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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의 자화상[스스로 그린 자신의 그림])

 

김홍도는 1745년 오늘날 경기도 안산시지역에서

무반(장수) 가문의 서얼집안

혹은 중인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안산시 단원구가 그의 호 단원을 써서 이름붙여졌습니다

 

어린 홍도는 산과 들을 다니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김홍도>그림을 그리는 것은 즐거워 ^^

 

홍도의 외갓집은 안동 장씨 집안으로

대대로 도화서(나라에서 그림을 그리는 관청) 에 화원(화가)을 배출한

미술가 집안이었습니다

홍도의 외삼촌은 화가였는데

홍도의 재능을 알아본 외삼촌은 홍도에게 그림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나 홍도의 아버지는 당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환쟁이' 라고 천시했기에 홍도가 그림그리는 것을 반대했지만

홍도는 아버지를 설득했고

결국 외갓집에서 홍도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홍도는 그림 공부를 열심히 했고 결혼도 했습니다

 

어느날은 홍도의 외삼촌이 홍도를 불러서

 

<김홍도의 외삼촌>네 그림을 복헌 김응환 선생께 보이기로 했다

 

라고 말했고 김홍도는 너무 기뻤습니다

김응환은 유명한 화가로

도화서에서 궁궐의 그림을 맡아 그리고 있는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김응환의 '강안청적도'

 

김홍도는 외삼촌과 김응환을 찾아갔고

김응환은 김홍도의 재능을 알아보고 김홍도를 제자로 맞이했습니다

김응환은 이후 당시 뛰어난 화가였던

표암 강세황에게 김홍도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김응환>그림들이 하나하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

 

<강세황>인물 , 화조(꽃과 새) , 사군자(매화 , 난초 , 국화 , 대나무)

어느하나 빠짐없이 훌륭하군 !

 

표암 강세황

 

김홍도가 사군자(대나무) 와 호랑이를 그린 걸작 '죽하맹호도'

 

1761년

17세의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고

덕분에 김홍도는 이인문 등 여러 화가들과 사귀며

그림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김홍도는 외모가 빼어나고 풍채가 좋았으며

마치 신선처럼 마음이 넓고 성격이 활달했다고 합니다

 

김홍도가 신선의 모습을 그린 '군선도' , 평소 신선같다는 소리를 들은 김홍도는 신선 그리기를 좋아했고 아직은 그의 특유의 화풍이 나타나지 않았고 여러 중국풍 그림을 모작할때 모습으로 보입니다

 

1771년

27세의 김홍도는 영조 임금과

왕세손 이산(훗날 정조) 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영조>그림이 정말 훌륭하도다 !

큰 상을 내리겠다 !

 

김홍도는 임금의 사랑을 받았고

뛰어난 그의 그림실력에 그는 크게 유명해졌습니다

 

조선 후기의 두 명군 영조(왼쪽) 와 정조(오른쪽)

 

당시는 조선시대 후기였는데

농업이나 상업, 광산업 등으로 부를 축적한 평민들이 많았고

돈을 벌어 양반행세를 하는 평민들도 나타나던 시기였습니다

또 예술문화도 활발히 발달하던 시기였습니다

 

어느날은 김홍도에게 소금장수 김한태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김한태>김홍도 선생님의 이름을 여러 번 들은바 있습니다

다름아니라 저는 돈은 많이 모았지만

가진게 돈뿐이라 선생님의 그림을 조금 사고싶습니다

 

김홍도는 자신의 그림을 돈을 받고 판다는 것에 대해

여러 부담감도 있었지만 김한태는 다시 김홍도에게 말했습니다

 

<김한태>선생님 사실은 저희 어머니가 환갑이신데

마땅히 축하해드릴 만한 것이 없어 선생님의 그림을 병풍으로

삼아 잔치를 축하하면 어머니가 정말로 기뻐하실것입니다

사례는 넉넉히 해드리겠습니다

 

