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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평양 대동강 하류 도릉섬이라는 곳에서

1878년 11월 9일 안창호는 태어났습니다

안창호의 아버지 안흥국은 몰락한 양반이자

농부였고 안창호가 태어나기 전 2명의 남자아이를 낳아서

원래는 딸을 바랬지만 그럼에도 상관없다 여겼습니다

 

안창호의 어릴적 이름은 치삼이였는데

치삼이가 5살때 참외밭에 들어갔는데

참외가 먹고싶어 참외를 몰래 따려했습니다 (혹은 오이)

그때 참외밭 주인이

 

<참외밭 주인>이노옴 ! 왜 남의집 참외를 따려하느냐 !!

 

이에 치삼이는 태연하게도

 

<치삼>저는 지금 할아버지가 저를 때리려 해서

이곳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고는 참외밭 주인에게 말했고

참외밭 주인도 이상하게 여기며 물러났고

셋째는 어려서부터 임기웅변이 뛰어난 아이였습니다

 

치삼이가 7살때(혹은 12살때) 아버지 안흥국이 사망했고

가족들은 이후 평양의 대동강면 국수당으로 이사갔습니다

 

치삼이는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 다니며

한자를 배웠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렸는데

아이들이 다툴때에도

항상 화평을 중시하는 조숙한 아이였습니다

 

<치삼>싸움보다는 화해를 해야됭 ~

 

치삼이는 서당에서 만난 몇살 많은 형

필대은과 우리나라오 외국의 여러 이야기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겼고 목동생활도 했고

치삼이는 10살때 학교를 다닐때쯤부터

이름을 창호로 개명했습니다

이후 창호네 집안은

평안남도 대동군 남부산면 노남리(노내미) 로 이사를 갔는데

사람들은 그를 노남리댁 셋째라 불렀습니다

창호는 이곳 서당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영리한 아이가 되었고

행실이 바른 어린이여서 마을 사람들도 창호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또 성리학자 김현진에게 한학(한문)과 성리학등을 배우며

유학을 배웠습니다

 

구한말(조선시대 말기) 서당의 풍경

 

당시는 조선시대 말기로

조선에서는

나라를 개방해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개화파와

서양 오랑캐들에게 나라를 개방할 수는 없고

성리학적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수구파가 대립하고 있었던

시기이고 이에 김옥균, 박영효같은 급진적 개화파 인물들이

나타나서 일본 정부의 힘을 빌려 왕비가문인 민씨 일파와

수구파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개혁하려

한국 최초의 근대식 우체국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 정변을 '갑신정변 (1884년)' 이라 부릅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 왼쪽부터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김옥균

 

급진 개화파들은 이당시 정권을 잡았고

나라를 개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군이 개입해서 3일만에 갑신정변 주역들은

일본으로 도망쳤고

이에 갑신정변은 '3일천하' 라고도 부릅니다

 

김옥균 , 김옥균의 '삼일천하' 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이권으로

크게 다투기 시작했던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결국 1894년, 안창호가 16살때 청일전쟁이 일어났는데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이권을 다투려 전쟁을 벌였고

두 외세는 조선땅에서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조선내에서 혼란이 극심했고

안창호가 살던 평양도 청일전쟁으로 파괴당하자

안창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청일전쟁 풍자화

 

<충격을 받은 안창호>지금 외세가 우리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우리 민족의 불행은

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서이다,,

 

나는 앞으로 우리 민족과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쳐야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을 구하려면

옛날 한학 공부만 하는게 아닌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는게 옳을 것이다,,

 

창호는 교육으로 나라를 구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서울에 올라가기를 다짐했고

할아버지 안태열의 반대에 결국 삼촌의 도움으로 가출해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서울에 올라온 안창호는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 학당(=언더우드 학당 , 오늘날 연세대학교)'

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해 반장이 됬고

이곳에서 배운 선진국민 미국인들의 생활 태도와

크리스트교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크리스트교 장로교신자가 되었습니다

또 어린시절 동무였던 필대은을

크리스트교 장로교 신자로 입교시켰습니다

 

