>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굳이 사냥꾼이 말고도

무예를 익혀놔야 나라를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다시 안진사는 응칠이를 설득하며 학문 역시 중요함을 말했지만

응칠이는 고집을 꺾지 않고 총을 메고 산에 올라가 사냥을 했습니다

이에 응칠이의 친구들은 응칠이를 말렸습니다

 

<응칠이 친구들>너의 아버지는 글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는데

너는 어째서 무식한 인간이 되려 그리하냐 ?

 

<안응칠>너희들 말도 옳다

그러나 옛날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

 

라고 했다

그런데도 초패왕의 이름은 길이 남아 전한다

 

초패왕도 장부(대장부)고 나도 장부다 ,

너희들은 다시는 내게 학업을 권하지 말라

 

청계동 근처의 구월산에는 겨울마다 호랑이등을 잡는

사냥꾼이 몰려들었는데

포수들은 안진사네 집 사랑방을 찾아 머물렀고

이곳에서 소년 응칠이 역시 포수들을 따라 사냥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안진사는 응칠이의 사냥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응칠이는 결국 총을 메고 몰래 포수들을 따라 나섰고

 

포수들은 응칠이를 말렸습니다

 

<조선 포수들>아이고 도련님 !

안진사 어른께서 아시면 큰일납니다 ;; !!

 

그러나 응칠이는 당돌하게 따라 나선다 고집부렸고

결국 포수들은 소년 응칠이를 데리고 구월산을 올랐고

짐승들이 나타나자 응칠이는 방아쇠를 힘껏 당겨

짐승에 명중시켰고

포수들은 응칠이의 사격솜씨에 감탄했습니다

 

<포수들>응칠 도련님은 참으로 장군감입니다 ~

 

안중근은 1894년 16살에

김아려라는 아내를 맞아 장가갔는데

결혼한 후부터는 급한 성격을 좀 줄이려

이름에 무거울 중자를 써서 안응칠에서 안중근으로 이름을

개명했습니다

 

당시 조선정부는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서로 세력다툼에 열중이었고

결국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행으로

고부 농민들은 한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종교 동학을 믿고있었던

동학 지도자 전봉준과 함께 '동학 농민운동' 을 일으켜

고부 군청을 습격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

 

동학농민운동은 점차 규모가 커졌고

동학은 양반도 상놈(평민)도 없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 했고

조선에서 전국적으로 교세를 확장해나갔는데

동학의 이름을 팔아서 죄없는 백성들을 습격해서

재산을 착복하는 행패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고

안중근의 마을에도 그런 세력들이 나타나자

안중근은 포수들을 모으고 젊은이들을 모아

70여명으로 마을 자율 방범대 격의 의병을 조직했고

동학을 칭하며 백성을 괴롭히는 이들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 무리들은 수가 많았기에

70여명의 안중근의 의병들이 대결하기에는 무리였고

안중근은 아버지 안진사와 의논한 끝에

밤에 그들을 기습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안중근의 동지>소수들로 어떻게 수만 대군을 대적하겠습니까 ?

 

<안중근>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싸워 백번 이긴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이라 했소

 

내가 적의 형세를 보니

오합지졸이 모인 질서 없는 무리일 뿐이오

 

결국 안중근의 무리들은 안중근을 따르기로 했고

안중근의 선봉대 의병 일곱 사람이 한밤중에

동학을 칭했던 그 무리의 대장이 있는 곳으로

일제히 사격하자

그들은 서로 밀치고 밟으며 도주했고

날이 밝자

안중근의 의병이 수가 적은 것을 깨닫고는

다시 역습해왔습니다

 

이에 안중근은 다시 도망치다

뒤에서 본군이 오자 그들은 도망쳤고

안중근은 많은 총과 탄약과

군량비 1000포대를 전리품으로 얻었습니다

안중근 군은 한명의 부상자도 없이 만세를 세번 부르고

마을로 돌아와 황해도 관찰부에 승전을 보고했고

이에 안중근의 마을에는 더이상 동학당을 칭하는 무리들의

행패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다음해인 1895년 여름에

안진사 집에 두 손님이 찾아와서

안중근이 전리품으로 얻은 1000포대의 군량미는

원래 탁지부 대신 어윤중과 민영준씨가 사둔 곡식이라며

내놓으라 했고

이에 안진사는 웃으며

알바 아니고 이것은 동학당에게 뺏은 전리품이니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했는데

