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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문민정부>

[국민직선 대통령 김영삼]

[재벌 정주영의 대권도전]

[문민정부]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YS는 못말려]

[우루과이 라운드]

[역사 바로세우기와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전두환 · 노태우 구속사건]

[OECD 가입]

[소황제 김현철]

<라봉봉>

 

[국민직선 대통령 김영삼]

노태우 정부시기 군부가 아닌 민주화 인사였던 김영삼은

도중에 3당합당을 통해 노태우 , 김종필과 함께하며

민주자유당에 합류해 노태우 밑으로 들어갔고

이에 민주화 동지들에게 배신자라고 욕을 많이많이 먹습니다

 

3당합당 , 보수계 인사들과 손잡은 김영삼

 

그러나 김영삼은 속으로는 보수세력을 싫어했고

차기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

냉철하게 선거전략을 짜서 민자당에 합류한 것이었고

 

<김영삼>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김영삼이 민자당에 합류하자 1200만명이 사는 거대 권역인

영남 , 경상도는 민자당 중심으로 뭉쳐 든든한 보수텃밭이 되어주었고

또 김종필의 충청권까지 지지를 기대할 수 있게되어

민자당은 지역주의 구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군부정권도 노태우를 마지막으로 대가 끊겼고

딱히 노태우 뒤를 이을만한 마땅한 대선주자도 없었다는 점 ,

국민들의 반군부 정서와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다는 점 때문에

결국 김영삼은 민자당을 따먹고

민자당의 새로운 대권주자로 최종 선출됩니다

 

일단 김영삼은 군부세력 입장에서는

기회와 이익을 목적으로 참 뜬금없게 합류한 인물이고

민주화 세력 입장에서는 배신자였기에

김영삼은 간잽이 실력이 오지고 색이 흐릿한 인물이었고

 

일단 김대중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을 이끈 네임드 인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결국 그는 민주자유당 1992년 14대 대선에 출마했고

14대 대선은 더이상 군인출신 후보가 사라지고

순수 민간인 출신 후보끼리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14대 대선 포스터

 

선거기간중 민주당의 김대중이 크게 치고올라왔지만

 

당시 대선에서

한국 재벌 수장이었던 현대그룹의 정주영이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통일국민당을 결성해 출마하는 바람에 (전두환 정부때 정부에 정치자금 요구받기 등 시달린게 커서

빡쳐서 출마함)

 

반군부 , 반김영삼이라는 지지기반이 겹쳤던

김대중 후보와 정주영 후보의 표가 나뉘며

김대중은 지지기반이자 텃밭이었던 호남에서 압승 ,

수도권에서 선전했음에도

결국 김영삼에게 졌고

김영삼은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또다시 군부와 결탁한 인물 , 보수세력이 집권함에 탄식합니다

 

<당시 화제가 된 말>우리가 남이가 (경상도끼리 김영삼으로 뭉치자)

 

14대 대선 지역구도

 

[재벌 정주영의 대권도전]

14대 대선 당시는 김대중 역시 김영삼에 비해

지역판도 분석력과 정치공학력(표 계산)이 부족했던 시절이고

특히 정주영 후보의 약진이 인상적이었는데

비정치인 , 순수 기업가 출신이었던 정주영은

일단 한국 현대사 , 20세기 한국경제사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경제인이었고

오늘날 한국경제 원탑인 삼성도 당시 현대에게 한수 접어주던 시절이었는데

 

정주영은 항상 정치인들이 기업가들의 단물은 빼먹으면서

기업인을 무시한다 깊이 상심했고

비효율적 정치문화 ,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부에 정치자금을 요구받으며 스트레스 받은게 있어서

(정권바뀌거나 정치자금 함부로 손댔다 탈나면 뒤집어씀)

 

이런 인식들을 바꿔보기 위해 대선에 출마합니다

 

정주영과 국민당 인사들

 

통일국민당을 조직한 정주영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금전 , 금권정치를 했고 (80년대 스웩 ㅋㅋ)

온갖 돈을 뿌리며 전국구로 당원들을 어마어마하게 모았는데

기자 및 당원들에게 돈봉투를 살포했다하고

 

