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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의 정치·외교>

[김대중의 인망]

[대북 인도적 지원과 고난의 행군]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

[햇볕정책의 한계]

[홍삼 트리오 스캔들]

[행동하는 양심]

<라봉봉>

 

[김대중의 인망]

국난이었던 IMF 극복을 최우선으로 했던 김대중정부는 여러 노력들에 힘입어

단기간에 IMF 를 극복하고 다시 한국 무역을 흑자로 돌려놓았고

사실 김대중은 경제에 취약한 이미지가 있는 민주당 대통령이었지만

청년시절부터 전라도 목포에서 선박 여러척을 운영했던 청년 사업가였고

 

청년 시절 김대중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정치적으로는 진보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당시 대세였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공기업 민영화 등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했던 인물로서

경제 정책에서는 나름 혜안이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참고로 원래 한국과 미국 민주당은 자유주의[우파계열] ,

한나라당 , 공화당은 보수주의[우파에서 더 오른쪽]라는 말도 있습니다)

 

대통령에서 계속 낙선하자 경제도 열공했던 인물이었고

이런 모습들로 대통령이 된 이후 IMF 극복때 빛을 발했는데

나름 경제나 문화정책은 선방했고

이외에도 그의 최대업적 혹은 최대실정이라 불리는 외교 , 대북정책이 있습니다

 

지금은 점차 이산가족들이 고령화되어 죽거나 사라져가던 시기이지만

20세기까지만해도 분단된지 얼마 안되서 이산가족들이 다들 젊었고

당연히 모두가 평화통일을 지금보다 더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현재도 남북문제 , 평화통일문제는 진보 , 보수계를 막론하고 한국 대통령이 해결해야할

최우선 과제중 하나이며

한국 민주화 정통인물 , 재야 운동가 , 평화 , 통일 운동가로서

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정부에 대한

당시 국민 , 세계 사회의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김대중은 당선 이전부터 이미 세계사회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대통령 , 평화주의자 만델라나

인도의 간디같은 불복종 , 민주화 운동가로

세계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었고

 

남아공 민주화운동가 넬슨 만델라 , 김대중 대통령은 아시아의 만델라라 비유되기도 합니다

 

(괜히 이전부터 일본이나 미국에서

한국 군부정권에 그를 보호하려 했다거나

마이클 잭슨이 김대중 취임식에 온게 아닙니다)

 

[대북 인도적 지원과 고난의 행군]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외교력 , 국제적 인지도를 바탕으로

미국 , 중국 , 일본과 협력관계를 유지했고

대북관계에도 노력했는데

당시 북한은 큰 식량난에 처해있었고

고향이 이북(북한을 존중 , 친근하게 부르는 말) 이었던

당시 한국 재계서열 1위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을 앞세워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소 500마리를 북한에 인도적 지원합니다

정주영회장은 북한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어서

당시 최대한 뱃속에 새끼를 품은 암소를 보냈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소떼를 이끌고 북한에 방문하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 한국 기업사 최대 이벤트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북한은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대기근이 있어 재기불능 수준으로 경제가 망가졌고

이 시기를 '고난의 행군' 이라 부릅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당시 북한의 기아(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들

 

고난의 행군 원인으로는 대기근 뿐만 아닌

공산주의 대장국가였던 소련이 몰락하자 소련의 원조 , 지원도 끊겨

당시 공산권 국가들이 줄줄히 몰락하거나 민주화되던 시기와도 겹친 것도 있습니다

 

이미 80년대부터 북한은 남한과 체제경쟁에도 밀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남한경제에 압도당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러 삽질을 하다가 소련까지 망해버리자 90년대부터는

엄청난 식량난 , 에너지 난이 생겨

30~40만명의 사람들이 굶어죽고 당시 세계사회에서는 북한 정권 역시

동유럽같이 몰락하거나 민주화될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고난의 행군 전후로 나온 말인 북한사회에서 거주지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부랑민을 일컷는 말인 '꽃제비' 들의 모습

 

북한은 1995년 남한에 식량난으로 인도적 쌀지원을 요청했고

당시 김영삼 정부 역시

 

'민족복리 차원에서 어떤 전제조건이나 정치적 부대조건 없이

북한이 필요로 하는 곡물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

 

라고 말하며 쌀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는데

여러 북한의 비협조 및 사건들로 다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한국정부의 조건없는 쌀지원에 대한 태도에도

북한의 막가파식 행동에

결국 김영삼정부는 쌀지원이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 판단해

대북정책을 강경책으로 선회시켜 쌀지원도 끝냅니다

 

