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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이후 고려와 동아시아 세계에는

전쟁없는 평화기가 도래했고

그 시기동안 고려는 국제무역을 하며 번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려는 거란이나 여진같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압록강~함경남도까지 천리장성을 쌓아 대비했습니다 (1033~1044)

 

고려의 천리장성

 

이후 북방에서 여진이 강성해졌고

여진과의 교전이 있었는데

고려군이 패배해서 고려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에 윤관이라는 인물이 나서서

고려는 보병중심이고 여진은 기병중심이니

여진의 위협에 대응하려면 고려도 기병을 길러야 한다

주장했고

이에 고려는 윤관의 말대로

기병과 특수병들의 군사조직인 '별무반' 을 육성하는데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중심으로 뽑았고

별무반은 크게 3가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별무반의 종류>
1. 신기군 : 기병부대
2. 신보군 : 보병부대
3. 항마군 : 승병(젊은 승려[스님]부대)

 

별무반

 

윤관은 평소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의 김유신 장군을

존경했는데

그 같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을 하고싶었습니다

 

그렇게 윤관은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며

별무반을 훈련시켰고

이후 윤관은 17만 고려대군을 이끌고

북방으로 출전해 그곳에 살던 여진족을 정벌하고

그 지역에 동북 9성을 쌓아

옛 선조들의 땅을 수복(되찾음)하고

고려 영토를 개척했습니다

(윤관의 여진정벌)

 

<윤관이 여진정벌 후 성벽에 적은 글귀>

이 땅은 본디 구고려(고구려) 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현재 임금 = 고려 예종)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동북 9성을 개척하고 비를 세우는 고려군을 그린 '척경입비도'

 

동북 9성 추정도 , 고려의 북진정책을 상징

 

이후 동북 9성은 여진족의 공격를 받았고

여진족들은 고려에 찾아와 애걸복걸하며

동북 9성을 반환해달라 했고

고려는 동북 9성의 개척지역이 너무 넓어

현실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판단해

여진이 절대 고려를 공격하지 않고 또

대대로 여진은 고려에 조공을 한다는 조건으로

여진과 화친을 맺고 동북 9성을 돌려주었고

여진은 이 약속을 지켜 동북 9성과 여러 지역을 기반으로

힘을 키워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란과 송을 멸망시킬 때에도

고려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애써 수복한 동북 9성을 돌려준 것 자체로도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고려 조정의 대세는

여진과의 전쟁보다는 화친을 맺자는게 대세여서

결국 윤관은 고려 신하들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고

고려 예종의 보호로 문하시중에 임명됬지만

얼마후 세상을 떠납니다

 

윤관 표준영정 - 이종상 , 윤관의 여진정벌은 비록 허무하게 끝났지만 고토수복에 대한 의지는 이후에도 계승되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정벌이나 요동정벌 + 조선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고려는 권신이자 왕의 외척인 이자겸이

세도 정치를 펼치고 있었고

이자겸의 경원이씨 가문은 왕실과 엮여있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말처럼

주변 사람들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대대로 고려왕실과 혼인관계로 엮여있었던 문벌귀족 경원 이씨 가문

 

게다가 이자겸의 딸이 왕태자 인종을 낳고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은 엄청난 세도가가 되었고

그의 일곱아들들도 고려의 요직들을 장악했습니다

 

또 이자겸은 윤관이 발굴한 고려의 전설적인 무인인

척준경과 손을 잡아서 군권도 장악했습니다

 

이후 여진족이 강성해져서 세운 금나라는

요나라와 송나라를 멸말시켰고

고려에게도 사대관계를 요구해 자신의 신하가 되라 하자

이자겸은 여진족의 말을 듣기로 하고

금나라에 사대 정책을 폈습니다

이자겸의 세도는 날로커져

그의 아들들의 저택은 거리마다 있고

그에게 온 뇌물은 너무 많아 썩어나갔고

힘없는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해

고려 백성들은 이자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인종은 나라권력이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에 의해

좌지우지되자 위기를 느꼈고

고려와 인종의 안위를 걱정한 고려 신하들은

이자겸과 척준경을 죽이려했고

결국 위기를 느낀 이자겸과 척준경은 반란을 일으켰는데

척준경의 무력 앞에 결국 고려 궁궐은 불타올랐고

인종은 패배하고 이자겸의 난은 성공하는듯 했지만

이후 인종은 척준경을 꼬득여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결국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이자겸을 잡아 귀양보냈습니다

(이자겸의 난 끝)

 

이 사건은 고려 내부의 엮이고 엮인

경원 이씨가문과 고려 왕실의 내분적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계속해오던 고려의

'문벌 귀족 사회' 는 큰 동요가 있었고

고려의 왕권은 크게 추락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당대 고려의 문벌 귀족들의 권위는 컸고

다만 인종은 이자겸의 난 종결 이후

서경출신 인물들을 크게 등용해 키웠는데

이자겸의 난 이후부터

고려 조정은 개경파 귀족들과 서경파 귀족들로 나뉘어

문벌귀족 사회는 크게 분열됬습니다

 

<라봉봉>고려인들은 고주몽의 고씨가 세운 고구려가 멸망하고

중간에 끊어진 것을

왕씨가 다시 고려를 세워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고려 건국자인 태조 왕건시대대부터 시작된 북진정책을

500년 고려왕조가 멸망할때까지

계속 이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윤관의 여진정벌이고

훗날 조선의 세종대왕은 윤관의 여진정벌을 깊게 관심가지고 살폈고

윤관의 고토수복의지는 세종대왕에게 계승되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 고려 문벌 귀족사회는 큰 동요가 있었고

점차 강성했던 문벌귀족사회에도 큰 균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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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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