이에 두 사람은 아무 대답없이 돌아갔고

이후 안진사는 서울에서 국고금을 도둑질했다는 모함을 받았고

결국 서울에 올라가 법관에게 사실을 호소하다

권력가였던 민씨에 눈이 찍혀서

안진사는 프랑스인의 천주교 성당으로 몸을 피해 숨었다가

민씨 일도 끝나서 무사하게 됬습니다

 

안진사는 성당에 머물때

강론도 많이 듣고 성서도 읽으며 천주교 교인이 됬고

그후부터 안진사는 천주교 서적들을 싣고

복음을 전파하려 집으로 돌아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동학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일본과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 내에서 청일전쟁을 벌이고

일본이 청나라에 승리하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잡자

일본은 낭인(건달)들을 풀어 조선 왕궁에 들어와

왕비였던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 을 일으키는 등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던 시기입니다

 

그렇게 집에 안진사가 돌아오자

안중근과 안중근의 가족들 역시 천주교 신자가 됬고

안중근은 프랑스 선교사 홍요셉 신부에게

 

'도마(토마스)' 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안중근은 이때부터 천주교를 열심히 믿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을 키웠고

안중근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일본의 침략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안중근 역시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도했고

한국에서는 수만명의 천주교인이 생기며

특히 안중근의 황해도는 8명의 선교사가 머물며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조선에서 널리 퍼진 천주교

 

안중근은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안중근>앞으로 무엇을 해야

우리 나라와 민족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

 

이에 안중근은 교육기관을 설립해서 부국강병을 이루겠다 생각했고

학교를 만들려했고

서울의 민 주교에게 이 의견을 말했는데

민 주교는

 

<민 주교>한국인이 만일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 데 소홀해질 것이니

다시는 그와 같은 의견을 제시하지 마시오

 

라고 거절했고

결국 계속되는 거절에 안중근은 고향으로 돌아오며

 

<안중근>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을 믿지는 않겠다

 

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배우던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안중근의 친구>그런 일 하나로

왜 프랑스어 배우는 것까지 중단하니 ?

 

<안중근>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영어를 배우는 자는 영국의 종놈이 된다

내가 만일 계속해서 프랑스어를 배우다가는 

프랑스의 종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만둔 것이다

 

만일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우리 한국말을 두루 사용할 것이니

자네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게나

 

이에 친구는 할말이 없어 물러갔습니다

 

안중근은 그무렵 금캐는 광산의 주씨라는 감독이

천주교를 헐뜯고 돌아다니기에

피해가 컸던 교회에서는 이를 해결하려 안중근을 대표로 뽑았고

안중근은 그에게 당당하게 따져 물었습니다

 

조선시대 광부들

 

그때 4~500여명의 광부들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

안중근에게 몰려와서 안중근을 공격하려 했고

안중근은 허리에 차고있던 단도(짧은 칼)을 뽑아서

다른 한 손으로 광산 감독의 손목을 잡고 소리질렀습니다

 

<안중근>네가 비록 100만 명 무리를 가졌다 해도,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렸으니 알아서 해라

 

이에 겁먹은 주씨는 광부들을 꾸짖어 물러가게 했고

결국 안중근은 주씨에게 교회를 비방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주씨의 오른손을 잡은 채로

출입문 밖으로 나와 10여리를 같이 간 뒤

그를 놓아주고 무사히 돌아왔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의협심이 강했습니다

 

이후에도 천주교를 믿었던 옹진군민이

서울 사는 전 참판 김중환에게

5천냥을 빼앗기자

이번에도 안중근은 대표로 뽑혀

김중환의 집을 찾아갔고

 

김중환의 집에는 귀한 손님들이 방에 가득히 앉아있었고

안중근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김중환>무슨 일로 찾아 왔는가 ?

 

<안중근>저는 본래 시골에 사는 어리석은 백성이라

 세상 규칙이나 법률을 잘 모르므로 문의하러 찾아 왔습니다

 

<김중환>무슨 일을 물으러 왔는가 ?

 

<안중근>만일 서울에 있는 어떤 고관이 

시골 백성의 재산 몇천 냥을 강제로 빼앗아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법률로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김중환은 잠자코 한참 있다가

 

<김중환>그것이 나와 관계된 일인가 ?

 

<안중근>그렇습니다

어른께서는 무슨 연고로 

옹진 군민의 재산 5000냥을 억지로 뺏고는 갚아 주지 않는 것입니까 ?

