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유관순 (일제의 고문, 폭행으로 얼굴이 부어있음)
유관순 열사 표준 영정

 

1904년 4월 26일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에서

유관순(=류관순)은 태어났습니다

 

유관순의 아버지는 개화(서구 문물을 받아들임) 해서

개신교를 믿게 된 선비 유중권이었고

어머니 이소제 역시 훌륭한 선비집안의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유관순 가족중에 유관순은 4남매중 유일한 딸이었고

유관순의 아버지는 아들 , 딸 차별없이 키우려 노력했습니다

유관순은 씩씩하고 총명했습니다

 

유관순의 아버지는

일제에 맞서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

'홍호 학교' 를 세우려 했고

마땅히 돈을 구하지 못하다가

장터에 사는 '고모다' 라는 일본인에게 돈 300원을 빌렸는데

고모다는 꾼돈에 대한 이자를 3000원을 받으려 했고

이에 유관순의 아버지는 고모다에게 맞서다가

고모다가 부른 사람들에게 구타당해서 집에 들어왔고

이에 병들어 않아 누우셨습니다

 

<유관순>아버지 괜찮으세요 ?

 

<유관순의 아버지>,, 그래 이게 다 나라가 없어서

생기는 일이란다

내가 아픈것 보다 나라가 없어 부끄러워

마음이 더욱 아프구나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을 멸망시켜 강제로 합병시키고

총과 칼로 돈벌이 사업을 독차지 한채로 조선 땅에 들어와서

조선 땅을 빼앗고

가난해진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등을 하며

재산을 증식하고 있었고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역시

일제에 맞서 교육을 키워 대항하려다

일본인에게 당한 사람 중 한명이었습니다

 

일제가 한국에서 수탈해간 쌀들

 

아버지가 당한 억울한 사건을 본 유관순은

일제를 미워하며 자주독립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1906년

유관순의 고향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리던

'샤프' 선교사의 추천으로

유관순은 교비 유학생으로 서울에 있는

이화학당(오늘날 이화여고, 이화여대) 에서 공부하게 됬고

이화학당 학생들과 기숙사 생활을 하며

유관순은 이곳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며

억울하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화학당에서의 유관순 , 뒷줄 오른쪽 끝

 

유관순은 교칙을 잘 지키고 공부도 부지런하게 하며

신앙 생활에도 열심인 이화학당의 모범생이었고

 

때때로 유관순은 기도실에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에게 한국의 자주독립을 기도드렸습니다

 

어느날은

유관순은 가난해서 식비를 못내는 자신의 친구를 위해

자신의 저녁밥을 그 친구에게 주고 자신은 저녁밥을 굶는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유관순의 선생님은 유관순을 불렀습니다

 

<유관순의 선생님>한국에는 너 말고도 굶는 아이들이 많단다

아무리 친구를 위해서라지만 너 역시 공부에 힘써야 하고

이런 일은 어른들에게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

 

유관순은 결국 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됬고

선생님은 굶는 학생을 위해 모금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유관순은 방학이 되면 고향에 내려와

동네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 개화 문명을 알리려 했고

유관순의 아버지는 그런 딸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유관순은 방학동안

기독교인의 천국여행이야기가 있는 영국소설인 '천로역정' 이나

조국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소녀 잔다르크 위인전 ,

영국 간호사 나이팅게일 위인전을 읽으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잔다르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 , 1620) , 흔히 유관순 열사는 한국의 잔다르크로 이야기되거나 혹은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이순신이라 이야기됩니다

 

1919년 1월 21일 한국의 고종황제(광무황제)가 돌아가셨고

고종황제는 갑자기 죽었기에 일제가 죽였다는 이야기도 나돌았고

이에 조선 백성들은 큰 슬픔에 잠기었습니다

16살의 유관순도 그 소식을 듣고 더욱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 대통령 윌슨은

자신(각 민족)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민족 자결주의' 를 제창했고

이 사상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은 일제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습니다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고종황제가 일제에 독살됬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에 한국인들은 크게 분노하며 결국

일본에 맞서 손병희를 중심으로 민족 대표 33명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며 세계에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조선 민중들과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했고

이 날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고종황제의 인산일(장례일) 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최남선은 독립만세운동을 벌일때 뿌릴 독립선언서

인쇄지 6만장을 보성사에서 몰래 찍어냈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2, 3학년들도

독립 만세 운동에 가담하기로 약속해놨고

고등과 1학년의 유관순은 자신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찾고 있다가

친구 서명학, 김복순 , 김희자, 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 를 결성해서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서

3.1운동 시위 행렬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정오(낮 12시) 파고다 공원(=탑골공원) 에서

 

학생 정재용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이에 그의 선언서 낭독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일제히 모자를 벗어 위로 던지며 품속에 숨겨놨던 태극기를 꺼내서

크게 외쳤습니다

 

<학생들>대한독립 만세 !