김홍도는 김한태의 효심에 결국 병풍에 그림들을 그려주었고

이후 김한태가 수레에 선물을 가득 담아와서

김홍도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김한태>선생님 덕분에 어머니가 크게 만족하시고

즐거운 환갑잔치가 되었습니다 ~

이것은 사례입니다 ~~

 

김홍도는 너무 많은 선물들에 깜짝 놀랐습니다

 

<김홍도>이렇게 까지 많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김한태는

 

<김한태>선생님도 넉넉히 생활하셔야

그림도 그릴 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

받아 두시지요

그리고 제가 조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귄

부유한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

그 친구들 역시 선생님의 그림을 사고 싶다고 합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제가 선생님 생활이 궁핍하시지 않게

그들과 발을 놔드리겠습니다

 

결국 김홍도는 소금장수 김한태와의 인연으로

평생 그에게 그림을 팔아 생활의 어려움을 덜 수가 있었습니다

 

1772년

28세의 김홍도는 '감목관(목장 관리)'에 임명되어 사포서(왕실 채소재배)에서 일했고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며 아주 높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1781년

김홍도가 37세일때

나라에서 정조 임금의 어진(왕의 그림)를 그릴 사람을 찾았는데

김홍도는 신한평, 한종류와 함께 실력을 겨루었고

가장 그림을 잘 그린 사람으로 뽑혔고

정조는 그림 실력이 뛰어난 김홍도를 매우 아꼈습니다

 

이 무렵 김홍도는 중국 명나라 유명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1575~1629)의 호를 따서

자신의 호를 '단원' 이라 지었습니다

 

1788년

44세의 김홍도에게 정조가 어명을 내렸습니다

 

<정조>금강산의 절경이 뛰어나다는데

과인은 임금의 몸이라 함부로 그곳까지 갈 수 없구려

단원 그대는 금강산에 가서 금강산의 절경을 그대로 그려오도록 하라 !

 

금강산은 너무나 아름다운 한국의 산으로서

계절별로 봄에는 금강산 , 여름에는 봉래산 , 가을에는 풍악산 ,

겨울에는 개골산 , 눈이 내릴땐 설봉산으로 불리는

뛰어난 경관으로 매우 유명한 산이었습니다

 

김홍도는 금강산에 가서 금강산의 그림을 그렸는데

금강산의 흥취에 빠져있었고

임금의 명에 따라 금강산을 사실적으로

보이는 그대로 그리기는 했으나

금강산의 절경에 취했던 김홍도였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은 '금강사군첩' 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김홍도 금강사군첩 '가학정'
김홍도 금강사군첩 '만물초' , 마치 직접 산에 가본거 같은 감탄을 자아내는 그림입니다

 

이후 정조는 김홍도에게

대마도를 그려오라는 명을 비밀리에 내렸습니다

 

<정조>저번 임진왜란때 처럼 일본은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모르오

특히나 대마도는 일본이 우리 조선을 공격할때 전초기지처럼 사용했으니

그대는 몰래 대마도에 가서 그 땅을 그려 오도록 하시오

 

아주 은밀한 임금의 부탁이었지만 김홍도는 그에 응해

스승 김응환과 함께 대마도에 가려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부산에서 김응환이 병으로 앓아 누웠습니다

 

<김응환>자네는 그림 실력이 뛰어나기에

조선 그림의 큰 업적을 남길 것이야

뒤를 부탁하네,,

 

김홍도의 스승 김응환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고

김홍도는 슬픈마음이었지만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홀로 대마도에 가서 밤낮없이 대마도 지도를 그려

대마도 지도를 그려왔습니다

 

대마도

 

그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김응환의 소식을 들은 정조 임금은

김홍도의 손을 잡고 눈물흘렸습니다

 

1790년

46세의 김홍도는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용주사에

후불탱화(불교 그림)을 그렸고

김홍도는 평생동안 사군자 , 풍속화 , 동물그림, 풍경화 ,

불화 등 온갖 종류의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김홍도가 용주사에 그린 '삼세여래체탱'

 