언더우드

 

당시 안창호는 구세학당 졸업후 조교로 일하다가

고향 평양에 돌아오자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9살때 강제적으로 서당훈장의 딸 이혜련과 약혼을 했고

안창호는 반발하다가

10년동안만 서울에서 공부하고 오겠다 했지만

이혜련이 안창호를 따라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우러 간다 했고

결국 안창호는 부부가 신학문을 배우면 좋을것이라 생각하고는

이혜련과 같이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1897년 안창호는 서재필, 이승만등이 있던

독립협회에 가입했는데

서재필은 갑신정변때 참여하다 실패해서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미국에 유학하다 나라를 개혁하러 돌아온 인물로

'필립 서' 라고도 불린 인물입니다

고국에 돌아와 독립협회를 세우고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을 발간하며

한국 민중들을 계몽하려 했고

협회의 이름인 '독립' 답게 스스로 일어섬 , 자립을 추구하며

외세에 간섭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습니다

 

독립협회에서 건설한 '독립문'

 

독립협회는 점차 규모가 커져

계몽에 관련된 연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민중대회

'만민공동회' 를 개최하며 규모가 점차 커졌는데

이당시 안창호도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 관서(평양)지방 발기회 활동을 해서

1898년 음력 7월 25일 20살의 청년 안창호는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뙤약볕 아래에서 연설 했습니다 (안창호의 쾌재정 연설)

 

만민공동회 민족기록화

 

<쾌재정에서 청년 안창호의 연설>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흥쾌, 유쾌) 한가 했더니 

오늘 이 자리야 말로 쾌재 를 부를 자리올시다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일(탄신일, 생일)인데 ,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축하를 올리는 것은 전에 없이 첫번 보는 일이니 ,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의 날이라 ,

어찌 쾌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이 축하식에 우리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으니

관민동락이라 또한 쾌재가 아닐 수 없도다

남녀 노소 구별 없이 한데 모였으니 만민 동락이라 ,

더욱 쾌재라고 하리니 , 이것이 또한 오늘 쾌재정의 삼쾌라 하는 바로라

 

세상을 바로 다스리겠다고 새 사또가 온다는 것은 말뿐이다

백성들은 가뭄에 구름 바라듯이 잘 살게 해주기를 쳐다보는데 

인모 탕건을 쓴 대관. 소관들은 내려와서 여기저기 쑥덕거리고 존문(편지 ??) 만 보내니 ,

죽는 것은 애매한 백성뿐이 아닌가 ? 

존문을 받은 사람은 당장에 돈을 싸 보내지 않으면 없는 죄도 있다하여

잡아다 주리를 틀고 돈을 빼앗으니 ,

이런 학정이 또 어디 있는가

뺏은 돈으로 허구헌 날 선화당에 기생을 불러 풍악을 잡히고

연관정에 놀이만 다니니 ,

이래서야 어디 나라 꼴이 되겠는가 ? 

진위 대장은 백성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책임인데 

보호는 커녕 백성의 물건 빼앗는 것을 일삼으면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

 

라고 연설했고

당시는 녹음기등이 없어 자세한 그의 연설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평양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줬던 명연설이어서

사람들에게 기억으로 더듬어 이야기 되는 연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평양 사람들은 안창호의 명연설에 환호하고 흥분하며

안창호에게 큰 박수를 쳤고

안창호는 이 연설로 평양은 물론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안창호는 한국  각지에서 연설을 하며

민중을 계몽하는 일을 했는데

이후 독립협회가 고종황제를 몰아내고

공화정부(왕이 없는 정부) 를 세운다는 상소가

고종황제에게 올라오자 결국 고종황제는 독립협회 간부들을

잡아들였고

또 보따리 장수(보부상) 들로 이루어진

황실 지지단체 '황국협회'를 시켜서

서울에서 만민공동회가 벌어질때

무력으로 습격하기도 했고

끝내 독립협회를 해산시켰습니다

 

