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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오죽헌의 신동]

[구도장원공]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

[자경문을 짓다]

[퇴계 이황과의 만남]

[관직에 나선 율곡 이이]

[십만 양병설]

[율곡 이이의 청렴한 삶]

율곡 이이

 

[오죽헌의 신동]

1536년 음력 12월 26일 율곡 이이는

강릉부 북평촌(오죽헌) 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죽헌 사랑채

 

율곡의 아버지는 '이원수' 라는 인물이고

어머니는 조선 여류 예술가로 유명한 '신사임당' 입니다

 

신사임당 , 어머니와 아들이 모두 한국의 위인입니다

 

그렇게 이원수와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율곡 이이) 의

첫 이름은 이현룡이었는데

이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기 하루 전 날

신사임당의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와

마루 사이에 서려있는 꿈을 꾸어서 율곡 이이의 첫 이름은

이현룡이 된 것입니다

또 이에 현룡이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했습니다

 

오죽헌 몽룡실

 

이원수와 신사임당 , 현룡이 가족은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안정된 가정 분위기였고

현룡이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 神童 (천재 아이)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현룡이는 이미 3살때 말과 글을 배웠는데

하루는 현룡이의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를 가리키며

 

<현룡이 외할머니 이씨>저게 무엇 같게 ?

 

하고 묻자

어린 현룡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잠시 석류를 쳐다보고는

 

<이현룡>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어요

(石榴皮裏碎紅珠 석류피리쇄홍주)

 

라는 옛 시 구절을 읊으며 대답했습니다

 

석류

 

현룡이는 감정이 풍부한 따뜻한 소년이었습니다

똑똑하지만 교만하지 않았고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다정한 아이였습니다

 

현룡이가 5세가 됬을 때

큰 비가 내려 홍수가 져서 어떤 사람이 내를 건너다

위태롭게 되자 그것을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웃어댔지만

현룡이는 기둥을 부둥켜 안고 서서 애태우다

그 사람이 위태로움에서 벗어나서야 안심했고

또 5세때의 이야기로

어머니 신사임당이 몹시 아파 온 집안이 그녀를 걱정할때

집안 사람들 몰래 외할아버지 사당 앞에가서 엎드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달라 기도했습니다

 

현룡이는 6살때 외가에서 나와

한양(서울)으로 와서 10년간 살았고

11세때부터는 이름을 '이현룡'에서 '이이' 로 바꾸었습니다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는 어렸을때부터 총명해서 신동으로 불리다가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했고

이후 9번이나 과거에 장원(1등)으로 급제해서

'9도 장원공' 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는 조선의 '천재 유학자' 로 이야기 되는 인물입니다

 

구도장원공 이이 , 출처 : 율곡 선생 일대기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

1548년(명종 3년)

율곡 이이가 16세가 되던 해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큰 스승이었던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났고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을 경기도 파주시 동문리 자운산에

장사지내고 3년상을 지냈습니다

 

시묘살이(3년상)

 

18세의 율곡 이이는 어머니의 죽음등에 고통에 시달리다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봉은사에서 불경(불교 서적)을 공부했습니다

 

[자경문을 짓다]

19세의 율곡 이이는 3년상을 마치고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공부를 했습니다

 

금강산

 

당시 조선은 유교국가였기에 불교를 천시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속에서 선비 가문인 율곡 이이가 산에 들어가

불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율곡 이이는 유교만 공부하던 다른 선비들과 달리

삶과 사상에 대해 깊게 탐구하기 위해

머리는 깎지 않되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공부를 하다

1년후 20세에 이르러 산을 내려와

강릉에 있는 외가로 돌아와 유학공부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고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각성시키기 위한 글이자

그의 평생 좌우명이 된 자경문 自警文 을 짓습니다

 

<율곡 이이의 자경문>

1.  입지(立志) - 뜻을 크게 가져라.

2.  과언(寡言) - 말을 적게 하라.

3.  정심(定心) - 마음을 바로 잡아라.

4.  근독(謹獨) - 혼자 있을 때 삼가라.

5.  독서(讀書) - 책을 읽어라.

6.  제소욕심(除掃慾心) - 욕심을 버려라.

7.  진성(盡誠) - 오로지 성실하라.

8.  정의지심(正義之心) - 바르고 옳은 마음을 가져라.

9.  감화(感化) - 사람을 감화시켜라.

10. 수면(睡眠) - 마음을 항상 깨어 있게 하고 바르게 자라.

11. 용공지효(用功之效) - 공부해서 효과를 거두어라.

- 선비가 사랑한 나무 (강판권 지음) 중에서 - 

 

[퇴계 이황과의 만남]

율곡 이이는 21세에 한성시에 응시해 1등으로 합격하고

22세에 성주목사(성주는 오늘날 경상북도 성주군) 노경린의 딸과 혼인 ,

23세에 성주 처가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중 퇴계 이황을 방문해

역사적인 만남을 했으며

이때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은

서로의 학문, 사상을 주고받았고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을

스승처럼 존경하게 됬습니다

당대 대학자이자 노학자(늙은 학자) 퇴계 이황 역시

그렇게 짧은 만남을 가진 젊은 선비 율곡 이이를 보고

 

<퇴계 이황>공자가

후생가외 後生可畏 (자기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지만

[뛰어나서] 두려워 할만하다 [비슷한말로는 청출어람]) 라고 하였는데

이 젊은이를 보니 정말 맞는 말이다 !