대한독립 만세 !

대한독립 만세 !

 

파고다공원의 3.1독립만세시위 - 문학진

 

사람들은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고 거리로 나왔고

점차 한국인들은 만세 행진 대열에 합류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화학당 학생들 역시 그곳에 합류하려 교문으로 나왔는데

이에 미국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교문 앞에서

교문을 잠그고 그들을 막았지만

결국 학생들은 기숙사 뒤쪽 담장을 넘어

태극기를 들고 만세 행진에 합류했고

따라나선 유관순 역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3.1 운동때 행진하는 여성들

 

오후 2시에 민족대표 33인들 역시

태화관에서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일제 총독부에 통고문을 보냈고

이에 총독부는 헌병대를 보내 군중들을 위협하며

시위대에게 총을 쐈습니다

3.1운동은 평화시위였지만 일제의 총칼에 유혈사태가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잡혀갔습니다

 

3.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33인 민족대표

 

종로에서의 만세운동

 

광화문 앞에서의 만세운동

 

3.1운동때 일본 헌병이나 일본인 부녀자들은

3.1운동 시위대에게 붉은 잉크들을 뿌려놓고 연행해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제의 유혈사태로 서울은 피로 물들었고

저녁이 되자 유관순과 이화학당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왔고

학생 신특실 , 유점선 , 노예달 등은 검거됬고

교사 김독실 등은 옥에 갇혔습니다

 

3.1운동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인 휴교령을 내리고

결국 유관순은 3월 13일 기차를 타고 고향에서 들어왔습니다

 

유관순의 친구들이 기차소리를 듣고

 

<유관순의 친구들>기차 소리가 마치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이러는거 같아 ㅎㅎ

 

라고 말하자

유관순은 대답했습니다

 

<유관순>나는 기차소리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으로 들려 ㅎㅎ

 

결국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과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3.1 만세 운동 소식을 전했고

이에 유관순 마을의 주민들도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양력 3월 1일이었으니

유관순의 고향에서는 음력 3월 1일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비밀리에

합의했고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유관순은 그동안 지역 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벌이자 약속해놨고

가는 곳마다 음력 2월 그믐날(달의 마지막 날 , 음력 3월 1일 하루 전) 밤

매봉에 횃불이 오르면 거기에 응답하는 횃불이 올려달라고 약속했습니다

 

음력 2월 그믐 저녁

유관순은 매봉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습니다

 

<유관순>오 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 倭 (일본) 를 물리쳐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 독립 만세 ! 대한 독립 만세 !

 

유관순은 기도를 마친후 햇불을 올렸고

그 횃불을 본 다른 산봉우리에서도 하나 둘 횃불이 올랐습니다

유관순은 그제서야 안도했고

한편 당시 마을 사람들은 내일 만세운동때 쓸 태극기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 봉화탑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아우내 봉화제'

 

1919년 음력 3월 1일 , 양력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날(아우내 장터의 장날)에는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유관순과 유관순의 동지들은

오는 사람들에게 몰래몰래 태극기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아우내 장터에 사람들이 모이자 조인원은 쌀가마니 위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유관순은 태극기를 들고 외쳤습니다

 

<유관순>대한 독립 만세 !

대한 독립 만세 !

대한 독립 만세 !

 

이에 다른 사람들 역시 품속에 감춰둔 태극기를 들고 따라 외쳤습니다

 

<아우내 장터 사람들>대한 독립 만세 !

대한 독립 만세 !

대한 독립 만세 !

 

유관순이 앞장섰고

유관순의 부모님과 친척들, 교회 사람들이 유관순의 뒤를 따라

만세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일제 경찰들은 깜짝 놀라며

시장에 출동해서

만세를 외치는 시위대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했고

시위대가 거부하자

곧바로 시위대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일제 헌병에게

 

<유중권>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 !