 

<김중환>내가 지금은 돈이 없어 갚을 수 없으니

나중에 갚을 계획일세


<안중근>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같은 좋은 집에 많은 물건을 풍부히 갖춰 놓고 사시면서

 5000냥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

 

안중근이 따져묻자 옆에서 듣고있던 한 관원은

 

<관원>김 참판께서는 연세가 높은 고위 관리이고

그대는 나이 젊은 시골 백성인데

어디서 감히 그 같은 예의 없는 말을 하는가?

 

라고 꾸짖자

 

안중근은

 

<안중근>댁은 옛 글을 읽지 못했소?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진 임금과 훌륭한 재상은 

백성을 하늘처럼 알았고

어리석은 임금과 탐관오리들은 

백성을 밥처럼 알았소

 

그랬기 때문에 백성이 부유하면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약하면 나라가 약해지는 것이라오

이처럼 어지러운 시대에 댁들은 국가를 보필하는 신하로서

임금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고

이같이 백성을 학대하니 어찌 국가의 앞날이 통탄치 아니하겠소 ? 

하물며 지금 이 방은 재판소가 아니오

댁이 만일 5000냥을 갖고 그것으로 빚을 갚고자 한다면

나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이에 그는 아무 대꾸하지 못했고

김중환은 안중근에게 난처해하며

 

<김중환>두 사람이 서로 다툴 것 없네

내가 며칠 뒤에 5000냥을 갚아줄 테니 그대는 그리 알고

 너그러이 용서하게나

 

라고 대답했고

안중근은 김중환의 다짐을 받고 당당히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903년 25살의 안중근은

첫 딸을 얻어 '안현생'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1904년 평양에 올라와 석탄상을 경영했습니다

 

이 당시에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야욕을 계속 펼치고 있었고

1904년 2월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군사적으로 자발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한일 의정서' 조약을 체결해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크게 반발했고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한일 친선대사로 파견해

민중의 반말을 무마시키려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그러다 1904년 10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한국에서 청나라와 러시아세력을 모두 몰아낸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탈을 노골적으로 했고

당시 한국인들은 크게 반발했고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이

외국과 관계를 맺을 권리인 '외교권' 을 강탈하려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조약을 체결하라며

8명의 한국 대신들과

광무황제(고종)를 협박했고

광무황제는 계속해서 반대했고 결국 5명의 친일파 한국 관리들로 하여금

일제의 한국 보호라는 명목아래

강제로 조약을 체결했고 그렇게

1905년 을사조약 혹은 을사늑약이 맺어져

한국의 주권인 외교권은 일본에게 넘어가게 됬습니다

 

당시 일본 군인이 칼로 고종황제를 위협하며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모습을 풍자한 그림

 

이에 사람들은 을사늑약을 체결한 5명의 친일파 한국대신들을

'을사 5적(다섯 도적)' 이라 불렀고

을사 오적은

박제순, 이지용 , 이근택 , 이완용 , 권중현

으로 특히나 이완용이 가장 매국에 열심이었고

백성들은 을사오적들에 분노하며 이들을 암살하려고도 했습니다

 

을사오적

 

외교권의 박탈은 곧 나라의 주권을 통채로 뺏김을 의미한다 할 수 있기에

백성들은 을사조약을 규탄하며 의병을 일으키거나

뜻있는 인물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기도 했고

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에 맞섰습니다

 

을사조약 체결에 자살로 순국한 민영환

 

이러한 상황속에서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 역시 울분을 참지못해

병상에 앓아누웠고

27살의 청년 안중근 역시 분노하며 아버지와 은밀하게 상의했습니다

 

<안중근>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했을 때

일본의 선전포고문 가운데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일본이 그러한 신의를 내팽개치고

 야심적인 책략만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의 대정치가라는 이토(이토 히로부미)의 정략입니다

우선 강제로 조약을 맺고 다음으로 뜻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없앤 뒤 

강토를 삼키고 오늘의 우리나라를 망치게 하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조약(을사늑약)입니다

 

이에 다시 안중근은 말했습니다

 

<안중근>그러므로 만일 속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큰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습니까 ?

