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무굴 제국>

[지즈야]

[바부르의 무굴제국 건국]

[악바르 대제]

[무갈의 안정]

[샤자한과 타지마할]

[아우랑제브 황제]

[무굴제국의 문화]

<라봉봉>

 

[지즈야]

자 인도 중세는 이슬람세력이 점차 침입하여

델리술탄왕조 , 노예왕조 등이 등장하며

점차 인도는 이슬람화 되었고

 

그럼에도 인도인들은 전통신앙인 힌두교와 불교 및

카레맛이 너무 강해서 쉽게 중동 이슬람 형들같이 낙타화되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소수의 지배자들은 이슬람교를 믿되

힌두교를 믿던 다수의 인도 피지배층들에게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보호세격인

지즈야라는 인두세를 납부하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주었고

 

지즈야를 내는 백성

 

그렇게 인도의 이슬람 술탄들은 사실 통치자로서 사회유지와 안정이 크게 중요했기에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힌두교도들의 세금과 노동력 확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고

 

평등을 중시하는 이슬람 교리와 달리

인도의 신분제인 카스트 제도도 유지했고

힌두교도들이 지즈야만 납부하면

어떤 신을 믿건 어떤 생활을 하던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힌두교도

 

인도의 이슬람교도

 

그럼에도 지즈야를 납부하기 어려운 하층민들은 이슬람교로 대거 개종했고

맵고 부드러운 카레처럼 점차 이슬람+인도 전통문화가 섞이게 됩니다

 

이러한 전통은 델리술탄왕조 다음 왕조인 무굴제국 , 무굴왕조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바부르의 무굴제국 건국]

무굴제국을 건국한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에서 패권다툼에 밀려 인도로 내려왔는데

이에 바부르는 인도에 1526년 무굴제국을 건국합니다

 

바부르

 

무굴제국 왕은 자신들을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후손이라 자처했고

실제 중앙아시아 튀르크-몽골계열 유목민 출신들이었습니다

 

무굴제국 역시 지배자가 이슬람교를 믿는 이슬람왕조였지만

바부르는 델리술탄왕조보다 더욱 관대한 종교정책을 펴서

힌두-이슬람 종교 융화정책을 폈습니다

 

[악바르 대제]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대제시기

이러한 융화정책은 절정을 이루어

지즈야를 아예 폐지해버리고

고위 관리직을 힌두교도에게 개방했고

모든 종교와 사상을 존중해 묶어보려는 정책을 시도해

무굴제국은 민족 정체성없이 복합사회로서

여러 개성있게 지내던 인도인들을 통합해가며

통합된 하나의 인도 문화를 만들어갑니다

 

악바르 대제

 

일단 악바르 대제 시기

16세기 무굴제국 , 인도는 전성기를 맞았고

악바르 대제는 데칸고원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합니다

 

무굴제국의 영역

 

[무갈의 안정]

또한 악바르 대제는 토지를 개혁해 농민 생활에 기여하는데

무굴제국은 농촌 사회안정에 가장 큰 심혈을 기울였고

지주들이 소작농들을 과도하게 착취하지 못하게 관리했지만

 

지주가 더 크게 성장하거나

대토지 경영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지주체제의 소농업 경영을 유지시킵니다

 

이를 무갈의 안정 Mughal's stability 이라 부르는데

무갈의 안정은 중소의 안정에만 집중해

대규모 체제를 부정하는

일종의 자폐적 안정이었고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안정이나

끓는 물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같은 안정이었습니다

 

무갈의 안정 , 무굴제국 시대 그림

 

무갈의 안정 정책으로인해

중앙정부-지주-농민의 밀접한 종속관계가 형성됬고

중간의 귀족 , 지주들은 무굴제국 정부의 견제에 적극적인 투자보다는

지역구의 작은 왕으로 지내면서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며

서양 귀족 , 지주들처럼 지식인 , 부르주아 계층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결국 무굴제국은 서양처럼 도시가 발전하거나 대규모 자본축적 ,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후진적인 봉건사회로 유지되게 됩니다

 

[샤자한과 타지마할]

무굴제국은 워낙 거대한 인도의 땅덩어리 및

풍요로운 자원으로인해

서양을 압도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대국이었고

 

무굴제국 5대 황제 샤 자한 역시 이러한 거대한 제국을 물려받았고

뛰어난 통치로 '세계의 왕' 이라 불렸습니다

 

샤 자한

 

샤 자한은 관용정책과 영토확장을 계속하며

무굴 제국의 명군이 되었고

당시 무굴제국 보병은 90만명 , 기병은 18만 5천명 ,

1년 세금은 악바르 시절의 2배가 넘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제국이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죽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샤 자한은 엄청난 애처가였는데