 

하고 항의하다가

일제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순국하셨고

유관순의 어머니 역시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고

이 날 유관순 역시 일제 헌병들에게 붙잡혀

끌려갔습니다

 

일제 헌병들은 유관순이 미성년자임을 감안해서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해주겠다 회유했지만

유관순은 거절했고

결국 유관순은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을 고문하는 일제 헌병들>

너같은 계집아이가 시위의 주동자일리가 없다 ! 

협력자를 어서 불어라 !

 

그러나 유관순은 계속해서 자신이 주동자라 말하며

일제 헌병에게 호통쳤습니다

 

<유관순>내가 시위의 주동자다 !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 !

대한독립 만세 !

 

일제 헌병들은 유관순을 모질게 고문했지만

유관순은 고문을 받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결국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에 투옥됬다가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됬고

구속 상태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일제 재판장은 유관순에게 말했습니다

 

<일제 재판장>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유관순은 대답했습니다

 

<유관순>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 !

 

말을 마친 유관순은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고

결국 독립운동 이외에도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유관순은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후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게 됬습니다

 

일제가 수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한 '서대문 형무소'

 

그러나 유관순은 자신이 감옥에서 몇년을 살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일제에 대항하겠다는 생각뿐이었고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서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감옥의 동지들과

옥중 만세운동을 했습니다

 

<유관순>대한 독립 만세 !

대한 독립 만세 !

대한 독립 만세 !

 

이에 3천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며 같이 만세를 외쳤고

서대문 형무소 주위까지 만세소리가 퍼지자

전차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도 출동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수감자(애국지사)들은 너도나도 외쳤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수감자(애국지사)들>내가 주동자다 !

내가 주동자다 !

 

간수들은 수감자들을 마구 때렸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일제에 고문당한 애국지사들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고문당하기 전 유관순 열사 얼굴(오른쪽) 과 고문으로 부은 유관순 열사 얼굴(왼쪽)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는 1년 6개월로 단축됬지만

유관순 열사는 너무 매를 많이 맞고 고문을 당해서

모진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 열사는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형기를 단 2일 남긴 상태였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의 사망소식을 전해들은

유관순의 오빠 유관옥은

서대문 형무소로 달려가서 유관순의 시신이라도 내달라고 애원했지만

규칙 위반이라며 거절당했고 결국 유관옥은

이화학당 월터 교장을 찾아가서

유관순의 시신을 빼올 수 있게 해달라 간청했고

월터 여사는 형무소로 달려가

유관순의 시신을 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의 잔인한 실체가 드러날까

그것을 거부했고

월터 여사가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서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유관순의 시신을 내주었습니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이화학당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했고

고문을 감추기 위해 유관순의 시신은 토막나있었습니다

유관순의 관속에는 태극기와 성경책이 넣어져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이후 일제에 의해 이태원동 공동묘지가 군용기지로 사용되려

공동묘지 유골들을 이장하려 했고

이때 일제는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쳤기에

유관순 열사의 유골이 분실됬습니다

 

유관순 열사 생가 터

 

유관순 열사 동상

 

유관순 열사 관련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왼쪽)' , '1919 유관순(오른쪽)'

 

<라봉봉>유관순 열사가 모진 고문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외치고 사망하신게 고작 17살이셨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 일제에 잔혹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도 있었거나 그녀보다 어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가 강렬했다는 것과

또 일제의 잔학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여러 전설들과 이야기를 남기며

한국인들에게 사랑받은 큰 위인이 되었고

한국인들의 추억속에는 어린 시절에

'유관순 동상' ,'유관순 귀신' , '유관순 괴담' ,

'유관순 줄넘기 혹은 달리기' 등 여러 이야기도 남아있는

친숙한 위인이기도 합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로 인해

세계는 한국인들이 독립을 간절하게 원한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결국 그녀의 헌신은 헛되지 않아 한국인들은 독립을 이뤄냈습니다

 

반응형

'어린이 개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곡 이이  (0) 2019.05.28
단원 김홍도  (0) 2019.05.21
그리스도  (2) 2019.05.13
충무공 이순신  (0) 2019.05.08
도산 안창호  (0) 2019.05.06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