결국 안창호 역시 고향에 돌아와

앞으로의 장래를 생각하게 됬고

안창호는 결국 교육이야말로 외세와 혼란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킬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창호는 21살인 1899년

강서군 동진면 화일리(암화리)에

'점진 학교' 를 세우고 동네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고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사립학교이자 남녀공학 학교입니다

점진은 점진적이다 할 때의 점진자로

차츰차츰 배워나가 실력을 양성하자는 의미였습니다

또 이곳에서 '탄포리교회' 도 세워 전도운동도 했는데

당시 안창호는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겨

더욱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미국으로 가서 유학을 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1900년

23세의 안창호는

서울 제중원(세브란스 병원) 에서

이혜련 여사와 결혼식을 했고 결국 미국으로 떠나려 했는데

이혜련 여사가 완강하게 따라가겠다 하자

둘은 함께 인천에서 배를 타고 도쿄를 거쳐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은 먼 나라였고

가도가도 바다인 거대한 태평양 바다에서의

긴 항해가 계속되었습니다

 

<안창호>불안불안하군,, 정말 미국에 도착할 수 있을까 ?

 

그러다 배가 하와이 섬지역에 도착하자

망망대해에서 우뚝 솟은 하와이의 큰 산봉우리가 보였고

안창호는 반갑고 기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와이 섬

 

<안창호>아아 !

나도 저 섬같이 남에게 망망대해속에서

반가운 그런 존재가 되어야겠다 !

 

이에 안창호는 섬 도 자에 산 산자를 써서

호(별명)를 도산 都山 이라 짓게 되었습니다

 

안창호는 10월 14일

미국 서부의 항구도시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고학생(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온 이 젊은이는

무작정 미국인 가정의 청소일이나 막일 등을 해주는

'하우스 보이' 일을 했고 이후 오랜지따기 일도 했습니다

 

안창호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23살의 나이에

미국 어린이들이 다니는 소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먼 타향의 피부색도 다른 23살의 동양 청년이

미국의 어린이들 사이에 앉아서

기초적 지식을 공부했고

창피한 일이기도 했지만 안창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그러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한국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고

가뜩이나 나라가 어지러운 판에

먼 타향에서도 조선인들이 뭉치지는 못할 망정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안창호는 그들을 말리다 미국에 온 한국 교민들의

생활 상태를 알게됬고

미국의 한인들은 상업도 자리잡지 못했고 

동포들끼리도 서로 단결되지 않고

지저분하게 지내는 것을 알고 결국

미국에서 동포들의 생활향상운동 역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미국 동포들을 위한 계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안창호는 교민들의 집을 살피며

보통의 미국인 가정과는 다른 지저분한 집 상태들을 보았고

교민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집청소와 주변 쓰레기 정리 ,

눈쓸기 등을 손수 하며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한국 교민들에 대한 지저분하다는 편견과 인식들을

바꾸려 노력했습니다

 

<미국 한인 교민들>저양반은 왜이리 오지랖(참견)일까 ?

 

그러나 안창호는 계속해서 집과 집 주변들을

정리정돈하고 쓸고 닦고 변소도 청소하고

마당에 화초를 심고 집에 커튼도 치며

아름답게 꾸몄고 결국 한인 교민들은

안창호의 진심을 알고 안창호를 존경하게 됬습니다

 

교민들 역시 안창호의 뜻을 따르며

집을 청소하고 깨끗한 옷을 입으며

미국에서의 한국인들의 인식을 바꾸려 노력했고

결국 안창호는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 로 유명해졌습니다

 

1903년 9월 23일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국 교포들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 친목회를 조직했고 회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 안창호는

미국 가정 고용인이 되어 일하며

교포지도에 힘썼고

안창호는 교포들이 미국 본토로 건너올때

일자리와 노동자 합숙소등을 마련해 주고

글을 가르치는 일들을 했습니다

 

1904년 안창호는 크리스트계에서 운영하던

'신학강습소' 에서 영어와 신학을 공부했고

1904년 4월 5일

안창호는 한인 친목회를 더 발전시켜서

'한인 공립협회' 를 조직했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교민들의 미국 적응과 신앙 생활 , 협동을 도왔습니다