정략결혼이나 부모의 소개가 아닌 연애결혼으로 만난

자신이 완벽한 이상형으로 여긴

셋째 황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 죽자

상심한 샤 자한은 점차 괴팍한 성격으로 변해가며

순애보적 집념으로 국력을 탕진해가며 무덤인 타지마할을 지어버렸고

 

샤 자한의 아내 뭄타즈 마할

 

인도 대표건축물 타지마할

 

뭄타즈 마할의 무덤 건설에

기존까지 축적해온 무굴제국의 막대한 세금과 인력이 갈려들어가게 됩니다

 

타지마할 건설에

페르시아 , 이탈리아 , 프랑스에서 기술자와 장인들이 초빙되어왔고

중국과 오스만제국 , 이집트에서 온갖 건축자재가 수송됬는데

자재수송에 천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됩니다

 

타지마할 건설 그림 , 뚝딱뚝딱

 

아무리 오늘날 타지마할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문화유산이라 하나

결국 무덤이기에 전혀 실효성 , 생산성이 없는 건물이기도 했고

 

2만명의 건축가와 장인을 비롯한 인부가 동원되

22년간 쌓아올린 피의 무덤이였습니다

 

또한 공사가 끝난 뒤 황제는

2만 노예 장인들을 처형하거나 손목을 잘라버렸는데

그 이유는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이로인해 가장 아름다운 인도 건축물이지만

인도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타지마할로 인해

피의 저주 , 타지마할의 저주가 생겨서

무굴제국은 멸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황후의 무덤건설에 제국의 국력이 소진되자

점차 백성들은 죽어가고 신하들은 반달했지만

샤 자한은 그런 신하들을 힘으로 누르고 건설을 강행하다

세금에 등골이 휘는 백성 , 신하들의 민심을 잃게 됩니다

 

샤 자한의 왕자들마저

갑자기 암군이 되버린 샤 자한에게 지쳐버렸고

결국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는

자신의 어머니 무덤이라도 아닌건 아니라 생각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탑에다가 가둬버렸고

 

말년의 샤 자한이 갇혀 여생을 보낸 아그라 요새

 

1658년부터 샤 자한은 요새의 팔각탑에서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의 묘를 바라보며 여생을 보내다

1666년 죽어서야 타지마할의 아내 옆에 나란히 눕혀졌습니다

 

타지마할 내부의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석관

 

[아우랑제브 황제]

샤자 한 이후 아버지 샤자 한을 탑에 가둘 정도로 괄괄했던

아우랑제브 대제때

무굴제국은 남인도까지 통일해 인도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합니다

 

아우랑제브 황제

 

무굴제국의 코끼리병

 

그러나 아우랑제브 대제는 무리한 대외 원정으로

재정이 궁핍해져 이슬람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종교세인 지즈야를 부활시키고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힌두교도들을 탄압해

비 이슬람교도들의 저항을 받았고

비이슬람교도들은 마라타 동맹 , 시크교의 반란으로 대항합니다

 

마라타 전쟁과 시크 전쟁 , 무굴제국의 붕괴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점차 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산업혁명으로 산업화 , 선진화에 성공한 서양에 비해

후진적 농업중심 국가 성향이 강했던 무굴제국은

강력한 서양세력의 총과 대포에 점차 붕괴해갑니다

 

[무굴제국의 문화]

그렇게 무굴제국은

인도+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는데

 

시크교는 아예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융합해 만들어진 종교고

유일신 신앙이자 우상숭배와 카스트제도를 부정했습니다

 

시크교의 황금사원

 

무굴제국의 언어는

힌두어+페르시아어+아랍어가 혼합된 우르두어였고

무굴제국의 공용언어가 됩니다

 

아랍문자를 사용한 우르두어

 

건축으로는 위에서 이야기한

힌두양식(연꽃무늬) 과 이슬람양식(돔 , 첨탑 , 아라베스크 , 아치) 이 융합한

타지마할이 유명하고

한국의 경복궁처럼 나라를 대표하는

참 아름다운 건축물이자 백성들의 한이 서린 건축물이었습니다

 

타지마할

 

<라봉봉>어렸을때 본 인도 역사에서는

타지마할 건설이 참 낭만적인 모습도 있었다 기억하는데

지금 봐도 물론 그렇기도 하나

이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컸기에

참 인도의 아름다운 독버섯같은 건축물이었습니다

 

샤 자한은 인도판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이라 생각되고

그 슬픔이 이해가 되지만

이로인해 죽어간 백성들은 무슨 죄였을까 싶군요

 

반응형

'어린이 세계역사 > 1집 Hello, Worl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날의 인도  (0) 2020.05.22
인도의 민족운동과 반영독립운동  (0) 2020.05.22
굽타 왕조 , 델리 술탄 왕조  (0) 2020.05.16
마우리아 왕조와 쿠샨 왕조  (0) 2020.05.02
인더스 문명  (0) 2020.04.29
Posted by 라봉봉
,