대북 쌀지원 모습

 

또 당시는 김일성 사망(1994년) 등으로 북한 내부도

김정일의 권력계승 및 여러 혼란 , 북한사회가 급변하던 시기라

식량난 , 경제난 이외에도 정치적 혼란이 강했던 시기였고

당시 북한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마치 화약고나 폭탄으로 여겨졌습니다

 

[햇볕정책]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고

김대중 정부는 정주영회장과 소보내기 및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해서

삐뚤어진 북한을 계도시키겠다 생각했고

 

기존까지 북한이 세계사회에 문을 꽁꽁 닫고 고립주의 노선으로 갔기에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에 햇볕같이 아낌없는 사랑과 인도적 지원을 하면

북한도 따뜻한 햇볕에 더워서 문을 열고 세계사회로 나올것이라 생각했고

이에 김대중 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정책' 을 시행합니다

 

이솝우화 '해와 바람' 에서 나온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

정주영 회장의 방북(남북 민간교류) 이후

국가적 남북경제협력이 확대됬고

결국

2000년 6월 15일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가 서로 처음으로 직접 만나는

역사적인 이벤트였던 '남북정상회담' 이 실시됩니다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정상들의 만남이었고

당시 북한 역시 국제적 명망이 높고 평생을 평화운동에 힘썼던 김대중 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고

두 정상의 만남에 한국과 북한 국민 , 인민들은

너도나도 평화통일이 가까히 왔다 여겼습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김대중>위원장이 직접 나와 환영해줘서 대단히 감사하다

 

<김정일>김 대통령이 오셔서 내가 은둔에서 해방됐다는 외신의 보도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북한은 군사국가라 국방위원장이 제일 높습니다)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문을 발표해

남북의 평화통일에 대한 열망을 담았습니다

 

<6.15 남북 공동선언문>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등등

 

6.15 남북공동성언

 

이 시기부터 남북은 서로의 존재를 괴뢰나 비합법적 집단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나오고

동등한 대화상대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공존과 화해 , 협력을 도모해 평화통일의 시대를 열기로 합의합니다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

남북정상회담 이전까지

북한은 조금만 자극해도 폭발할거같은 분위기로서

여러 긴장도가 매우 높던 상황이었는데

세계 사회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주의 , 인권 , 대북 평회외교에 대한 공로를 인정했고

이에 2000년 김대중은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 , 분야가 각기 다르긴 하지만 노벨평화상은 노벨의 세계평화정신을 담은 상으로서 노벨상중 가장 권위있는 상이라고도 이야기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북한도 점차 마음을 열어갔고

남북 대화 , 협력 ,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됩니다

 

한국사의 최대 슬픔 '이산가족'

 

[햇볕정책의 한계]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의도는 좋았지만

햇볕정책은 무조건적 , 일방적 한국의 지원이었기에

북한이 평화정책을 이행할 조건 , 강제력이 그 어떤것도 없었고

결국 굶주렸던 은둔형외톨이 북한도 초기에는 고맙다며 잘 받아먹다가

햇볕정책의 이러한 허점을 파악하고서는

점차 배가 불러가며 염치를 상실하고 한국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사회의 반발을 무시하고

이상주의에 젖어 북한에대한 무조건적 지원이 북한의 마음을 열수 있다 여겼는데

김대중은 귀족주의 성향이 강한 그답게

북한 인민들을 그저 무지몽매하고 어리석고 가난한 아랫사람식으로 ,

시혜적 대상으로 여겼으며

가난한 북한 인민들도 자존심이 있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또 김대중 측근들이 불법적으로 북한에 세금을 송금한

'대북송금사건' 을 벌여 엄청난 논란이 일었고

결국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에 의해 특검수사가 진행되

불법으로 북한에 달러를 송금한 인사 및 그에 편의를 준 기업과 정권인사들이

법적 처벌을 받습니다

 

대북송금특검 당시 공판에 출석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 박지원 전 비서실장

 

결국 햇볕정책은 실패했고 (단 이후 햇볕정책은 대북평화정책으로 계승됩니다)

북한은 이후에도 대남적개심을 버리지 못하고

연평해전을 일으켜

대남도발을 벌입니다

 

2002년 2차 연평해전 당시 한국군 전사자 , 1차와 2차 연평해전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서해바다는 군사적 긴장도가 매우 높습니다

 

또 김대중 정부 말기부터 미국에서는

대북 강경 , 보수파인 공화당의 조지 워커 부시정부가 들어섰고

이후 점차 햇볕정책은 후퇴하고

이후에도 북한은 꾸준히 대남도발을 일삼았고

결국 한국의 인도적 지원을 받은 북한은

평화로 가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핵무기를 만들게 됬기에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엄청난 비판이 있었고

