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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시기 사건사고>

[내귀에 도청장치]

[유전무죄 무전유죄]

[문익환 · 임수경 방북사건]

[우지 파동]

[청문회 스타 , 노무현 명패사건]

[개구리 소년 사건]

<라봉봉>

 

[내귀에 도청장치]

1988년 8월 4일 밤 MBC 뉴스데스크에서

강성구 앵커가 지하철 요금을 인상한다는 뉴스를 소개하는 도중

갑자기 어느 남성이 난입해서는

 

<어느 남자>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읍니다 !

여러분 !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읍니다 !

(끌려가면서) 저는 가리봉 1동 136의 35번지에 사는 소창영이라고 하옵니다 !

 

라고 외치고 끌려갔고

생방송 도중 그렇게 뜬금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귀에 도청장치 사건

 

그 사람의 이름은 소창영 , 1988년 당시 25세 젊은이었고

선반공으로 일하다 점심시간 동료들과 축구를 하다 축구공이 귀에 맞아

고막이 파열된 이었고

치료를 받은 뒤에도 이명증상이 멈추지 않자

의사가 자신의 귀에 도청장치를 심어놓았다는 망상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타나

내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며

소동을 벌인 인물이고

뜬금없는 일들이었지만 당시

 

'독재사회분위기속 공포에 질린 시민'

 

류의 이야기로 회자되는데

실제 90년대 초까지

민주화운동가들이 고문받거나 공안조작사건이 횡행했고

감시 도청과 고문등으로

국가폭력에 의해 폐인이 된 사람도 있었기에

비록 정신이상자 , 망상자가 방송국에 난립해 외친 것이었음에도

그러한 시대상을 반영한 유행을 탄 환자였다고 보여집니다

 

(정신질환자는 감기처럼 마음이 아픈것일 뿐이지

아예 위험하거나 나쁘게만 봐서도 안된다 생각합니다

도청장치를 외친 사람도 시대 분위기 타며

망상과 결합해 한 발언같습니다 ㄹㅇ 이게 맞지 않을까 싶군요)

 

하여튼 헤프닝이지만

이러한 어둡고 막막한 독재정권의 시대상속에

크게 회자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내귀에 캔디 ! (중얼중얼)

 

[유전무죄 무전유죄]

노태우 정부시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역시 '지강헌 인질극 사건' 입니다

 

지강헌 인질극 사건

 

지강헌은

1988년 10월 8일부터 10월 16일에 걸쳐

지강헌을 선두로 그와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되있던

12명의 미결수들이 집단 탈주해

그중 4명이 서울 서대문구 일반 가정집에 침입해 인질극을 벌인 사건으로서

 

보통의 탈주극이 아니었기에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남긴 사건이 됩니다

 

이들은 원래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이었는데

긴 형을 살아야 했고

560만원 절도를 저지른 자신은 17년을 살아야하는데

600억원을 횡령한 전두환의 막내동생이 겨우 7년 (실제로는 2년만에 풀려남) 인

사실에 분개해 탈출한 것입니다

 

탈출과정에서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권총을 탈취해

흉악범이 됬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흉악범은 아니었습니다

 

최후까지 잡히지 않던 5명중 4명 (지강헌 , 안광술 , 강영일 , 한의철) 은

서대문구 고모씨의 가정집에 잠입해

고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인질을 잡고있는 지강헌

 

인질극은 TV로 생중계 됬고

경찰 1천명이 집을 포위하자

인질범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한의철과 안광술은 자살했고

지강헌은 경찰에게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

카세트 테이프를 요구합니다

 

경찰은 지강헌의 요구에 따라

홀리데이를 틀어줬고 그는 인질극을 벌이며 이렇게 외칩니다

 

<지강헌>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

우리 법이 이렇다

 

지강헌은 노래를 들으며

창문을 깨서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고

곧 경찰특공대원들이 집에 진입해 인질들을 구출합니다

 