또 같은해 11월 공립협회 회관을 정하고

'공립 신보' 라는 한글 신문을 만들어

옛날 독립신문과 같은 방식으로

한인 교포들을 도왔습니다

 

공립협회 창립멤버 앞줄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뒷줄은 임준기, 정재관

 

1905년

안창호에게 기쁜소식이 있었는데

안창호의 첫째아들 안필립이 태어났고

안필립은 이후 배우가 되고 싶어했는데

안창호의 격려로 배우로 활동하며

미국 할리우드에 이름을 알리게 됬습니다

 

1905년 안창호의 아내 이혜련 여사와 장남 안필립

 

그러나 당시 한국은

일본이 '한일의정서' 라는 조약을 한국에 맺게해

한국 땅을 군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해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었고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고

일본은 이전 청일전쟁에도 승리하고 러일전쟁까지 승리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 러시아의 간섭이 사라지자

이때부터는 대놓고 한국을 노골적으로 침탈하려 했고

그 결과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총칼로 한국 대신들을 협박해

결국 이토히로부미와 친일파 한국관료 5명(을사오적)에 의해

'을사조약' 이 체결되었고

을사조약의 내용은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간다는 것인데

외교권은 외국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권리이고

외교권이 넘어간다는 것은 곳 나라의 주권이 박탈된다는 의미였기에

사실상 한국은 일본에게 멸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을사조약 풍자화

 

많은 한국사람들이 이 을사조약에 반대해 의병을 일으키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약의 무효를 알리려 했고

결국 미국에서 교민들을 위해 힘쓰던 안창호 역시

나라가 위급한 것을 알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고

1907년 안창호는 부인 이혜련 여사와 3살의 아들 안필립을

미국에 남겨두고 33세의 나이로 한국행 배에 올라탔습니다

 

한국행 배가 일본에 들렀을때

안창호는 잠시 일본 도쿄에서 '태극학회' 라는

한국 애국 유학생 단체와 만나서

연설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안창호의 연설에 감격했고

고국에 돌아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안창호에게 연설을 부탁했습니다

안창호는 사양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설에 응했고

많은 한국사람들이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의 연설을 듣기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안창호는 조국 독립에 대한 진심을 담아

정성을 다해 연설했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안창호의 연설>우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맨손만 갖고는 절대 독립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조선이란 말을 사용하지 맙시다

우리 나라의 이름이 '대한 제국' 이므로

'대한 사람' 으로 부릅시다 !

 

안창호는 국민 개개인이 분발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며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호소했고

많은 사람들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들으며

엉엉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한국의 독립을 다짐했습니다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독립을 다짐한 인물로는

그의 먼 친척뻘 되는 안중근 의사와

독립운동가 여운형 등이 있습니다

 

안창호는 항상 연설이 끝날때마다

청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 를 크게 삼창했고

이에 안창호의 연설마다 일본 순사들이 쫙깔려 감시했다하고

어느 일본 순사는 안창호를 감시하기 위해

그의 말을 수첩에 받아 적다가

안창호가 너무 연설을 잘하자

안창호에 감격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안창호는 조선 내에서 독립을 말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는데

과격한 급진론자를 경계하며 교육과 실력 양성이

조국 독립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을사조약이후 한국 초대 통감으로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합병하려고

여러 수를 쓰고 있었고

그는 대한제국 조정에서는 인물이 없음을 알고

안창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안창호와 만나자 청했습니다

안창호는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의 속셈을 알기위해

이토 히로부미와 만났고

조선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던

늙은 일본 거물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는

청년 안창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내 평생의 꿈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재는 일본을 열강과 대등할 만한 현대 국가로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을 그렇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중국도 그렇게 하는것입니다

 

특히 일본의 함만으로는 

강력한 서양 세력의 아시아 침입을 막을수 없으니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힘을 키워 

열강과 싸울 대등할 힘을 모으고자 합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 일본은 한국의 발전에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발전이 완성되면 

저는 중국으로 가서 중국의 발전을 도울것입니다

 

안창호 선생도 나의 함께 아시아를 향한

위대한 꿈을 함께 해주시겠어요 ?

