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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을 입은 충무공 이순신
군복을 입은 충무공 이순신

 

1545년 음력 3월 8일 ,

양력 4월 28일 한성(서울) 건천동에서 이순신은 태어났습니다

 

<아기 이순신>응애 ! 응애 !

 

아기의 울음소리는 참으로 컸습니다

 

이순신의 아버지는 태어난 아기가

중국의 어진 임금 순 舜 임금같은 어진 조선 신하가 되라는 의미로

순 舜 (순 임금) 신 臣 (신하 신)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순신의 집안은 덕수이씨 가문으로 양반가문이었는데

이순신대에는 가난한 선비집안이었습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조광조 같은 인물들과

어진 정치를 행하려다가 모함으로 처벌을 당했고

이백록 이외에도 많은 선비들이 이때 죽었는데

이 사건을 '기묘사화' 라고 합니다

 

이에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벼슬자리로 가려하지 않고

조용히 글만 읽었고

가난한 선비집안에서의 어린 이순신은

얼굴이 잘생기고 기풍이 있으며 남에게 속박받고 싶어하지 않는

자유로운 어린이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나무를 깎아서 화살을 만들어서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했는데

동네 아이들도 이순신의 호연지기(바르고 큰 마음) 를 높게 여겨

어린 순신이를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어느날은 순신이가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동네 어른들이 아이들이 놀던 길을 지나게 되었고

이에 순신이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순신>우리는 지금 훈련을 하고 있으니 비켜가십시오

 

<어른들>무례하구나 !

 

이에 이순신은 어른들에게 활을 겨누었습니다

 

<이순신>우리는 노는게 아니라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어른들은 이순신을 피해 비켜갔고

어린 이순신은 늘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니면서

마을 어른이라도 도의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즉시 활을 겨누어서

위협했고 이에 어른들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외에도 이순신은 어린시절 류성룡과 교류했는데 유성룡은 후에

임진왜란때 활약한 명재상이자 이순신을 크게 도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류성룡

 

이순신의 집안은 가난했기에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이순신이 13살정도에 가족들을 데리고

한성에서 외가집인 충남 아산 송곡리로 이사했고

이때부터 이순신은 글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이순신은 1565년 8월 21세의 나이로

보성군수를 지낸 부유한 양반 방진의 딸과 혼인을 했고

방진은 무남독녀 , 어렵게 얻은 외동딸 하나만 있었던 인물이고

가난한 청년 이순신이었지만

이순신의 품성과 자질을 높이 사서 이순신에게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이순신의 부인 역시 지혜롭고 의기가 호방했던 여인이었고

하루는 방진의 많은 재산을 탐낸 도둑들이 방진의 집을 습격했는데

방진은 활쏘기를 잘해 급하게 화살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도둑들이 훔쳐낸 뒤였고

방진은 방안에서

 

<방진>화살 , 화살이 어디있느냐 !!

 

라고 소리쳤고

이에 그의 딸 방씨 처녀는

베 짜는데 쓰는 대나무를 한아름 안아다가

바닥에 던지며 화살 떨어트리는 소리를 내며

 

<방씨 처녀>여기 있사옵니다 !!

 

이에 눈치를 챈 방진은

 

<방진>그래 , 여기 화살이 또 있었구나 !

 

하고 소리쳤고 이에 도둑들은 놀라서 도망갔습니다

 

이순신은 그렇게 지혜로웠던 방씨 처녀와 혼인을 맺었고

사실상 방씨처녀가 이순신에게 시집간게 아니라

이순신이 방씨처녀에 장가를 들었고

이순신은 이 무남독녀 방씨집안에 장가를 들어 처가에 들어가 살며

집안을 이으며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방진은 원래부터 무인으로 살았던 인물이었기에

사위 이순신에게 무인이 될것을 적극 권유했고

이에 장인의 영향을 받은 이순신은

22살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거친 무인의 모습보다는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었고 실제 그는 용장(용맹한 장수)보다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장(지혜있는 장수) 이자 덕장(덕있는 장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문, 무 모두 열심히 노력해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다

 

1582년 (선조 5년) 28세의 이순신은

무과시험에 응시했는데

늠름한 모습과 뛰어난 활솜씨에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달리는 시험을 보는 중

말이 거꾸러졌고 이순신은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이순신의 왼쪽 다리가 부러졌고

사람들은

 

<무과 시험을 구경하는 사람들>죽었나 ?