 

그러나 지금 의거를 일으켜 이토의 정책에 반대한들

우리와 일본의 힘에 큰 차이가 있으니

부질없이 죽음만 당할 뿐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들리는 말에 따르면

청나라 산동과 상해 등지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우리 집안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가 자리를 잡고 살다가

 앞뒤의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제가 먼저 그곳에 가서 살펴본 다음 돌아올 것이니

아버님께서는 그동안 은밀히 짐을 꾸린 뒤 식구들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서 기다리세요

해외에 가서 사는 일은 제가 돌아오는 날 

다시 의논해 결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에 안중근은

아내와 딸 안현생, 아들 안준생을 남겨두고

조용히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와 자식

 

상하이에 도착한 안중근은 민영익을 찼아갔는데

문지기가 민대감은 한국인을 만난지 않는 다면서

안중근을 막았고 다음날에도

문지기는 문을 막았기에 이에 안중근은 화가나서

문앞에서 민영익이 듣건말건 크게 꾸짖었습니다

 

<안중근>그대는 한국인인데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나려는 것인가 ? 

더욱이 그대는 한국에서 여러 대를 국록을 먹던 신하가 아니던가 ?

 그런데 이같이 나라가 어려울 때 전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누워서 조국의 흥망을 잊어버리고 있으니

 세상에 어찌 이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는가 ?

 오늘날 나라가 위급해진 것은 그 죄가 전적으로 

그대들과 같은 고관들에게 있는 것이고

민족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굴이 부끄러워서 만나지 않는 것인가 ?

 

라고 욕설을 퍼붓고는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고

한국인 동포들을 만나며

현재 위태로운 한국의 형세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들 역시 먹고살기 바쁘다며 그런 말하지 마라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안중근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했습니다

 

<안중근>우리 한국 사람들의 생각들이 모두 이러하니

나라의 앞날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겠구나

 

안중근은 상하이 여관에 돌아와 침상에 누워

분통터지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워했고

그러다 옛날에 황해도에서 전도하며 안중근과 교류하던

프랑스인 곽신부를 만나서 서로 반가워했고

곽신부는 안중근과 같이 여관에 와서 이야기를 하다가

 

<곽 신부>네가 무슨 일로 여기에는 왜 왔느냐 ?

 

라고 물었고

 

안중근은

 

<안중근>신부님께서는 지금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듣지 못했습니까 ?

 

<곽 신부>나는 이미 오래 전에 들었지

 

<안중근>현재의 상황이 그러하니 어쩔 도리가 없이

 가족들을 외국으로 옮겨 살도록 하려고 합니다

외국에 살면서 이곳 동포들과 연락해 

주변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우리나라의 억울한 사정을 설명해

공감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단번에 의거를 일으키면 목적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이에 곽신부는 자신은 종교인이라 정치는 상관없지만

안중근의 마음이 안타깝다며

자신의 조국 프랑스가 독일과 싸울때 이야기를 해주며

프랑스인들이 외국으로 도피해 자신의 지역을 비워두다가

독일에 찾지 못했다며

한국을 떠나 독립운동하는 것보다

한국에서 교육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조언해줬고

결국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고국에 돌아오자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는 세상을 떠났고

안중근은 불효에 슬퍼하며 아버지 제사를 지낸 후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갔고

재산을 정리해서 삼흥학교를 세워서 인재양성에 힘쓰려 했지만

일제에 의해 학교는 강제로 문을 닫았고

안중근은 다시 학교를 인수해 젊은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김진사라는 인물은 안중근에게 와서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와 친했다며

안중근에게 백두산 뒤의 간도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한국인들이 100여 만명이 살고있다며

그곳은 물산이 풍부해 군대를 일으킬만하다며

조언해주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크게 어지러워서

망해가고 있었고

미국에서 유학하다 돌아온 '도산 안창호' 라는 인물은

한국을 돌아다니며

민족의 실력양성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연설하고 있었고

안중근 역시 안창호의 연설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도산 안창호

 

이후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세계 열강 강대국들이 회의를 하는

'만국 평화회의' 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열사들을 비밀리에 보냈고

세 열사들은 네덜란드에서 일제의 조선 침탈에 대한 야욕과

부당함을 호소하다가 일제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고

(헤이그 특사 사건)

 

왼쪽부터 이준 , 이상설 , 이위종 열사

 

결국 고종황제는 일제에 걸려 강제로 퇴위됬고

일제는 고종의 황태자 순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앉혔고

이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큰 개입을 했습니다

 

당시 진남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안중근은

일제와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킨 것에

큰 울분을 참기 어려웠고 당시 한국 2000만 국민들이

일제히 일어나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안중근 역시 일본에 투쟁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29살 나이로 가족들과 이별하고 급하게 북간도로 향했습니다