 

라며 안창호를 회유하려 했고

그 뜻을 알아차린 안창호는 대답했습니다

 

<안창호>한국 , 중국 , 일본의 협력이 

아시아 평화의 시작이라는것에 동감합니다

 

또한 당신이 과거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로 

일본을 변화시킨 공로도 알고 있으며

한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려는 것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 한국을 진정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면

우리 한국은 한국인의 손으로 혁신하게 해주십시오

 

만일 일본을 근대화한 메이지 유신이 

미국인이 와서 했다면 일본인인 당신은 가만 있었겠습니까 ?

또한 미국인이 했다면 유신(메이지 유신) 또한

성공하지 못했을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미 일본은 한국과 중국인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불행이자 삼국 전체의 불행입니다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한다며 청일 , 러일 전쟁을 했지만

두 전쟁의 승리 후에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지 않았습니까 ?

 

일본의 침략당한 한국은 미국이나 러시아에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성장을 원치 않는 서구 열강은 

우리 한국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세계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이 세계의 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신과 같은 큰 정치가가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젊은 청년 안창호는 늙은 노련한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밀리지 않고 당당하게 한국의 주권은 한국인이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흥분해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의 속내를 파악한 안창호는

그와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1907년 비밀 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 를 조직하게 됬습니다

 

안창호는 신민회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것

이외에도 한국의 나쁜 문제점인

학벌, 지연 등을 극복하려 각 지방 곳곳에서

골고루 사람들을 뽑았고

애국 지사들이 모이자 비밀 결사단체 신민회를 조직했고

신민회는 민족 의식 향상에 힘쓰고

교육 기관 , 상공업 기관을 세우려는 목적이 있었던

독립운동 단체였기에

대성학교(평양 안창호) , 오산학교(평안북도 정주 이승훈)

, 평양 자기회사 , 방직공장 ,

태극 서관(문화) , 대한매일신보(신문)

등과 관련되고 만주 삼원보에 신흥 무관학교의 전신

신흥 강습소를 세우는 등 국내외 안팎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힘썼습니다

 

당시 대성학교 실질적 교장 안창호는 학생들을

정성껏 교육하며

특히나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는 것 ,

약속과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당부했고 (신용사회=독립의 길)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모습으로

학생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평양 대성학교 , 1907년 안창호의 개교 - 1912년 일제의 일장기 계양 요구 거부등으로 폐교

 

1909년 10월 26일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조국의 독립에 힘써야 겠다

생각한 '도마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후

세계에 일제의 흉계를 알리고

일제에 사형당해 순국하셨습니다

 

도마 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이후 조선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국 지도자들을 잡아들여야겠다 생각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관련자로

일본 헌병대를 시켜 안창호를 잡아 가두었고

한국 남녀학생들이 안창호의 면회를 요청하다

거절당하자 일본 헌병대 주위에서

애국가와 노래를 부르며

안창호를 위로했고

민심이 동요하자 결국 데라우치 통감은

안창호 등 애국지사들을 석방하게 됬습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년 초

일제는 안창호에게 안창호 내각 조직을 제의했으나

안창호는 그것이 일본이 조선인들의 합병 반발을

무마시키려는 핑계이자 회유책임을 알고는 거절했고

1910년 4월 7일 고양군 행주에서 열차를 타고

국외로 망명하는데 망명할때

거국가(去國歌 갈거 , 나라 국 , 노래 가)라는 노래를

지어 남기고 떠났습니다

 

<거국가>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때의 운수)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간다 한들 영(영영) 갈소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안창호>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안창호는 치욕스럽지만 한국을 떠났고

그가 한국을 떠나고 4개월 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한국은

일제에 강제적으로 합병되고 말핬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안창호는 미국에 가서 다시 옛날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4년만에 아내 이혜련 여사와 자식 안필립을 만났고