정주영 회장은 18만 현대 계열사 직원과 직원가족 , 주변인들을 조금씩 설득하면

실제로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 믿었고

한국 경제사에서 못할것 없이 밀어붙여 승승장구해오며

항상 자신감 넘치던 그는

돈과 조직에 의해 막대한 돈을 뿌리며

반값아파트 , 무료급식 , 2층 고속도로 건설 등 공약을 내세우며

정주영식 하면된다 계산법으로 밀어붙였는데

 

당시 막대한 돈을 뿌리던 정주영 회장의 통일민주당은

현대그룹 임직원을 비롯해 통일민주당 당원은 1200만으로 급속히 불었는데

그럼에도 기성 정치인들도 짬밥이 만만치 않았고

경제와 정치는 다른 분야였기에 결국

그가 거둔 득표수는 380만표에 그쳤고

 

(사실 당원들도 그같이 경제에 능해서

혜택만 빨아먹고 안찍어줌ㅋㅋㅋ)

 

금권선거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기존 정치인들과 전혀 다른 경제인 ,

시대를 앞서간 특이한 공약으로 의의가 있었고

이후 현대건설 사장출신 이명박은

그래도 기성 정치인들이 있는 정계로 정식 입문해

대통령에 당선되나 이후에도

정주영같은 순수기업인 , 비정치인 출신인물들의

도전이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문민정부]

하여튼 김영삼은 치밀한 정치계산 및

반 보수세력의 표가 갈린 상황에서 우여곡절끝에 14대 대통령에 당선됬고

일단 한국 정치계는 김영삼 정부부터 더이상 군부 출신 대통령이 나오지 않게 됬고

박정희가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군인출신이 아닌 민간인이 국민 직선을 거쳐

대통령이 됬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취임식 선서하는 김영삼 대통령

 

이에 그는 자신의 정부를 군부정부와 구별하기 위해

'문민정부' 라 불렀고

1993년부터 문민정부는 시작되는데

대통령이 되기위해 각을 계속 재며 보수세력과 결탁한 그였지만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고 다시 돌변하며 노태우등 온건 인물을 제외하고

전두환 같은 강경 보수세력과 대립합니다

 

[하나회 숙청]

이전 신군부 세력의 중심이자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는

군인사를 자신들 임의대로 결정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내밀며

문민정부를 길들이려 시도했는데

김영삼은 취임전부터 하나회를 파멸시키겠다 선언했고

취임 일주일만에 칼을 뽑으며

대장 , 중장 , 소장 등 군내 하나회 장군들을 떨구며

숙청작업을 시작합니다

 

하나회 멤버들 , 12.12사태 주역들

 

하나회 소속 군 장군들은

 

'군을 너무 홀대한다. 무신의 난이 왜 일어났는지 아는가 ?'

 

라고 불만을 표시했지만

김영삼은

 

'국군통수권자가 누군데?'

 

혹은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라며 노발대발하며 하나회를 다 날려버립니다

 

일단 아무리 장군들의 힘이 쎄도

법적으로는 국가 원수(대통령)가 장군을 지휘하는 것이 맞고

물론 그 법을 안지킨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한국사회를 장악해온 것이었지만

당시는 오랜 군부정권때문에 국민들의 군에 대한 반발도 상당했기에

하나회는 결국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김영삼 정부에 의해 해체됩니다

이에 군은 다시 문민통제 원칙으로 돌아갔고

 

오랜 군부정권에 지쳐있었던 국민들은

김영삼의 화끈한 하나회 숙청에 흥분했고

임기초기 김영삼의 인기는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금융실명제]

또 김영삼은 같은해

1993년 8월 예고없이 대통령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는데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가명계좌로 금융거래가 가능해서

이는 원래는 예금을 늘리려 했던 정책이었지만

불법자금 , 검은돈들이 적지않게 돌아다녔는데

 

이런식으로 익명 , 차명 , 가명계좌가 가능하면

세금을 정확히 추징하는게 불가능하기에

여러 논란이 있었고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금융실명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신군부의 전두환과 노태우는 자신들의 비자금을 꽁치는데 집중해야 했기에

금융실명제 실시가 될리가 없었고

결국 김영삼은 임기초부터 화끈하게 하나회 숙청 , 금융실명제를 밀어붙입니다

 

