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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탄생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고졸 출신 법조인 노무현]

[부림사건과 인권변호사 활동]

[청문회 스타]

[바보 노무현]

[인터넷의 도움을 받은 대통령 당선]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라봉봉>

 

[고졸 출신 법조인 노무현]

일단 2000년대 이후는 언론 , 인터넷의 활성화로

기록 , 자료가 급속도로 방대해지기 때문에

참여정부 주요 정치사 사건인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은

따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

 

김대중 정부 다음정부는

역시 민주당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인데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사회에서 팬클럽이 생긴 최초의 정치인이며

여러 논란도 많았으며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애정이 있는 정치인입니다

 

'서민 대통령' 이라고도 불리며 오늘날에도 국민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받는 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태어났고

가난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합니다

 

어린시절 노무현 (귀엽ㅋㅋ)

 

어려운 집안형편때문에 방황도 하다가

21살즈음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회사를 다녔지만 너무 월급이 적어 생활이 되지 않아

고시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했고 막노동을 하며 사법고시를 공부합니다

 

당시까지만해도 1년에 사법고시로 고작 100명 정도만 선발하던 시기라

민간에 법조인 , 변호사들이 극히 희귀한 시대로서

변호사 시장은 거의 독과점 체제였고

승률에 관계없이 변호사들은 모두 부자였던 시대였고

노무현은 많은 돈을 벌 생각에 사법시험을 준비합니다

 

노무현은 중간에 34개월동안 군복무를 해(옛날엔 군대가 3년이었습니다)

현역병으로 군복무를 마쳤고

1973년 28세의 노무현은 고시생 신분임에도 결혼 적령기가 다가와 결국

영부인 권양숙 여사와 결혼후 아이(노건호) 도 낳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의 결혼식 사진

 

1975년 노무현은 30세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는데

당시는 사법시험이 1년에 극소수만 뽑던 시절이라

법조인 자체가 엄청나게 적었던 시기이고

가히 조선시대 과거시험 합격수준이었는데

노무현은 사법시험 합격자중 유일한 고졸이었습니다

 

(조선시대로 치면 과거시험에서 양반이 아닌 양민 , 평민출신이 합격한꼴)

 

청년시절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사진 (합격하고나서부터는 돈이야 어디서든 구했겠지만 혼자 양복안입고 노가다복 입은 상남자입니다)

 

이때부터 이미 노무현은 일반인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잠시 판사생활을 하다가 경제적 문제로 사임했고

 

노무현은 변호사로 활동했는데

초기 변호사시절 그는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속물이었고

부산에서 개업한 변호사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노무현까지 불과 3명이었다 하고

노무현은 더 많은 돈을 벌려 법무사들의 밥줄인 등기업무까지 하며

부산지역 법무사들의 반발을 샀다고도 합니다

 

변호사 시절 노무현

 

[부림사건과 인권변호사 활동]

사법시험 합격으로 순식간에 인생역전을 하며 (개천에서 난 용 , 개룡남)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런 속물 변호사였던 그에게도 군사정권의 바람은 피할 수 없었고

 

1981년 우연히 변론을 맡게 된

군사정권의 용공조작(공산주의 사상 긍정적 용인을 조작

즉 일반인들에게 죄를 씌우려 북한찬양했다 조작하는거)

사건인 부림사건을 변호하며

국가폭력의 참상을 느끼고 분노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고

 

노무현과 부림사건을 그린 영화 '변호인 (2013) 辯護人, The Attorney'

 

노무현은 그의 친구 문재인(현재 대통령) 변호사를 만나서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

 

를 열고 부산의 대표적 재야 인권변호사로 활동합니다

 

이후 둘다 대통령이 되는 문재인(왼쪽) 과 노무현 변호사 , 둘의 우정은 유명하고 마치 전두환과 노태우의 육사시절 죽마고우 우정이 생각납니다

 

노무현은 열성적으로 해고노동자들 , 형편이 어려운사람들을 위한 변호사일을 하다가

검찰에 구속당하고

안기부(오늘날 국정원) 의 압박으로 변호사 면허가 강제 정지되었으나

노무현의 인권변호사 활동을 주목한 김영삼의 제의로

노무현은 부산직할시 동구에 출마해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됩니다

 

[청문회 스타]

초선의원 노무현은 1988년 5공청문회때 청문위원이 되어

부패 , 비리와 연관된 전두환 , 정주영 등 거물 인사들에게

열성적으로 맞서며 열혈 정치인의 모습을 보이며

청문회 스타 , 스타정치인이 되었고

특히 전두환과 청문회 이후 분을 참지 못해

명패를 내던진 것도 유명합니다

 

5공 청문회 당시 분노한 노무현 의원

 

[바보 노무현]

노무현은 이후 3당합당을 야합(불륜) 이라 비판하며 거부하고

김영삼 곁을 떠나 민주당계로 들어갔고

이후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는데 당의 힘도 약했고

낙선에 낙선을 거듭하고

15대 총선때는 정치 1번지 종로에 출마하다가 역시 낙선합니다

 