 

라며 놀라워 했습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가 23세때에는

별시라는 특별 과거시험에서 출제자들이 몇달동안 고심해

제출한 문제를 '천도책 天道策' 이라는 이름으로

단 3시간만에 답안지를 작성해 장원급제(1등합격) 했고

고시관(시험 담당관) 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율곡 이이가 26세때

아버지 이원수가 돌아가셔서 율곡 이이는

자운산의 신사임당 묘에 아버지를 합장하고

3년상을 치뤘습니다

 

[관직에 나선 율곡 이이]

율곡 이이는 29세때 문과와 명경과(대과)에 장원급제해서

호조좌랑 벼슬을 시작해서

30세에는 예조좌랑, 

33세에는 사헌부 지평 , 같은해 이조좌랑 관직 등을 받아 일했고

이후에도 지방관 등 여러 주요 관직들을 맡게 되었습니다

 

41세의 율곡 이이는 은퇴를 결심하고

해주 석담으로 돌아가 청계땅을 짓고

43세에 은병정사를 지어 교육에 힘썼습니다

 

이종상 '율곡 이이 초상' (1975)

 

율곡 이이는 자신의 직언과 개혁방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미련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본가였던

경기도 파주시 율곡 栗谷 , 즉 밤골마을로 돌아와

안식을 취했고 율곡은 그의 호가 되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 , 성학집요 등 여러 책들을 남겼는데

그의 책들에서는 공통적으로는

학문을 가르쳐 사람들을 일깨우고 변화시켜야 한다고 했고

이는 율곡 이이의 사상이 나타난 서적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격몽요결 , 한국학중앙연구원

 

성학집요 , 국립 고궁박물관

 

당시 율곡 이이는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붕당'이라는 조선시대의 파벌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고

붕당의 폐단을 경계하고 민생고를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율곡이이 스스로도 동인들에게 서인으로 지목되며

결국 동인들의 공격에 큰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은퇴 결심 이후에도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일한 율곡이이였고

47세까지 율곡이이는 여러 주요 관직들에 임명되

사회개혁에 매진했는데

당시 상관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을 거절하다 파직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주요 관직인 이조판서로 재직중이었던

율곡 이이가 같은 덕수이씨였기에

주변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율곡 이이를 찾으러 갈것을 권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이순신>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는 만나보는 것이 옳지 못하다

 

라고 거절했습니다

훗날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때

거북선과 판옥선을 이끌고 일본 함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조선의 명장이자 한국의 위인이 되었고

두 한국의 위인이 만날뻔하다가 못만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이이와 이순신은 덕수 이씨가문의 훌륭한 선비와 장군이었고

덕수이씨 가문에서 율곡 이이가문은

문관으로서 영예로운 이름인 문성공파로 불리게 됬고

충무공 이순신 가문은

장군으로서 영예로운 이름인 충무공파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십만 양병설]

48세의 율곡 이이는

삼사 三司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로부터

터무니 없는 탄핵(죄상을 들어서 책망)을 받게 됬는데

율곡 이이가 국가 권력을 제멋되로 휘두르고 교만해서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평소 붕당정치에서도 중립을 지키며 관료들의 화합을 추구한 그였지만

청렴함과 유능함, 그의 평소 성격등에

그에 대한 다른 관료들의

큰 시기와 질투가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에 우계 성혼은 삼사의 모함을 당시 조선임금 선조에게 상소하고

태학생 460여명도 율곡 이이에 대한 삼사의 모함을 상소했고

이에 삼사의 율곡 이이를 모함한 관리들은 모두 귀향가게 됬고

선조는 율곡 이이를 다시 불러서 이조판서로 명했지만

율곡이이의 건강상태는 악화되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율곡 이이는 1583년 10월 죽기 직전 조국에 대한 마지막 봉사를 하려

결국 직책에 부임했고

그는 질병이 깊어감을 느끼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며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율곡 이이>미리 군병 10만 명을 양성하여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대비하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10년을 지나지 아니하여 

땅이 무너지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율곡 이이는 이미 뛰어난 식견으로

당시 조선은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고 태평했기에

군사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 ,

조선 내부의 오랜 평화와 붕당으로 인한 문제점,

외국이 성장에 대한 것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이런 율곡 이이의 발언에 주변 신하들이 코웃음 쳤습니다

오랫동안 평안해서 난리를 겪지 않았던 여러 신하들은 모두

 

<여러 신하들>선생이 잘못한 것이다

 

하며 율곡 이이의 발언을 무시하며

율곡 이이의 발언은 받아들이지 않아졌고

과연 그의 말대로 10년도 지나지 않아

1592년조선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조선을 공격한 '임진왜란' 을 일으키게 되어 수도 한양이 일본에게

점령당하고 임금이었던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몽진(왕의 피난) 가는 사건까지 벌어지게 됬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자로는 풍신수길)

 