금융실명제 실시당시 기사

 

금융실명제 발표다음날에는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지만

불법자금을 더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국민들이 공감해주면서 결국 주가는 3일만에 다시 안정됬고

다음해 김영삼 공식 지지율은 90% 에 육박할 만큼

김영삼은 대통령임에도 국민들의 인기스타가 됩니다

 

[YS는 못말려]

김영삼의 인기가 너무 많으니

그의 이니셜 (김영삼 KYS) 을 딴

 

'YS는 못말려'

 

라는 김영삼을 호의적으로 풍자한 유머집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됬고

 

YS는 못말려 , 90년대 책표지는 특유의 감성이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유명 연예인과 운동선수를 제치고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선정됬고

여대생 사이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인물 1위에 선정됩니다 (부럽ㅠ)

 

일단 YS는 못말려는 진심 90년대 개노잼 감성이 있는 유머집이지만

 

(ㄹㅇ 80~90년대 서울 말투나 유머집이 되게 느린템포에 순박하고

그런게 있습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큰 의의가 있는 유머집이긴 한데

기존까지 무소불위 , 절대적 권위의 상징이었던 대통령을 가지고

풍자 , 농담을 할 수 있는 신호탄이었던게 YS 못말려였고

김영삼 대통령은 김03 이니까 땡삼이(03이) 라고도 불립니다 (보통 김영삼 깔때 쓰는 말)

 

박정희나 머머리였던 전두환 같은 경우는 자신 입맛에 맞지 않거나

연예인이 머머리일 경우 불경죄로 곧바로 출연금지를 시키는 등

여러 언론통제 , 방송통제를 했던 쫌생이였기에

대통령을 풍자하고 농담거리로 삼았다는 거 자체로도

그만큼 신선한 책이었고 그만큼 사회가 민주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YS는 못말려 중에서...>

절친한 친구와 대통령에 당선된 YS의 통화.

 

'축하한다. 드디어 당선이 됐구만. 

부인도 그리 고생하더니 이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구만.'

그러자 YS가 화들짝 놀라며

'그게 무슨 소리고. 우리 집사람이 언제는 퍼스트 아니었나. 

우리 집사람은 절대 세컨드가 아니다'

 

(진심 무표정으로 봤고 90년대 개그감성 참 좆같군요 ^^)

 

일단 모처럼만에 민선대통령이자 시원시원한 모습으로

인기스타가 된 김영삼 대통령에 국민들은 지역구분없이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줬고

이전부터 심화된 영호남 지역감정 구도가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도 생겨납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이전부터 앞만 보며 달리며 급격히 성장한 한국 경제가

슬슬 후유증이 발생하고 모순들이 폭발하는 시기였고

정부 내내 수많은 사건사고 , 대형사고가 발생하게 되며 김영삼은 정권 말기에는

초기의 인기는 모두 증발하고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나오기 전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하게 됩니다

 

[우루과이 라운드]

김영삼 정부시기 사건사고는 너무 많고

큰 문제들이어서 다음 이야기때 쓰겠고,,

 

일단 김영삼 정부때부터 세계사회는 점차

국제화 , 세계화시대로 진입하고 있었고

이에 1994년 대한민국 쌀시장 개방 문제가 논의됬는데

좁고 빈약한 땅의 한국은 농업에서 막대한 땅과 풍부한 자원으로 밀려오는

세계 농산물들을 막아낼 힘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 무역협상인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생존 위기에 직면한 한국농민들은

죽음을 각오한 강경투쟁의지를 미국 협상단에게 전달했고

 

1994년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를 하는 한국 농민들

 

이는 식량안보 , 주권과도 연관되있는 문제였기에

당시 김영삼은 쌀개방만큼은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 했지만

그 결과 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이 개방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쌀도 결국 의무수입량을 늘리다가 2015년부터 완전개방됬고

이후 여러 문제점들이 발견되며

한국 농업 경쟁력이 얼마나 빈약한지 드러나는 계기가 됬습니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자급자족 농업이 중심이었던 한국 농업 , 생산시장을