이후에도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은

쿠데타와 3당합당의 원죄가 있는 한나라당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부총재를 맡았고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웁니다

 

노무현은 정치인생동안

계속해서 영남=보수정당 이라는 지역구도 , 지역감정을 깨려

경상도에서 출마했는데 꾸준히 낙선했고

이에 '바보 노무현' 이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지역구도를 깨려했던 바보 노무현 , 노무현 낙선 기록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때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고

2001년 16대 대선에 출마를 선언했고

민주당 경선(대선전 당내 경쟁)에서

노무현은 행정능력이 검증된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이인제 후보가 이전 김영삼 정부때 인물이어서

당적 정체성이 애매했고

이전에도 보수 정당에 참여하지 않고

순수 민주당계로 갔던 노무현은 이런 정통성때문에 결국

'노풍(노무현 바람)'을 일으키며 16대 대선후보가 됩니다

 

[인터넷의 도움을 받은 대통령 당선]

이시기부터 유시민이나 노무현-문재인 정부 인사들이 대거 모이게 됬고

노무현은 16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맞다이를 뜹니다

 

노무현과 이회창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노무현은

나름 노무현의 선임이었던 민주당계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이

IMF 극복 , 대북 평화정책 , 한일월드컵 개최 , IT와 한류문화 확산 등

여러 좋은 선례를 남기며 높은 지지율로 퇴임해

김대중 버프도 받았고 (근데 선임대통령 버프가 ㄹㅇ 중요한게

박근혜도 아버지 박정희나 높은 지지율로 퇴임한 이명박 버프가

엄청나게 컸고

미국 보수정당 공화당은 공화당 대통령인 링컨 사후

링컨 버프로 수십년동안 흑인들 표 몰표받고

장기 집권을 시작합니다)

 

또 이회창 후보의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있었는데

이게 당시 확산되던 '인터넷' 으로 퍼져나가자

이회창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그럼에도 둘은 박빙을 벌이다가

노무현은 제 3후보로 떠오르던 현대가의 정몽준후보와 단일화를 하며

지지율을 응집시켰고

대선에서 노무현은 48.9% 표를 얻고 이회창은 46.6% 표를 얻으며

2002년 노무현은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대선후보시절 유세하는 노무현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

 

[참여정부]

2003년부터 시작된 노무현 정부는

우리 민주주의를 국민의 참여가 일상화되는 단계로 발전시키겠다며

자신들의 정부 이름을 '참여 정부' 라 이름지었고

참여정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참여정부 초기 노무현 정부의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계파갈등이 엄청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김대중 정권시기 대북송금 특검이 터지자

노무현 대통령은 당내 호남파에게 큰 비판을 받기도 하고

더 큰 혼란도 일어났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집중을 명분으로 새천년민주당을 공식탈당하고

그를 따르던 친노인사들로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려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새천년민주당은 노대통령이 희대에 배신을 했다며

강력비난을 했고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반으로 쪼개져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으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대립합니다

 

결국 새천년민주당은 한나라당 , 야당세력과 손을 잡고

노무현을 탄핵하려 했고

대통령 탄핵 소추안은 안건소개나 찬반토론도 생략한채 곧바로 진행되

193명 찬성 , 2명 반대로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됩니다 (ㄷㄷ;;)

 

노무현 대통령 탄핵당시 국회의석 , 파란색 한나라당이고 초록색이 새천년민주당으로 노란색 열린우리당 제외 대부분 찬성했다 보면됩니다

 

노무현 탄핵당시 오열하는 유시민 (노무현계 인사)

 

탄핵후 노무현은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 직무를 임할 수 없어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임시 대통령)을 맡게 됬고

스트레스가 심해진 노무현은 일주일 내내 잠만 잤고

관저에 거의 유폐되다싶이 지냅니다

 

잠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고건총리(박근혜 대통령 탄핵때에는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것도 있습니다)

 

귀족적 성향이 강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국회의원 , 정치인들의 절대적 신임 , 두려움을 받고 있던 것에 비해서

(김대중 대통령이 카리스마로 유명합니다)

 

서민적 성향이 강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는 사랑받았지만

국회의원들에게는 엄청나게 무시 , 까였던 인물이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뉴스에서 엄기영 앵커의 발언이 이를 전적으로 보여줍니다

 

<탄핵당시 엄기영 앵커의 오프닝 멘트>

여러분 ,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

설마 그러랴 했습니다마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습니다.

헌법 기관인 국회의원의 개별적인 판단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193명의 찬성으로 ,

비리로 점철된 16대 국회는 이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킨 것입니다.