 

하고 그를 살펴보았는데

그는 곧 한쪽 발로 일어서서

앞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겨서

자신의 다리에 싸매고는 다시 끝까지 시험을 완수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훌륭히 여겼지만

일단 말에서 떨어졌기에 이순신은 무과 시험에서 낙방하게 되었습니다

 

낙마하고 버드나무 껍질로 다리를 감싼 이순신

 

결국 4년뒤 32세의 나이로 이순신은 무과시험에 급제했고

이순신은 29명의 합격자 중 12등이었는데

평소 선비집안에서 자라며 장인 방진의 도움으로

집뒤의 방화산이나 집앞 야산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쏘며 홀로 무예를 연마했던 그가 군인 출신들 사이에서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라고도 이야기 되고 있고

 

실제 당시 조선 장수들이 대부분 거칠고 무예에만 치중해

유교적 , 학문적 소양이 부족했고

무인들은 문인들보다 대접도 좋지 않았는데

하여튼 이순신은 무예 수련 전부터 유학적 공부를 열심히 한 인물이고

다른 장수들과는 다른 장수였던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순신은 33세의 나이로 뒤늦게

무인으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발령이 늦어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빠른 출세를 위해

뇌물을 쓰라 권유했지만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순신>사나이 대장부로 세상에 나서 나라에서 쓰여지면

 충성을 다해 죽기를 각오하고 봉직할 것이요 ,

 쓰여지지 않는다면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이순신은 타협을 모르는 인물이었고

이러한 그의 강직했던 성품은 죽을때까지 이어졌는데

이로 인해 평생동안 여러 시기와 질투 , 오해와 모함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순신은 첫 발령으로

함경도라는 조선 최북단이자 척박한 지역에 하급 무관으로 발령받았고

이곳에서도 열심히 일하며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후 병조판서 김귀영의 눈에 띄어

김귀영은 이순신에게 자신의 딸을 첩으로 보내려 했지만

이순신은

 

<이순신>권세 있는 집안에 의탁하여 출세를 도모하는 것은

사나이가 취할 바가 아니다

 

하고는 부인과의 의리를 지켰습니다

 

이순신은 1580년 (선조 13년) 36세의 나이에

전라 좌수영에서 수군 만호직을 받아

처음으로 수군(해군) 생활을 했고

사람들은 청렴하고 올곧은 모습의 그를 모함하고 질투했는데

하루는 그의 상관 성박이라는 인물이

근처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고

그 나무를 베어오라 했는데

이순신은

 

<이순신>나라의 물건을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을뿐더러 ,

수십 년 간 자란 오동나무를 하루아침에 베어버릴 수는 없다

 

하고 상관의 명령을 거절했고

이에 그는 이런 모습들에 상관들의 눈에 나서

모함받을뻔 했지만 평소 청렴했기에 그를 책잡을만한 거리가 없어

흐지부지 되다가

결국 이순신은 1582년 38세의 나이에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파직당했고

이때에도 이순신은 활쏘기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율곡(율곡 이이 , 5천원 지폐로 유명한 조선 성리학자 , 한국의 위인) 이

이조판서였는데 이순신과 이율곡은 같은 덕수이씨 가문이었기에

주변에서는 이순신에게 이율곡을 만나보라 권유했지만

이조판서직은 인사권 (사람을 등용하는 일) 을 가진 직책이었기에

함부로 친척들과 어울리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울 수 있었고

이에 이순신은

 

<이순신>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는 만나보는 것이 옳지 못하다

 

라며 거절했습니다

 

율곡 이이 (이율곡)

 

결국 1583년

39세의 이순신은 다시 군관으로 복귀하게 됬고

이해 10월에 함경북도 두만강변에서 여진족들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이곳에서 여진족을 유인해서 숨겨놓은 병사들로

그들을 토벌했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큰 상을 내리려 했지만

북병사 김우서라는 인물은 이순신이 아무런 논의 없이

독단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장계(글)를 조정에 올렸고

이에 이순신의 포상은 취소됬습니다

 

이해 11월 15일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이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함경도에 있던 이순신은 뒤늦게야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곧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의 3년상을 치뤘는데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안 조선 조정에서는

상중의 이순신이 언제 복귀할 수 있는지 자주 물었다고 합니다

 

이후 3년상을 끝내고 다시 무관에 복귀한 이순신은

이후 1587년(선조 20년) 43세에

두만강에 있는 한국의 섬 녹둔도를 지키게 되었고

비옥한 이 섬에서 병사들과 '둔전' 이라는 군량미 농사도 지었고

섬을 지키다가 여진족이 쳐들어와 우리 군사 10명을 죽이고

농민 160여 명을 사로잡아가자

이순신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여진족 진영에 들어가서

여진족 두목과 적군의 목 3개를 베고

자신의 다리에는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고

백성들을 60여명이나 구출해왔는데

조선군의 피해도 있었기에

이순신의 상관 이일은 이전투의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갈까봐

보고서에 조선측의 피해만 언급하며 이순신을 모함했고

이에 거짓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처벌을 논의하다

평소의 공적을 고려해서

백의종군 (白衣從軍 벼슬 없이 흰 옷을 입고[관직과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참전케 하는 처벌) 을 명했습니다