지강헌이 자신의 목을 찌르자

경찰특공대는 인질이 위험한 거로 판단해

지강헌의 다리와 옆구리에 총을 발사했고

몇 시간뒤 지강헌은 과다출혈로 병원에서 사망합니다

 

이후 나머지 탈주범도 잡히며 이 희대의 인질극 사건은 막을 내렸고

당시 인질들과 경찰이 증언한 바로는

지강헌 일당은 예상 밖으로 대단히 신사적이었고

그들의 목적은 방송이지 탈주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범인들은 인질들에게도

 

'죄송하다 조금만 참아달라 , 금방 끝낼테니 이해해달라'

 

며 두려워하는 인질들을 달랬고

경찰들 앞에서 인질의 목에 칼을 대며 고성을 지르면서도

인질에게는 귓속말로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

 

며 인질들을 배려하려 했습니다

 

그렇다고 범죄가 정당화 될수는 없지만

지강헌의 명분은

전두환 동생같이 수십억원대 사기와 횡령으로 징역 7년 실제로 2년을 산것에 비해

돈있고 권력있는 자는 특혜를 받고 돈없고 권력없는 자들은

중형을 받는 대한민국 불평등 현실에 분노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가 인질극을 벌이는 영화인

'머니 몬스터' 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사회는 여러 충격을 받게 되었고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 ,

시국치안에는 강하지만 민생치안에는 무능한 경찰이라는 인식들이

퍼지게 됩니다

 

또 그가 말한 사법부와 황금만능주의를 제대로 꼬집은

 

'유전무죄 , 무전유죄 (돈이 있으면 무죄 , 돈없으면 유죄)'

 

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말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법부는 과거에는 독재정권에 결탁한

사법살인기관으로 , 오늘날에는 돈과 권력을 가진자에게 유리한

불평등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문익환 · 임수경 방북사건]

1980년대 재야운동권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7일 북한에 무단으로 방문해

3월 29일 김일성을 만나 합의서를 체결했는데

 

문익환 목사가 몰리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포옹하고 성경을 건내주는 상황이 발생하자

대한민국(남한) 에는 삽시간에 공안분위기가 조성됬고

 

김일성과 포옹하는 문익환 목사(왼쪽)

 

이후

1989년 6월 30일부터 8월 15일까지

한국외대 용인캠 불어과생 임수경은

통일운동을 해야한다며 또다시 몰래 북한에 방북합니다

 

김일성과 만난 임수경 학생

 

그런데 이러한 돌발적 행동들에

남북 모두 난처해지게 됬고

북한은 나름 그녀의 방북을 체제선전에 이용하려 했지만

재기발랄한 여대생 임수경은

 

<임수경>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

 

라고 말하거나 북한사람들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세습정치에 대해 물고 늘어지거나 하는 등

뜬금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남북 모두가 충격을 받게 됬습니다

 

나름 재기발랄한 평범한 남한 여대생의

신선한 모습에 임수경은 북한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고

북한사람들은 임수경이 남한으로 돌아갈때

그녀가 사형당할줄 알고 걱정됬지만

징역 5년이 선고됬고 실제로는 3년 반만에 나왔다는 사실에

남한이 잔혹하고 무자비한줄 알았던 북한사람들은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 그녀의 돌발행동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큰 논란과 비판이 있었고

꼭 무모한 혈기나 패기로 위험국가에 방문하다

끔찍한 사고가 나는 사건들이 오늘날에도 여럿 있기에

그녀 자신 뿐만 아닌 그녀의 가족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런일로 유명세를 타 비례대표로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는데

별다른 정치의식이나 국민의 지지가 아닌

그냥 어그로를 끌고 이름이 유명해져 국회의원이 됬다 생각되고

국회의원이 되고나서도 운동권 시절의 극단적 사고를 고수해

여러 논란이 있었습니다

 