크게 바꿔놓았고 식량작물 위주의 한국 농업문화는

특용작물 , 특산작물쪽으로 변화하며

많은 논이 밭이나 과수원들로 탈바꿈합니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으로 결국 김영삼은 국제화의 대세를 막기 어려워

미국이 주도하는 쌀시장 개방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 협상의 여파로 1995년부터 김영삼의 지지율이 다소 하락합니다

 

[역사 바로세우기와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일단 그럼에도 김영삼은 자신의 민주화운동 일생과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며

1993년부터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시행해

군부출신 인사들을 숙청하는 대대적 과거사 청산에 나섰고

 

역사바로세우기 휘호를 쓰는 김영삼 대통령

 

하나회 청산뿐만 아닌 일제강점기 잔재 청산을 시행하며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시킵니다

 

철거전 광화문의 조선총독부 청사 (전통 궁궐과 바로 붙어있어 심미적으로도 좋지 않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식민지배 36년의 악몽을 상징하는 건물이었고

무엇보다 수도 서울 상징인 광화문 앞에 놓인 흉물스러운 위치였기에

일단 정말 좋지는 않은 모습이었고

 

근데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엄청 호화스럽게 공들여 만든 식민지 청사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줄 생각하고

그들 나름대로 조선총독부 건축에 공들여서

타일 , 조각 , 대리석 등 여러 수작업들이 들어간 건축이었고

 

(다 조선인들 피로 만든 것이고

그렇다고 유럽 건물에 비해 큰 독창성이나 화려함은 없었습니다)

 

조선총독부 내부 모습

 

광복 이후에는 한국정부 청사건물로도 사용됬으나

그 존재 자체가 일제강점기를 연상시키고

한국 수도 중심에 위압적으로 있어 경복궁 , 청와대 , 북악산도 가리고 있었고

한국 독립 이후 한국에 방문한 일본인들은

이 건물을 보며 식민지배 역사를 반성하는게 아닌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다는 우월감과 제국주의 향수에 도취되

한국인들을 매우 기분나쁘게 했고

 

결국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1995년 3월 1일부터 해체됩니다

 

<당시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겨레의 생존까지 박탈했던 식민 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여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통일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궁 복원 작업과 

새 문화 거리 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함을 엄숙히 고합니다.

 

철거되는 조선총독부 , 폭파했다고 와전되지만 폭파는 아니고 절단해체라 합니다

 

일본정부는 자신들이 비용을 전액지불할테니

통째로 옮겨가면 안되냐고 김용삼 정부에게 입장을 표명했는데

당시 일본정치인이 식민지 시절 잘해준것도 있다는 망언으로 해서

반일강점이 강했고

이런 발언에 열받은 김영삼은

 

'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

 

하고 조선총독부를 날려버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하고

 

당시 화제가 된 버르장머리 발언

 

일본인들은 왠만한 한국통들도 이

'버르장머리' 라는 말이 뭔지 단어를 해석하지 못했다하고

 

(그냥 일본식으로라면 염치나 체면 이런거로 해석하면 될텐데 싶고

근데 ㄹㅇ 일본인들이 역사의식이나 버르장머리 개념이 잘 없어

미국에게도 꾸준히 개기다 엉덩이를 자주 맞았습니다)

 

한국내에서는 김영삼의 시원한 반일 및 조선총독부해체 모습에

환호했고

또 일본인들은 김영삼을 벼르게 됩니다

 

[전두환 · 노태우 구속사건]

역사 바로세우기는 계속되어서

1995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태(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 광주학살 ,

거액의 정치 비자금을 조성한

신군부의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시켰고

둘은 다음해 재판에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습니다 (이후 감형됨)

 

구속당시 손을 꼭 잡고있는 전두환과 노태우

 

결국 둘은 모두 구속수감되었고

전직 두 대통령의 구속에

국내는 물론 세계의 주목까지 받는 1995년 당시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출소했을때 교도소 생활이 어땠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두환은

 

'여러분들은 교도소에

가지 마십시요'

 

라고 대답합니다

 

동시에 두정권에 의해 세상에 밀폐되거나 가려졌던

12.12사태 및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 , 실상이 공개되었고

군사정권에 맞서며 온갖 고초를 겪었던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의 명예가 회복됩니다

 

[OECD 가입]