1791년

김홍도가 47세일때

김홍도를 도화서에 추천한 김홍도의 또다른 스승

강세황의 병환이 나빠졌습니다

김홍도는 앓아누운 강세황에게 문병갔고

강세황은 시름시름 앓으며 김홍도에게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강세황>이제는 중국그림 베끼는 것으로는 안된다

자네는 이제부터 독특한 그림을 그려보게나

자네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

 

그렇게 김홍도의 스승이자 조선의 뛰어난 화가였던

표암 강세황은 김홍도에게

한국인들의 정서를 담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 당부하며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홍도는 먼저 떠나간 두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담은 그림을 그리기로 다짐했습니다

김홍도는 특히나 백성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있는

풍속화를 그리고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1795년

임금은 51세의 김홍도에게 임금의 어진(임금의 그림)을 그린 공로로

연풍현감 벼슬직을 내려주었습니다

(연풍은 오늘날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연풍현 백성 1>새로운 사또가 바로 그림을 그렇게 잘그린다는

김홍도 선생님이래 !

 

<연풍현 백성 2>임금의 총애도 받고 계신다니

정치도 잘하시겠지 ?

 

그러나 김홍도는 평소 유유자적하게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해

정치일 하는 게 싫었고

김홍도는 다른 사또와 달리

사또의 옷을 입지 않고 일반 농민 백성들을 입고

백성들과 어울리며 백성들의 삶을 구경하며 다녔습니다

 

연풍현에는 가뭄이 크게 들어서

김홍도는 1792년 공정산 상암사에서 기우제, 불공도 드렸고

이때 아들 김양기도 얻었습니다

김양기 역시 아버지를 따라 화가가 되었습니다

 

김홍도는 3년동안 연풍현감 벼슬직을 지냈는데

계속해서 가뭄이 들었고

본인도 정책에 어려움을 느껴 그만뒀고

 

벼슬에서 물러난 김홍도는 이후에

이전의 소금장수 김한태의 도움으로 생계를 지원받으며

그동안 사또일을 하며 보며 밑그림그려놓았던

평범한 백성들의 삶들 그리기 시작했고

스승의 말을 따라 한국 고유의 정서가 담긴

해학적이기도 한 한국적 정서에 맞는

민족 풍속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김홍도의 '서당' , 울고 있는 아이 ^^ ,,

 

김홍도의 '씨름'

 

김홍도의 '무동(춤추는 아이)'

 

김홍도의 '활쏘기'
김홍도 '대장간'
김홍도 '빨래'

 

김홍도의 '점심'

 

까치를 그린 김홍도의 '매작도'

 

그러나 말년에는 질병과 가난으로 많은 고생을 했고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은 채

한국 , 조선의 전설적인 천재화가 단원 김홍도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봉봉>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노리며 한 일은 아닐 것이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단원 김홍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필체가 나라를 대표하는 '국서체' 가 된 한석봉같이

그의 그림은 곧 한국 조선과 백성들의 정서를 담은

나라를 대표하는 그림이 되었다 할 수 있겠고

그의 그림에서는 한민족 특유의 따뜻한 웃음이 느껴지는데

그림을 그릴때의 그의 평화로운 마음이 드러납니다

특히나 그의 대표작 '서당' 과 '씨름' 은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단원 김홍도는 한국의 피카소라고 생각됩니다

피카소 역시 어린 시절에는 여러 기본기들을 익히며

자신의 화풍보다는 철저한 기본기 그림들을 그렸고

김홍도 역시 민속화를 그리기전 시절이 이와 비슷하고

훗날 그린 그림들은 참으로 개성있으며

어린아이같이 익살스럽고 순수한 모습입니다

 

요즘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은

점하나 찍거나 마치 똥을 싸지르는 느낌인데

예술보다는 '방탕' 과 '무절제' 로 보일 뿐이며

돈욕심에 예술이 병드는 것으로 보여 안타깝고

 

한국의 김홍도나 이중섭 , 외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 고흐 , 피카소 같은 사람들은

일단 기본에 충실한 그림들이라

저는 이런 미술가들의 그림을 특히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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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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