 

간도 위치도

 

북간도에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에

안중근은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한국인 청년회에 들어가 임시 감찰로 뽑혀 회원들을 살피는 일을 했고

그곳에서 옛날 한국의 간도(만주)지역을 관리했던

이범윤이라는 인물과 교류했고

(한국의 간도[만주] 영토 문제 이야기를 할때

나오는 인물로 조선정부에서 파견한 간도 관리사입니다)

 

이범윤은 러일전쟁때 러시아의 편에서서 일본과 싸우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피난해와 살던 인물이었고

안중근은 이범윤에게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칠것을 주장했는데

이범윤 역시 안중근의 말을 옳다 여기면서도

자금과 군사를 마련할 길이 없어 탄식했습니다

 

이범윤

 

이후 안중근은 그곳에서 의협심이 뛰어났던

엄인섭 , 김기룡이라는 인물과

의형제를 맺어

엄인섭이 큰형 , 안중근이 둘째 , 김기룡이 셋째가 되었고

결국 모여서 일을 할 것을 계획하고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한국 동포들에게 연설을 하며 군자금을 모았습니다

 

안중근은 연설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중근>그들(일제)은 기름진 전답과 

심지어는 옛 분묘(무덤)들에도 군용지라는 푯말을 꽂고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그들의 재앙이 우리의 백골(뼈)에까지 이르렀으니

국민 된 사람으로 또한 자손 된 사람으로 

어느 누가 분함을 참고 욕됨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



그래서 2000만(당시 한국인 인구) 민족이 일제히 분발해

 삼천리 강산에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애통하게도 저 강도 같은 일본은 

도리어 우리를 폭도라고 부르며

군사를 풀어 토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참혹한 살육이 자행돼

두 해 동안에 해를 입은 한국인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남의 강토를 빼앗고 사람들을 죽이는 자가 폭도입니까 ?

제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막는 사람이 폭도입니까 ?

 

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닙니까 ? 

한국에 대한 정략이 이같이 포악해진 근본을 논하자면

그것은 이른바 일본의 대정치가라는 

늙은 도둑 이토 히로부미의 폭행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토는 마치 한민족 2000만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원하고 있는 것처럼 꾸며대면서

지금 우리가 태평무사하며 

평화롭게 날마다 발전하는 것처럼 날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위로는 천황(일본왕)을 속이고

밖으로는 열강들의 눈과 귀를 가려서

자기 멋대로 농간을 부리며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 어찌 통분할 일이 아닙니까 ?

 

우리 한민족이 만일 이 도둑놈의 목을 베지 않는다면

 한국은 필히 없어지고야 말 것이며

동양도 앞으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

 

사정이 이러하니 오늘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총을 메고

 칼을 차고 일제히 의거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기고 지고 잘 싸우고 못 싸우고를 돌아보지 말고 

통쾌하게 한바탕의 전투를 벌여 

천하 후세에 부끄러운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같이 힘든 전투를 할 경우

세계 열강의 여론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독립할 희망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본은 불과 5년 이내에 

반드시 러시아 , 청국 , 미국 등 3국과 더불어 전쟁을 시작하게 될 것이니

그때는 한국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때 만일 한국인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면

설사 일본이 진다 해도 한국은 다시 

다른 도둑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의병을 일으켜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싸워

좋은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스스로 강한 힘으로 국권을 회복해야만 

건전한 독립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스스로 할 수 없는 자는 망할 것이요

스스로 할 수 있는 자는 흥할 것'

 

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까 ?

분발해 힘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 

개개인이 모두가 결심하고 각성하며

 깊이 생각해 용기 있게 전진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런 연설들을 하며 지방을 돌자 이에 안중근을 따르는 자가 많아

그의 군사가 되겠다거나 무기를 내놓거나 군자금을 내놓은 인물들이

나타나 결국 안중근은 2~300여명의 의병을 일으키게 됬습니다

 

33살의 안중근은 이범윤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고

스스로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의 직책으로 뽑혔고

(오늘날에도 한국은 안중근을 개인적 투사가 아닌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군인이자 한국군 장군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제에 대항할 힘을 길렀습니다

 

이후 1908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2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뗏목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서 함경북도 경흥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해

진지를 점령했고

이후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10명 가까운 일본 군인을 생포했습니다

 

<안중근>그대들은 모두 일본국 신민들이다

그런데 왜 천황(일본왕)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는가 ?