(저는 위험한데에 가지말라는데

똥고집부리며 기어코 가는 자들을 결코 좋게 보지를 않습니다

이들이 인질이 되면 이들만 피해입는게 아니라

협상하거나 자금요구등 국민의 혈세[내가 내는 돈] 가 투입됩니다)

 

[우지 파동]

1989년 11월 3일에는

한국 식품계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우지 파동' 입니다

 

우지는 소기름을 의미하는데

1989년 11월 3일 공업용 우지로 라면 면을 튀겼다는 익명의 투서가

서울지방검찰성에 날아오며 사건이 시작됬고

이에 삼양식품 , 오뚜기 식품 등 여러 회사들이

적발되고 대표 및 실무책임자들이 구속됩니다

 

이러한 검찰의 일방적 처리에

업계는 즉시 반발했고

특히 국민라면이라 불린 삼양라면을 만드는

삼양사의 타격이 컸습니다

 

우지는 팜유보다 더 비쌈에도

국민에게 동물성 지방분을 보급한다는 명분으로

사용한 것인데 (실제로 우지로 튀긴게 더맛있다고 합니다)

이후 이상없음 판정을 받았지만

 

당시 언론들까지 가세해

삼양사 등이 공업용 우지를 사용한다고 단체로 물어뜯었고

이에 외국 언론들도 한국라면의 문제점에 대해 대서특필했고

삼양사는 계속 언론과 여론에 구타당하며

라면 강자의 자리를 농심에게 내주게 됩니다

 

우지파동 당시 신문

 

당시 국민들은 한창 계속되는 개발로

대다수가 2차 산업현장(공장) 에서 일했기에

온갖 유해물질에 시달려 유해물질 두려움이 컸던 시기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라면에 공업용 , 윤활유 기름을 썼다는 소문이 퍼지며

선동이 확산되 국민들은 분노했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국민라면으로 먹어온

삼양라면에 발길을 끊고

팜유쓰던 농심은 완벽히 업계 1위 왕좌에 등극합니다

 

오늘날에도 라면으로 유명한 삼양과 농심

 

이상하게 어느 분야던 업계 1위면

괜히 이유없이 나쁜놈 , 사악한 놈 , 독재자

이미지가 생기는거 같기도 한데

농심이 정치계와 결탁해 삼양을 조지려고 이러한 선동을 했다는 루머도 나왔지만

당시 팜유를 쓰던 농심은 삼양이 쓰던 우지보다 단가가 비싼 팜유를 썼고

또한 이미 우지파동 당시 농심은 삼양을 따돌리고

라면시장 1위를 먹은지 오래인 상황이라

오늘날에도 농심측에서는

 

'우리도 그해 매출 30%가 줄었다 ,

그전에도 시장 1위였는데 뭐하러 그러냐'

 

라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근데 오늘날까지 한국사회에서는

우지파동으로 사악한 농심이 착한 삼양을 조졌고

농심을 불매해야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삼양은 이미 우지파동 전부터 농심에 3배차이로 밀려있었고

이미 이전부터 올림픽 스폰서가 되어

적극적인 마케팅과 고급화 , 신제품 개발하던 농심이었고

 

농심과 삼양사의 이야기가 나온 글

 

단지 우지파동 이후 삼양라면은

국민라면 이미지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삼양에게 우지파동이 준 악영향은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컸고

우지파동 이후에도 전문경영인이 물러나고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창업주 자식들이 경영권을 쥐고 고전을 하게 됬고

또 삼양 창업주 일가는 회사를 페이퍼컴퍼니화 하며

점차 라면의 원조 , 국민 식생활 기여 등의 초심을 잃고

한때 라면왕 이미지에서 평범한 라면회사로 전락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오늘날까지 삼양이 좋고 농심이 나쁘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피해자 코스프레나 이미지에만 속아서도 안되고

기업 관리능력이 개판이면 어느 기업이던 나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라면회사들이 여러 제품들을 개발해오고 있지만