 

이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다음해 1월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여진족 거점지를 점령하는 공을 세워 다시 벼슬로 복권됬고

고향 아산으로 내려왔습니다

 

당시 이순신은 형들이 죽어서 자신의 가족 이외에도

많은 친척들 까지 부양하게 되었던 상태였고

이후 이순신은 정읍 현감직을 맡아 발령됬는데

당시 자식들과 형조카들까지 40여명의 대식구를 데리고

부임지로 이동했고 이에 관리의 덕목에 어긋난다며

'남솔' 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이순신은 남솔로 비판받을지언정 불쌍한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면서

조카들을 자신의 아들들 보다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또 부임지에서 공정하고 청렴한 정책을 펴며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후 이순신은 승진하며 고위 직으로 가며

대기만성(천천히 성공) 형 모습을 보여주었고

 

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어린시절부터의 친구 류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고

수군력 강화에 노력했고

일본군에 맞설 수 있는 판옥선과 총통(화포)들을 만들었고

특히 나대용이라는 부하를 시켜서 수군 전선 거북선을 건조했는데

거북선은 거북이 등껍질에 용의 머리가 달린 기괴한 배여서

적군에게 공포감을 자아냈고

바깥에서는 그 안을 볼 수 없고 거북이 등껍질에는

철갑을 두르고 칼 , 못 등

가시들이 박혀있어서 함부로 적들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고

용의 입에서 연기가 나는 무서운 모습으로 적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내부에서 계속 화포를 쏘아댈 수 있는

전투함이었습니다

거북선은 세계최초의 철갑선이라고도 합니다

 

 

거북선과 판옥선

 

나대용

 

이순신은 일본과의 전쟁을 대비해

태만한 관리들과 군사들에게 엄중한 벌을 내리고

수시로 활쏘기 시험을 하며 전력을 강화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1592년 조선을 침공하고 이후 명나라와 인도까지 점령하겠다는

당시 일본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은 조선을 침략했고

일본군은 신무기인 '조총' 을 사용해서 조선군을 위협하며

부산을 점령하고 빠른 속도로 북상해서

조선 수도 한성까지 점령하고 조선왕궁 경복궁도 불탔고

당시 조선왕 선조는

북으로 몽진(왕의 피난) 까지 갔던 조선에는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자로는 풍신수길)

 

임진왜란때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총)

 

그러나 평소 전함들을 건조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일본의 공격에 잘 대비해놓은 이순신과 조선 수군들은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의 첫출전부터

허수아비같이 무너졌던 지상군과 달리 계속해서 일본군의 후방을

괴롭히고 있었고

옥포 , 합포, 적진포 해전을 치뤄 일본 수군들을 격파했습니다

당시 조선배들은

넓적하고 네모란 모양이어서 안정적이었지만 속도가 느렸고

일본 배들은 뾰족하고 속도가 빨랐지만 안에 대포를 실을 수 없었고

평소 상대 배에 다가가 상대 배에 넘어가서 근접전을 펼쳐 약탈하는 것이

일본 수군의 방식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의 화포공격과 거북선의 뾰족한 가시들 때문에

일본 수군은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고전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활약

 

일본은 육상에서는 우위였지만 계속해서 이순신의 수군에 밀려

제해권을 조선에게 내주게 되었고

이에 바다를 통해 보급을 받아야했던 일본 지상군은

쫄쫄 굶주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이후 한산도에서

배들을 학의 날개같이 넓게 펼치는 '학익진' 전술을 사용해

일본 수군을 포위해서 크게 물리쳐

'한산도 대첩' 에서 승리했고

결국 1593년 8월 15일 이순신은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삼도 수군 통제사(수군 대장)' 이 됬습니다

 

한산도대첩 민족기록화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임진왜란은 초기에는 일본군의 우세로 돌아갔지만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활약 + 의병들의 등장 + 명나라의 조선 지원 등으로

점차 일본이 밀려가는 형편이 됬고

일본은 이에 잠시 조선과 강화 교섭을 맺으며 휴전 협상에 돌입하며

시간을 벌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이순신이 조선침략의 가장 두려운 적임을 알았기에