 러일전쟁을 시작할 때 선언서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굳건히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침략하고 약탈하려고 아우성이니 

어찌 이것을 평화와 독립이라 할 수 있겠느냐 ? 

이것은 역적이나 강도가 하는 짓이 아니냐 ?

 

일본 포로들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일본 포로들>우리들이 이곳에 온 것은 본심이 아니요

부득이한 사정으로 온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만리타향 전쟁터에서 끔찍하게도

 주인 없는 원혼들이 돼 버리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에 아니라

오로지 이토 히로부미의 잘못 때문입니다

이토는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권세를 주물러서 

일본과 한국 두 나라 사이에 귀중한 생명을 무수히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계속해서 일본 포로들은 통곡했습니다

이에 안중근은 그렇다면 살려보내줄테니

그런 자들을 쓸어버리라며 동양평화에 힘쓰라 했고

이에 안중근 장군의 장교들은 불평을 하며 안중근에게 말했습니다

 

<안중근 장군의 장교들>어째서 포로로 잡은 적들을 놓아주는 것이오 ?

 

이에 안중근이 대답했습니다

 

<안중근>현재 만국 공법에 포로가 된 적병을 죽이라는 법은 없다

어느 곳에 가뒀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돌려보내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의로운 말이라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장교들은 일본군은 한국 의병포로를 잡으면

참혹하게 죽인다 항변했지만

그럼에도 안중근은 그런 행위는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분노케 한다며

우리가 저들같이 야만의 행동을 똑같이 행동할 수 없다며

간곡하게 타이르며 일본군 포로들을 무기까지 돌려주며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안중근과 의병들간의 갈등은 커져서

부대를 이탈하는 의병도 나타났고

안중근에게 석방된 일본군 석방포로들은 안중근의 위치를 알려주어

안중근군은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참패해

의병을 결성한지 1년도 안되서 해체됬습니다

 

<안중근>어리석도다 나 자신이여 ! 

저런 무리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안중근은 다시 홀로 남은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조국에 독립에 힘써야겠다고 생각한 안중근은

살아남은 3명의 동지들을 찾아서

일제에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세 사람의 의견은 모두 달랐습니다

 

<동지 1>목숨이 붙어있는 한 살아야 한다

 

<동지 2>자살하고 싶다

 

<동지 3>차라리 일본군의 포로가 되겠다

 

이에 안중근은 시 한수를 동지들에게 읊어주었습니다

 

<안중근>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서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다시 안중근은 말했습니다

 

<안중근>그대들은 모두 뜻대로 하라

나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일본군과 한바탕 장쾌하게 싸우겠다

대한국 2000만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된 의무를 다한 다음에

여한이 없이 죽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총을 들고 일본군 진영을 향해 갔고

이에 한 사람이 뒤따라와 안중근을 붙들고 통곡하다가

안중근에게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다

큰일을 도모하자 설득했고 이에

안중근은 생각을 바꿔 3명의 사람들과 동행해

길을 찾아나섰습니다

 

이후 안중근 이랭은 4~5일동안 지나며

밥한끼 못먹고 신발도 신지 못해서

춥고 배고픈 고생을 해서

풀뿌리를 캐어먹고 담요를 찢어 발을 싸매

서로를 보호하고 위로하며 길을 갔습니다

 

<안중근의 동지들>아아 너무 고되고 힘듭니다,,

 

<안중근>너무 걱정들 마시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인데 근심해서 무엇하리오 ? 

사람은 극심한 곤란을 겪은 다음에야 

반드시 남다른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죽음의 땅에 빠진 다음에야 살아나는 것이라오

이렇게 낙심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소 ?

 하늘의 뜻에 맡기고 기다려봅시다

 

그러다 산의 민가를 발견해 조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고

집주인은 일본군이 온다며

일본군은 의병에게 밥을 줬다는 구실로 그자리에서 쏘아 죽인다며

어서 빨리 떠나라 했습니다

 

이후에도 안중근은 천주님(하나님)에게

기도드리며 계속해서 고난의 행군을 하다가

겨우겨우 러시아 영토 노우키예프스크로 들어왔고

안중근의 친구들도 뼈와 가죽만 앙상히 남은 안중근을 보고

쉽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안중근은 그곳에서 10여일동안 묵으며

건강을 회복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동포들의 환영행사에 초대됬지만

극구 사양하며 말했습니다

 

<안중근>패전한 장수가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들의 환영을 받을 수가 있겠소

 

이에 여러 사람들은 안중근을 환영해주면서

 

<한국 동포들>이기고 지는 것은 전쟁터에서 항상 있는 일인데

 무엇이 부끄럽소 ?