이때 율곡 이이의 말을 듣지 않았던 류성룡 역시

임진왜란 후에 말하기를

 

<류성룡>지금 와서 보면 문성공(율곡 이이)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약 그의 말대로 (10만 군사를 길러 대비) 하였으면

나라일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

또 그가 전후로 계획한 것이 어떤 사람은 잘못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모두 꼭꼭 들어맞아서 참으로 따라갈 수가 없으니, 

만약 율곡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능히 오늘날을 타개할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라며 율곡 이이의 정확한 예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했습니다

 

류성룡

 

류성룡 역시 이순신 장군의 친구이자

임진왜란을 수습한 조선의 명재상이었지만

율곡 이이는 평소에 류성룡은 재주가 훌륭하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문제가 있어

내(율곡 이이 본인)가 죽어야 그 재주를 펼친다고 예언했고

결국 이 역시 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이미 건강이 약화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다시

직책을 맡아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후 1584년 1월 16일 서울 대사동(종로 화신백화점 일대) 에서

별세하셨습니다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

우계 성혼과 송강 정철이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습니다

청렴했던 율곡 이이는 평소 집안에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서

다른 이의 수의를 얻어다 장례를 치뤘으며

조선국왕 선조 역시 크게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보지 않았습니다

 

[율곡 이이의 청렴한 삶]

율곡 이이가 잠시 벼슬을 사양하고 파주에 물러나 있었을 무렵

최항이라는 인물이 율곡 이이를 방문해 겸상(같이 밥먹음) 을 했는데

반찬이 너무 빈약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항>이렇게 곤궁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까 ? 반찬도 없이 진지를 잡숫는대서야,,,

 

이에 율곡 이이는 웃으며

 

<율곡 이이>나중에 해가 지고 난 뒤에 먹으면 맛이 있네 !

 

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율곡 이이가 해주에서 살때 100여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살았는데

식량이 떨어질때가 종종 있자

선비였음에도 직접 대장간을 열어 호미를 만들어 팔아서

양식을 사먹었습니다

 

한국의 전통 농기구 '호미'

 

또 해주에 살때 율곡 이이의 집안에 계속해서 양식이 모자르자

그의 어릴적 친구이자 재령군수였던 최립이 율곡 이이 선생에게 쌀을 보내주었는데

이에 율곡 이이는

 

<율곡 이이>국법에 장물 臟物 (남의 물건 ?? ) 을 주고받는 죄는 아주 엄격한 것이다.

우리나라 수령들이 나라 곡식 아닌 다음에야 따로 무슨 곡식이 있을 것이냐.

수령들이라 할지라도 제 개인의 곡식을 주는 다음에야 어찌 안 받을 것이 있겠냐마는, 

이 최 군수는 제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응당 나라 곡식을 보내 주는 것일 테니 

내가 어찌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대로 시장한 채 견디며 사는 것이지 !

 

하고는 곡식을 돌려보내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율곡 이이에 대한 다른 이야기로는

율곡 이이는 임진왜란때 선조가 위기에 쳐해 피난갈 것을 예견하고

파주 임진강가에 있는 '화석정' 에 기름을 발라놔 폭우에도 활활 탈수있게 해놨고

이후 임진왜란으로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의주를 향해 한밤중 피난가는 선조일행은

깜깜해서 강을 건너기 어려워하다 율곡이이가 이전에 화석정에 기름을 발라놨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석정에 불을 질러 그 불빛으로 강을 건너 무사히 피난갔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율곡 이이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파주 화석정

 

율곡 이이 ,

그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에 성리학을 정립한 조선의 대학자이자

뛰어난 정보력을 바탕으로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조선의 대정치가이자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의 큰 스승이 되었습니다

 

<율곡 이이의 명언>뜻을 세우고 명확히 알며 독실 篤實 (성실하고 극진) 하게 행하라. -율곡 이이

뜻이 서지 않으면 만사 萬事 (온갖 일)가 성공하지 못한다. -율곡 이이

먼저 반드시 뜻을 세워라. -율곡 이이 

 

강릉 오죽헌의 율곡 이이 동상

 

대한민국 5천원 지폐의 율곡 이이

 

<라봉봉>조선의 대학자이자 대정치가 율곡 이이의

뛰어난 능력과 청렴한 삶은 수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특히나 그가 10만 양병설 등

미래를 예측했다는 이야기들은 단순한 허구나 허언으로 볼게 아닌게

사회에는 인과율(원인과 결과) ,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 이런 말들이 있는데

지능이 높은 사람일 수록 여러 식견과 경험 등을 바탕으로

문제 원인을 판단하고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높다고 생각되고

율곡 이이는 당시 조선의 고지능자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집단에서는 수많은 위기들이 방치되고

감성에 의존한다거나

전문가들의 조언은 무시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렇다면 그 집단은

당연히 망하게 되감을 본것을 저는 여러번 본 적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당시 율곡 이이의 조언들을 무시했던 조선 조정과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정보력 과소평가' 들 ,

그렇다면 '역사는 반복된다' 라는 말같이

같은 결과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율곡 이이는 조선 성리학의 대학자이자

한국의 위인으로서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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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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