이순신을 쫒아내려고 첩자를 보내는 등

온갖 계책을 사용하고 있었고 평소 올곧은 모습으로

꿋꿋하게 나라를 지키던 이순신 장군이었지만

 

평소 이순신의 승전에 흥분한 조선 임금 선조가

자주 나가서 이순신에게 싸우라 재촉했는데

명장이었던 이순신은 싸워야 할때 , 싸우지 말아야 할때를 구분하며

자주 선조의 명령을 거부했고

 

이에 이런 이유로 조선 조정에서 모함을 받아

1597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서

죽을 지경까지 고문을 받고 사형에 쳐해질 위기로 몰렸으나

겨우 죽음을 면했고 당시 이순신의 어머니 역시 아들이 잡혀가자

아들을 보러 오다 병으로 사망했고

이순신은 몸부림을 치며 슬퍼하다가

결국 다친 몸으로 홀로 말을 타고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됬습니다

 

그동안 이순신의 빈자리는 원균이라는 인물이 채우고 있었는데

원균은 조급한 인물이었기에

이순신이 오랫동안 훈련시켜놓은 조선 수군들을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이순신이 힘겹게 모아놓았던

300여척의 조선함대와 조선 수군들을 궤멸시키게 되었습니다

 

 

원균

 

<일본 수군>이순신 없는 조선수군은 약하다 ! 캬캬캬캬 !

 

원균의 실책으로 사실상 조선 수군은 궤멸됬고

이 전투에서 원균 역시 일본군에 의해 죽었습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급하게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했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미안했는지

 

<선조>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 ! ,,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라고 말했습니다

겨우 돌아온 이순신은 폐허가 된 조선 수군을 다시 복구하려 노력했고

자신을 의심했던 선조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순신>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 전선이 비록 적으나 ,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겨우 12척의 적은 배들로 수많은 일본 수군과

맞설 것을 계획하고는 두려워하던 부하들을 엄중히 달랬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출정할때 부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순신>죽고자 하면 살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결국 이순신 장군은 거센 물살의 울둘목에서 일본 수군을 맞이합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물살 강한 울둘목 지역에 쇠사슬을 깔아서

수많은 일본 함대를 유인했고

일본 수군은 고작 12척의 이순신군을 만만히 여기며

거친 물살의 울둘목으로 쫓아가다가 울둘목의 해류와 쇠사슬들에

배들이 뒤엉켰고 도망치던 12척의 배들은 다시 일본군에게 화포를 퍼부었고

일본군은 궤멸됬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12척 vs 133~500척 의 싸움으로 유명한 '명량대첩(명량해전)' 으로

조선 수군은 이 전투로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고

재건을 시작할 수 있게 됬습니다

 

명량대첩

 

또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 당시 병사들을 많아보이게 하려고

한밤중에 여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힌 후

옥매산을 빙빙 돌게 했다 하고 이에 한국 민속놀이

'강강술래' 가 시작됬다고 합니다

 

강강술래 (=강강수월래)

 

이후 일본군도 점차 패색이 짙어졌고

조선 침공을 명량한 일본 지배자이자 야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일본군은 다시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배에 병사를 싣고 도망칠 준비를 했습니다

이에 그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은

우리 국토와 강산 ,백성들을 잔혹하게 짓밟은 일본군을 편안하게

본국으로 되돌아가게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선+명나라 연합 수군으로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던 일본군을 공격하며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 '노량해전' 을 벌였습니다

 

<노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맹세>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불화살과 신기전(조선시대 미사일) 등으로

화공(불공격) 을 가하며 일본 함대들을 불태웠고

일본군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일본군 역시 죽기살기로 도망치려 거센 저항을 했고

그러다 일본 함대에서 날아온 총탄 한발이 이순신의 가슴을 관통했고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순신>방패로 나를 가려라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한산도 제승당의 노량해전도

 

이에 이순신 장군은 54세의 나이로 1598년 음력 11월 19일 ,

양력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도 모른채

남은 일본군을 소탕하려 계속해서 전투를 했고

조선은 도망치던 일본군들을 궤멸시키며 노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뒤늦게 이순신의 죽음을 안 그의 부하와 병사들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사후 조선 최고 벼슬 영의정 벼슬 및

'충무공 忠武公 ' 시호를 추증받았습니다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대한민국 100원 화폐의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에 대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과 영화 '명량'

 

<라봉봉>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때 일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구한 조선사의 명장이자 조선시대부터 칭송받았으며

지혜로운 덕장이자 제독(해군 함대 사령관) 으로 이야기 되고 있으며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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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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