옛날 우지로 만든 라면맛이 그렇게 좋았다는데

우지파동 이후 한국에서는 동물성 기름요리는 공업용 이외에도

건강에 나쁘다는 인식이 굳어지게 됬고

그놈의 선동이나 건강마케팅때문에 인체에 무해한 MSG 도 빠지고

질소 과대 사기 포장 등

점차 한국 가공식품들이 옛날보다 맛이 없어지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저도 한국인이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은 특히 과학이 대중화가 안되서

여러 선동속에 원자력 , MSG , 동물성기름 등을 그저 악으로 보고

쉽게 선동당하는 경향이 있어보입니다)

 

외국은 음식에 라드라고 일부로 동물성기름을 넣어 풍미를 좋게한다는데

하여튼 우지파동 이후 한국 식문화가 축소되어 아쉬운 느낌도 있습니다

 

[청문회 스타 , 노무현 명패사건]

1987년 민주화가 달성되고

1988년 국회의원 선거직후 여소야대현상이 발생하자

민주화 세력들은 거대해진 야당의 힘으로 여당인 신군부세력 , 독재정권을 압박하고 있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와

'제5공화국(전두환 정부) 비리조사 특별위원회' 를

구성해서 5공화국 인사들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합니다

 

청문에 참여한 하나회 , 보안사 인물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정당한 자위권 발동이라 연설했고

야당의 질문에 묵비권(아무 말을 안함) 으로 일관해 국민적 분개를 사게됩니다

 

전두환도 끝까지 묵비권만 행사하다 퇴장하자

분노한 초선의원 노무현은 분을 참지 못해

명패를 땅에 내팽겨 쳤는데

TV로 생중계되는 청문회였기에

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습니다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의원의 분노

 

전두환 부부는 청문회 직후 절인 백담사에 들어가

자의반 타의반 사실상 유배생활을 하게 됬고

 

청문회 사건 이후 백담사에 은둔했던 전두환 부부

 

하여튼 노무현 의원은

청문회에서도 조리있고 차분한 질문들을 던지며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고

그를 가장 주목하고 차기 대통령 후보로 여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그와 악연이 깊은 조선일보였습니다

 

(조선일보가 이미지는 안좋지만

좋게 말하면 기회와 이익에 밝은 신문이라

괜히 한국 1위신문은 아닌 느낌도 있습니다)

 

거대한 정치인 , 기업가들 앞에서

활약하며 열혈 모습을 보인 초선의원 노무현은 이 청문회로

국민들에게 좋은 눈도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개구리 소년 사건]

1991년 3월 26일 대구 국민학생(초등학생) 5명은

도롱뇽 알을 수집하러 인근 와룡산에 올라갔다 실종됬는데

사건 초기에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이 사건은 개구리 소년 사건이 되었습니다

 

개구리 소년 실종 1년후 아이들을 찾기 위해 만든 포스터

 

갑자기 아이들은 실종됬고

딱히 집안 문제가 있었던 아이들도 아니어서

가출할만한 이유도 없었는데

이에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모든 경찰과 군인들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괜히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는

장난전화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여러 사회적 관심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없이 영구미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던 중 2002년 9월 26일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가던 오우근씨에 의해

5명의 유골이 와룡산 중턱에서 발견됬고

부검결과 타살된 것이라 추정됬지만

그럼에도 사망원인도 , 범인도 알지 못해

오늘날에도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됬습니다

 

<라봉봉>여러 사건사고가 있던 노태우 정부시기였고

여러 사건들을 쓰느라 너무 앝게 쓴 감도 없지 않아있습니다

 

8~90년대에는 여러 치안에 관련된 사건 , 강력범죄 , 인신매매들이 일어났는데

오늘날 들어서는 CCTV 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민도 역시 상승해

8~90년대보다는 시대가 부드러워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금전 , 사기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보여지고

또 그럼에도 당시에는 당시의 문제가 ,

오늘날에는 오늘날의 문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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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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