김영삼은 일부 공기업을 민영화시키기도 했고

1996년까지는 기업투자가 활발했기에

GDP 증가율도 5.9~9.6% 라는 호조로 그해 말 국민 총소득은

처음으로 1만달러를 넘어섰고 내수시장도 활황이었으며

1996년 10월 11일 경제선진국가단체라 불리는 OECD 에 한국이 가입하게 됬고

슬슬 선진국 놀이터에가서

'나도 같이 놀아주셈' 하고 외치게 된 한국인들이었습니다

 

선진국 클럽 OECD에 가입한 한국

 

[소황제 김현철]

1996년까지 나름 여러사건사고도 있었지만

초기 시원한모습 , 역사바로세우기 , 경제 성장으로

이때 김영삼이 임기를 마쳤다면 ㄹㅇ 위인전에 나왔을 것이라는 농담도 나돌았으나

점차 여당의 병크 , 김영삼의 둘째아들 김현철이 뇌물의혹으로 구속되는 등

악재가 겹치다 1997년 IMF 경제위기가 터지며

김영삼 정부는 완전히 붕괴합니다

 

김현철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은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업고

정계에 입문했는데

1992년 아버지가 14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공식적 직책은 없었지만

'소황제' , '소통령' , '황태자' 소리를 들으며

문민정부 최고 비선실세로 군림했고

 

당시 김현철의 위세가 대단해

국정운영 , 인사권 개입까지 해서 그는 대한민국 모든 주요인사들을 주무르다싶이 했고

 

이후 YTN 사장 인선과 고속도로 휴게소 입찰에 개입한 흔적이 밝혀져

궁지에 몰리다 검찰의 수사가 시작됬고

1992년 대선자금쓰고 남은 120억원을 개인 비자금으로 관리함이 같이 드러나

결국 조세포탈혐의로 구속 , 실형을 선고받습니다

 

1997년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혐의로 구속된 김현철

 

권력을 막 휘두루다가 꼬리가 잡힌것이었고

구속수감된 김현철은 감옥에 있는 동안 스스로를

'정치적 희생양' 이라 주장하며 울화병을 얻었고

 

김현철은 면회오는 이들에게

다들 나한테 붙어서 단물만 빨아먹더니

지금은 다들 어디갔냐며 울화통을 터트렸다고도 합니다

 

1999년 김현철은 김대중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

이후 2004년 아버지 고향인 거제시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다 사퇴했고

같은해 불법정치자금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최종적으로 집행유예 2년과

추징금 5억을 선고받았는데

수사받는 과정에서도 거짓말이 들통나자 송곳으로

아주 경미한 자해소동(자해 쇼)을 일으켰고

상처가 경미해 본인도 민망해했다는 기사가 나오자

아버지인 김영삼은 극도로 한심해 했다고 합니다

 

김현철은 이후에도 진보 , 보수계에서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다가

이후 정치권과 엮여

민주당에 입당하고 민주화 인사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아버지가 평생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투사로 살았기에

보수정당 인물 ,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하고

요즘은 민주당에서 탈당해서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합니다

 

(솔직히 저도 현재 생존인물이나 요즘 사람들 이야기하는게

좋지만은 않은데

한국사에서 김현철은 김영삼 정부시절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소황제 , 황태자로 군림하다

망신당한 인물이라 알고 있으면 됩니다)

 

<라봉봉>김영삼은 민주화 세력에는 배신자로 까이고 있고

보수계에서는 대통령 만들어놨더니 곧바로 뒷통수친놈 이미지가 강해서

양쪽으로 까인 인물이나

나름 오랫동안 군부정권 , 보수 세력이 한국에서 너무 강했기에

민주당이 정권을 잡기전 보낸 일종의 중재자 캐릭터였다고도 생각됩니다

 

참 한국 정치사도

지금보다 더 미숙한 모습이 강했던게 보이고

80~90년대가

 

'강한자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직선적이고 단순무식 , 개도국의 야만성이 강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정치도 참 금권정치 , 권력남용 등 단순무식한 경향도 있었고

일단 위 이야기는 나름 김영삼정부의 좋은 점 위주의 이야기였고

다음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 최악의 사건중 하나인 IMF 와 여러 사건사고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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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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