 더구나 그같이 위험한 곳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으니 

어찌 환영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

 

결국 동포들은 안중근을 크게 축하해주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안중근은 이후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지원을 부탁하며 단체를 조직해 군사훈련에 힘썼고

1909년 3월 2일

연추 부근의 안중근 집에서는 12명의 동지가 안중근과 모여있었고

결국 안중근은 12명의 동지와 상의하며 말했습니다

 

<안중근>우리들이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뿐만 아니라 특별한 단체를 만들지 않고는 

아무런 일도 도모하지 못해 목적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오늘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동맹의 표시를 한 다음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단체를 만들어 

기어코 목적을 달성토록 하는 것이 어떻소

 

이에 모두가 따르겠다했고

안중근이 준비한 칼로 자신의 왼쪽 약지(네번째 손가락)를

내려 찍어 자르자

열 두사람은 각각 왼손 네번째 손가락을 끊어서

그 피로 태극기 위해

'대한 독립' 이라는 네글자를 크게 썼고

대한독립 만세를 세번 부르고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습니다

 

안중근이 태극기에 손가락을 잘라 피로 쓴 '대한독립' 혈서

 

네번째 손가락이 잘려있는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

 

그러다 1909년 9월

안중근은 아무 이유없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했습니다

 

<안중근>나는 지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하오

 

<안중근의 동지들>왜 그러는 것이오 ?

왜 갑자기 아무런 기약도 없이 졸지에 가려는 것이오 ?

 

<안중근>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공연히 마음에 번민이 일어나서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러 있을 생각이 없소

그래서 떠나려는 것이오

 

이에 동지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안중근의 동지들>이제 가면  언제 오는 것이오 ?

 

안중근은 무심코 대답했습니다

 

<안중근>다시 돌아오지 않겠소

 

안중근의 동지들은 괴이하게 생각했고

안중근 역시 무의식중에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렀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얼마후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온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안중근은 신문을 여러개 사서보니 과연 그가 몇일후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에 도착한다고 나왔습니다

안중근는 남몰래 기뻐했습니다

 

<안중근>몇 년 동안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었구나 !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

 

결국 안중근은 의병장 이석산을 찾아가

100원을 꿔달라 청했는데 그가 들어주지 않자

위협해서 100원을 강제로 빼앗았고

이후 거사전에 시 한수를 지었습니다

 

<안중근의 시 '장부가'>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크게 바라봄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워지며

쟝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쥐새끼 이등(이토 히로부미 = 이등박문) 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럴 줄을 헤아렸으리요 

사세가 원래 그러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안중근은 1909년 음력 9월 13일 , 양력 10월 26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새옷을 모두 벗어두고

수수한 양복 한벌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권총을 지니고 오전 7시에 이토 히로부미가 내린다는

하얼빈역으로 나갔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권총

 

하얼빈역 정거장에는 러시아 장관과 군인들이 많이 나와

이토 히로부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9시쯤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일때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했고

군인들이 경례하고 군악대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곧 러시아 일반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맨앞에 누런 얼굴의 흰수염을 가진 늙은이가 걸어오고 있었고

안중근은 생각했습니다

 

<안중근>저것이 필히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

 

하고 곧 안중근은 권총을 뽑아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에 신속하게 4발의 총을 쏘았습니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안중근 의사

 

그리고 안중근은 곧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안중근>대한독립 만세 !

대한독립 만세 !

대한독립 만세 !

 

끌려가는 안중근 의사

 

안중근은 헌병에게 끌려갔고

이후 일본관리에게 넘겨졌고

 

체포 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때 옷차림의 안중근

 

'왜 이토 히로부미를 헤쳤는가'

 

라고 심문받았고 이에 안중근은 대답했습니다

 

<안중근이 대답한 이토를 살해한 15가지 이유>

1.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광산·산림·하천 등을 마음대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발행, 마음대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하고 신문 읽는 권리를 금지시킨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일본왕)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15. 일본 현 천황의 아버지 효명천황을 살해한 죄

 

라고 대답했고

일본 검찰관 미조부치는 놀라면서 안중근에게 말했습니다

 

<미조부치>지금 진술하는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의사 義士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

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의사이니까 절대로 사형받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라고 대답했고 안중근은

 

<안중근>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소

단지 내 뜻을 빨리 일본 천황에게 알리시오

그래서 속히 이토 히로부미의 옳지 못한 정략을 고쳐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잡는 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오

 

라고 대답했고 곧바로 지하실 감옥에 갇히고

4~5일후 여순 감옥으로 가게 됬고

이곳에서 일본인 재판장의 재판을 받게됬습니다

 

쇠사슬과 족쇄를 찬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오늘 내가 이렇게 당하는 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

나는 당당한 대한국의 국민인데

 어째서 오늘 일본 감옥에 갇혀 있는가 ? 