탄핵 가결, 그 최대 피해자는 물론 우리 국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무현 탄핵당시 분위기는

 

정치인들 탄핵 찬성 VS 국민들 탄핵 반대

 

로 흘러갔고 (실제로 전국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엄청 뚜렷했고

노무현의 국민적 인기와 한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권 말기때 무능 , 실정으로 일어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다르게

노무현 탄핵은 정권 초기에 일어난 일이었고

굳이 의회가 계파갈등등으로

막 시작한 정국을 뒤집어버리며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냐는 여론이 확산됬는데

일개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민심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전국구인 대통령을 탄핵할 자격이 있느냐는 말이 나왔고

심지어 보수당 텃밭인 경상도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 정도였기에

탄핵이 성공했음에도 민심이 야당연합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버립니다

 

분노한 시민들은 '탄핵무효 민주수호' 를 외치며

노무현의 직무복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 , 탄핵반대 시위를 전국적으로 했고

(이에 노무현은 국민이 지켰다는 말이 나옵니다)

 

2004년 3월 20일 노무현 보호를 위한 광화문 촛불집회 사진

 

원래 한국 보수층(당시 한나라당)은 당연히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일단 보수층 성향은

'보전하여 지켜야한다 , 전통옹호' 라는 닉값을 하듯이

참 보수보수한 성향이 강해서

국가와 현 정권의 안정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성향이 있기에

(일단 미운놈이어도 계속 정권바뀌면 그것도 그것대로 손해가 생기거나 피곤해짐)

 

이러한 반탄핵 역풍이 엄청나게 확대되자

기존 한나라당 지지층마저 한나라당에 등을 돌리게 됬고

당시 시민여론은 국회의원들의 노무현 탄핵을

과거 군부의 쿠데타와 동일시하게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결국 야당연합은 역풍을 맞고 궁지에 몰렸고

이에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 의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둬버리자

탄핵을 주도한 야당세력은 심판당해버려서

탄핵 주동자들이었던 새천년민주당 대표 , 한나라당 대표 , 자민련 총재 등이

줄줄이 참패 , 낙선하며 정계에서 밀렸고

 

원래 대통령 탄핵은 워낙 막중한 일이라

3권분립에 의거해 국회의원들 찬성 이후에도 헌법재판소에서도

재판관 9명중 6명 의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결국 사법부에서 탄핵에 필요한 찬성수가 도달하지 못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5월 14일 열린 탄핵심판청구에서 기각됩니다

 

<헌법재판소장 윤영철>대통령의 법 위반 행위가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없고 ,

파면 결정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민심도 탄핵반대여론이 워낙 강했고

노무현 탄핵도 당내 정파싸움에 일어난 일이라

헌법수호적으로도 탄핵하기 애매했음)

 

노무현 탄핵사건은 참여정부 초기 어이없는 해프닝이기도 했지만

한국의 법치주의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었고

국가 수장인 대통령도 법치주의에서 어긋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고

이후 이러한 경험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집니다 (..)

 

노무현은 팬클럽이 생긴 최초의 정치인으로서

'노짱(2000년대 잘나가는 사람 이름에 친밀감을 더해 짱붙이는게 유행했음

예를들면 한류가수 보아의 경우 보아짱)' 이라 불리며 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정치인 노무현은 정계에 적이 엄청나게 많았고

이러한 모습은 퇴임 뒤에도 똑같이 이어집니다

 

<라봉봉>한국사회의 현 20~30대가 대부분 어린시절을 노무현 정부때 보냈기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깊게 있고

어린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은 다들 좋은 대통령 , 재밌고 친근한 대통령 이미지였는데

이후 나이가 들고 알게된 사실 ,

여러 사실들이 밝혀지며 그의 무능함과 한계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있고

하여튼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나 지금이나 국민적 큰 사랑을 받은 대통령임은 분명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고졸출신에 서민대통령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실제로는 그가 아무리 고졸이었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을지라도

당시 되기 엄청나게 되기 힘들었던 법조인이 됬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는 순식간에 귀족급 삶으로 삶이 바뀌었고

그럼에도 이후에도 쭉 서민적 생활모습 , 언행등으로

이미지가 서민대통령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오히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가 고졸+사업가 등 이력이 있어

변호사였던 노무현보다 더 서민적 행보로 살았다 생각하나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는 학교를 안다녔어도 독서를 풍부하게 한 인물이라

당대 지식인들 , 법조인들에 비해 딱히 꿀리는 감이 없었고

 

아무리 과거시험이나 사법시험이 어렵다 한들

시험공부라는 점은 변함이 없고

사실 세속적인 시험공부에 비해

독서야말로 참 선비 , 귀족적인 것이기도 해서

이러한 지식인적 모습으로 김대중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졌고

그의 측근들도 그를 존경하면서도 보고하러 갈때 사시나무같이 다리를 떨었다고 합니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과 반대로

노무현 대통령은 괜히 옆에서 장난치고 싶기도하는 친근한 이미지이고

또 참 세속적인 인물이었다고도 생각되는데

이게 참 나쁘다고만 볼수도 없는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나

대신 이런 세속적 , 속물적 모습은 일반 국민들보다 더 높은 도덕규범을 요구받는

'정치인 노무현' 으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생각됩니다

(아무리 한국 정치인들이 욕을 먹지만

어짜피 한국 정치인들도 다 사법고시 합격자 , 시험 수석합격자 , 금수저들이 널리고 널렸기에

이런 속세적인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이 필요한게 맞습니다)

 

그러나 인생역전 신화나 항상 당당했던 열혈정치인 노무현은

이런 모습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기도 했고

참여정부는 여러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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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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