 

북한의 핵실험

 

퍼줄건 다퍼주고 얻은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북한이 핵무기를 만드는 등 더 상황이 악화됬다는게 있어

오늘날 김대중 대통령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핵대중' , '슨상님(전라도 사투리로

전라도 사람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의 의미로 선생님 , 슨상님이라 불렀는데

이를 비꼬아서 슨상님이라 부릅니다)' , '노벨상을 돈으로 샀다'  등 여러 비하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김대중은 민주화운동가 , 평화주의자였지만

너무 이상에만 치중했던 인물이라

너무 대국적으로만 보려했지 북한에 대한 그 어떤 의무 , 강제력도 시행하지 못했고

북한도 처음엔 고맙게 여기다 점차 퍼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얻어가지 못하는

한국을 대놓고 호구로 여기기 시작한게

이 시기부터였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상대여도 그저 퍼주기만하면 거지근성으로 진화한다거나

오래갈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원래 주고 받으며 서로 잘 되는게 이상적 관계입니다)

 

[홍삼 트리오 스캔들]

김대중 정권 말기

김대중의 세 아들은 이전 김영삼의 아들같이

권력형 비리에 휘말리게 됬고

 

김대중의 세아들 김홍일,  김홍업 , 김홍걸은

홍삼 트리오라 불리며 모두 권력형 비리에 휘말렸고

 

홍삼 트리오 스캔들

 

도덕성을 명분으로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 거대 , 자식 스캔들의 여파로

결국 2002년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합니다

 

2002년 6월은

한국이 월드컵 4강진출이라는 쾌거를 거두며

온 국민이 기뻐하던 시기였든데

그 날은 대통령의 세 아들이 홈삼게이트로 교도소로 이송되는 날이었고

이날 경기장을 찾은 그에게 사람들의 축하와 격려가 쏟아졌지만

이날 김대중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습니다

 

[행동하는 양심]

일단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통 인물이자 민주주의의 상징 인물로서

평화 운동에 힘썼고

그는 퇴임하는 해 지지율이 30%를 넘긴 대통령이었고 (한명은 이명박)

일단 대북문제나 아들문제를 제외하고는 여러 분야(인권 , 경제 , 문화 , 외교 등)에서

평타나 상타는 쳤던 인물이라 꾸준히 민주화의 거목 ,

인동초(겨울을 견디고 피는 꽃)로서 존경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원로정치인으로 남아

김대중평화센터를 건립하고 김대중도서관을 개장하고

대내외적 활동을 이어갔고

이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에게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탄압에 대한

사과를 받기도 하며 여야 인사들과 고루 잘지내며 화합의 정치를 위해 노력합니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후임자였던 민주당계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다'

 

라고 말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 당시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6월 21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연설을 하는데

보수정당 한나라당의 이명박 정부 출범이후 급속도로 악화된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남기며

그의 민주주의 , 일생에 대한 철학이 담긴 명연설을 토해냅니다

 

<김대중>여러분께 간곡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피 맺힌 심정으로 말씀한겁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여러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 3개월도 채 안되 폐렴으로 입원해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합니다

 

<김대중의 유언>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한국의 인권의식을 높인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김대중의 장례는 국장으로 시행됩니다

국장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온 국민의 추앙을 받고 서거한 자의 장의'

 

로서 가장 격식이 높은 장례식인데

대한민국에서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한국 경제 발전)과

2009년 김대중 대통령(한국 민주주의 발전)이

국장으로 장례가 치뤄졌습니다

 

국장으로 치뤄진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

 

<라봉봉>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사회에서

되게 오랫동안 신성화된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군부독재정권에 목숨을 걸고 맞서며

여러 훌륭한 모습을 보인 삶을 살은 인물이지만

이후 밝혀지는 그의 한계점 ,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됬고

한국 보수계 대통령인 박정희 대통령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는 그의 명연설은

그가 뛰어난 인권운동가 , 사상가였음을 알 수 있으며

옛날 탐험가 아문센도 조카에게

 

'어설프게 행동하는것 , 주저하는것 ,

그리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쁜것은 없다'

 

라고 말한게 생각납니다

 

이 사회의 악이라는게 참 단순히 없애도

또 자라나고 번식하는 그런게 있어서

결국 본질적으로 악을 이겨내려면

이러한 올바른 행동과 선행 ,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이 악을 이길 수 있다 생각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에 큰 빛이 된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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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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