더구나 내가 일본 법률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라도 했다는 말인가 ? 

판사도 일본인 , 검사도 일본인 , 변호사도 일본인 , 

통역관도 일본인 , 방청인도 일본인이 아닌가 ?

이것이야말로 벙어리가 연설하고

귀머거리가 방청하는 것 아닌가 ?

내가 진정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

꿈이라면 어서 깨어나라

어서 빨리 깨어나라 !

 

안중근은 탄식했습니다

 

이 사건에 세계 여론이 일제를 주목했고

일제는 한국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한 야욕을 숨기기 위해서

안중근의 법안을 예심도 거치지 않고 직접 공판에 회부시켰고

세계 여론은 안중근을 후원하고 자진해서 지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일본 내에서도 안중근은 간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라며

여러 논란이 있었습니다

 

일본간수의 입회아래에서 두 아우 안정근과 안공근을 면회하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

 

 

안중근은 옥 내에서도 의젓하고 의연히 행동하며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계속해서 자신이 일반 살인 범죄자가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전쟁포로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라 주장했습니다

 

결국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감옥에 돌아와 사형날을 기다렸습니다

 

사형 집행전까지 안중근은 여러 글들을 썼고

'동양 평화론' 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고

자서전 '안응칠 역사' 라는 책도 썼습니다

특히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회해서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동양평화론' 이 완성될 때까지 사형집행을 늦춰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여러 글들을 남겼고

죽기 전 유언을 남겼습니다

 

<안중근의 유언>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은 옥중에서도 의연히 글들을 썼고

평소 안중근을 감시하던 감시병 일본헌병 치바 도시치는 안중근의 인품에 감동하며

안중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치바 도시치>안씨 ,

나는 일본의 군인 , 특히 헌병이기 때문에

 당신과 같은 훌륭한 분을 중대범인으로 간수하게 된 것이 매우 괴롭소

 

이에 안중근은 오히려 그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안중근>아니오 당신은 군인으로서 당연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오

이토 때문에 굴욕적으로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뒤에

나는 동지들과 대한제국 의병대를 결성하고 그 참모중장이 되었고

이 의병에 속하고 있는 동지들은 각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독립과 평화를 위해 동맹하는 것이며

농부는 농사에 , 선전유세를 담당하는 사람은 선전유세로 , 

이와 같이 각기의 임무를 별도로 하고 있소

이토를 죽이게 된 것도 나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소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일단 유사시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 본분이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자기의 임무에 최후까지 충실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요

 

이에 치바 도시치는 또다시 감동해 그에게 휘호(붓글씨) 를 요청하나

안중근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사형날 당일

안중근은 하얀 비단 한복을 입고 치바 도시치에게 말했습니다

 

<안중근>치바씨 그때 말한 것 오늘 씁시다

 

하고는 붓으로 종이위에

 

爲國獻身軍人本分 위국헌신 군인본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라고 써서 손가락이 잘린 자신의 손으로 도장까지 찍어

치바 도시치에게 주었고

치바 도시치는 그것을 평생 간직했고

이 '위국헌신 군인본분' 은 대한민국 국군의 슬로건(선전 문구)이 됬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 유묵(남긴 글씨)

 

어머니가 짠 흰색 두루마기(수의)와 검정바지를 입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안중근 의사 (순국 5분전 사진)

 

안중근 의사는 기도를 마친후 32세의 젊은 나이로 뤼순 감옥 사형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은폐되어

아직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의 순국 이후부터 한국의 독립운동을 향한 열망과 의지는 더욱 커지게 되었고

한국에는 수많은 독립투사 , 열사 , 의사들이 나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라봉봉>한국의 위인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는 '단지' 로 불리며 한국에서 전설적인 이야기가 되었고

뛰어났던 그의 담력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도마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려 노력하신 한국 독립운동가로

그는 장군이자

의사 義士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 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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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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