1911년 그의 나이 34세였습니다

이혜련 여사는 남편이 먼 고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동안

삯빨래(남의집 빨래를 해주고 돈을 범)로 생활하며 필립이를 키우고 있었고

처자식과 재회한 안창호는 다시 일자리를 구해

여러 막노동일을 했지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며

조금도 부끄럽다 생각하지 않았고

덕분에 안창호 가정의 생활이 다시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912년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하는 안창호

 

이후 안창호는 미국의 한국 교민들의 추대로

'대한인 국민회' 회장이 됬고

한국 교포들은 대한인 국민회 이름으로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의 불법성과 무효를 세계에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대한인국민회에서의 도산 안창호 (가운데)

 

이에 미국정부도 한국 교포들을

일본의 식민지인으로 여기지 않았고

한국인들은 다시 독립운동에 힘썼으며

미국내 한국 교포들도 안창호의 말에 따라

미국 사회에서 신용을 지키며 정직한 모습들을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1913년 안창호는 '흥사단' 이라는 인물을 기르자는

청년 단체를 조직했고

건강한 인격자 육성에 힘썼습니다

 

1916년 흥사단 대회 , 왼쪽 네번째 안창호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 최대 규모 독립운동

3.1 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있었던 안창호는

상하이에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초대 원수(수장) 이승만 , 김구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만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흩어져있던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된 정통적인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였습니다

 

191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밑줄 가운데 안창호

 

안창호는 이곳에서 '독립' 이라는 신문을 발행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을 알리려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속 내부분열등이 있자

결국 안창호는 임시정부 직책을 내려놓고

국외를 돌아다녔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애국단'의

'백범 김구' 선생의 지휘아래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일본 고위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벌어져 세계가 놀랐고

일제는 눈이 뒤집어져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려 했고

안창호 역시 피신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폭탄을 던지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민족기록화

 

원래 윤봉길 의사의 1932년 상하이 훙커우공원 폭탄의거때

백범 김구선생은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으로 출발하자마자

독립운동가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백범 김구의 편지>오늘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세요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날 듯합니다

 

사람들은 안창호에게 얼른 피하라했지만

안창호는 이전에 이시간에 소년에게 선물을 주기로 한 약속으로

소년과의 약속을 어겨서는 안된다며

소년을 만나게 됬고

그만 일제 경찰에 잡혀 체포됬습니다

 

안창호는 이봉창 , 윤봉길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심문을 받았고 직접 관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인천으로 압송되서

'치안유지법' 위반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됬습니다

 

일제가 수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한 '서대문 형무소'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한 모진 고문

 

수감시 초췌해진 도산 안창호 선생님

 

이후 대전감옥으로 옮겨졌다 1935년 2월 안창호는

가석방됬고 이후 안창호는 흥사단 활동이 어려워지자

수양 동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흥사단 같은 활동을 하다가

1937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검사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일본 검사>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 ?

 

<안창호>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는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일본 검사>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

 

<안창호>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일본 검사>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 ?

 

<안창호>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일본 검사>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 ?

 

<안창호>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일본 검사는 안창호에게 심문을 하는지

가르침을 받는지 헷갈리는 꼴이 되어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안창호는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됬고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그는

여러 고생을 하다 일제의 고문과 옥살이 등의 고생으로

합병증을 앓게 됬고

병보석으로 감옥을 나와

경성제국대학 부속 병원에 입원했지만

다음해인 1938년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안창호는 나라를 걱정하며

병상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창호>목인(=무쓰히토=메이지 일왕)아 목인아 !

네가 우리 민족에게 큰 죄를 지었구나 !

 

평생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사셨던

한국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60세의 일기로

조국의 독립을 7년 남기고 간경화, 폐렴 등

합병증으로 순국하셨습니다

 

<안창호의 명언>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라봉봉>한국의 위인이자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온화하지만

일제의 야욕에 담대히 맞서며

한국인들의 큰 스승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이 그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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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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